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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百濟BC 18 – AD 660

문헌 원문 ·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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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제7편 백제 강성 朝鮮上古史 第7篇

신채호 · 1931 · 저본 한국어 위키문헌
문단 83개 · 번역 확정 0개
제7편문단 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제 1 장 고구려 · 백제 양국 관계의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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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가 생겨난 까닭
제7편문단 2번역 대기
원문
=== 남낙랑(南樂浪) · 동부여(東扶餘)의 존망(存亡)과 고구려 · 백제 양국의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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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3번역 대기
원문
고추모(高鄒牟: 고주몽)와 소서노(召西奴) 부부가 갈라져서 고구려 · 백제의 남·북 양 왕국(王國)을 건설한 이후에, 고구려는 북방 열국을 차차 정복해 들어가 북방의 유일한 강대국이 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백제는 온조왕(溫祚王)이 마한(馬韓) 50여 나라를 통일하고 진(辰) · 변(弁) 양한(兩韓), 곧 신라·가라(加羅)를 정복하여 남방의 유일한 강대국이 되었음은 이미 제4편 · 제5편에서 간략히 서술하였다. 두 강대국이 이와 같이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으면서도 수백 년 동안 피차간에 한 차례의 접촉도 없었던 이유는 남낙랑(南樂浪)과 동부여(東扶餘)가 양국간의 중간에서 장벽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양국간의 접촉 사실을 말하려 하는바, 먼저 남낙랑과 동부여의 존망(存亡) 관계부터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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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4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남낙랑(南樂浪)과 동부여(東扶餘) 열국이 고구려 대주류왕(大朱留王: 大武神王)의 정복을 받은 뒤에 고구려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늘 중국의 지원을 빌어 이를 보복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태조대왕 때에 왕자 수성(遂成: 次大王)이 한(漢)과 싸워 이겨 요동과 북낙랑을 회복하자, 남낙랑과 동부여가 고구려의 위력에 두려워 복종하며 준동(蠢動)하지 못하였음은 물론이고, 백제 또한 고구려에게 신하로서 복종하며 그 요구에 응하여 기병(騎兵)을 내어 고구려의 서정(西征)에 참가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제4편과 5, 6편에 이미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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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낙랑과 동부여 열국이 고구려 대주류왕(大武神王)에게 정복당한 후에도 고구려에 대한 원한을 품고 늘 중국의 지원을 빌려 이를 보복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태조대왕 때 왕자 수성(次大王)이 한과 싸워 이겨 요동과 북낙랑을 회복하자, 남낙랑과 동부여는 고구려의 위력에 두려워 복종하여 준동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백제 또한 고구려에게 신하로서 복종하며 그 요구에 응해 기병을 내어 고구려의 서정에 참가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제4편과 5, 6편에 이미 말하였다.
제7편문단 5번역 대기
원문
백제사(百濟史) 역시 중간에 연대(年代)의 삭감이 있어서 고구려 태조왕 때가 백제의 어느 왕 어느 대(代)에 상당하는지는 아직 발견할 수 없고, 백제 초고왕(肖古王) 이후에야 그 연대를 겨우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초고왕 32년은 곧 고구려 산상왕(山上王) 원년(기원후 197년)이니 , 고구려가 발기(發岐)의 난으로 인하여 요동과 북낙랑을 한인(漢人) 공손씨(公孫氏: 제 5 편 제 1 장 참조 )에게 빼앗기자, 남낙랑과 동부여는 고구려를 배반하여 자립하였다. 그리고 남낙랑의 남부에 위치한 대방(帶方: 지금의 장단(長圖) 내지 봉산(鳳 ) 등지)에서는 호족(豪族) 장씨(張氏)가 또 남낙랑을 배반하고 대방국(帶方國)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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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6번역 대기
원문
백제도 이를 기회로 고구려와 관계를 끊고 자립하였으며, 초고왕(肖古王)의 아들 구수왕(仇首王)은 예(濊)가 쳐들어오는 것을 물리쳐서 나라의 형세가 더욱 강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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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7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백제의 고이왕(古爾王)은 초고왕(肖古王)의 동복아우(同母弟)로서, 기원후 234년에 구수왕이 죽자, 구수왕의 태자(太子: 고이왕의 종손(從孫)인 사반(沙伴))의 나이가 어린 것을 기회로 그 왕위를 빼앗았다.
번역
백제의 고이왕은 초고왕의 같은 어머니를 둔 아우로서, 기원후 234년에 구수왕이 죽자, 구수왕의 태자(고이왕의 종손인 사반)가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틈타 그 왕위를 빼앗았다.
제7편문단 8번역 대기
원문
이때 고구려가 관구검에게 패하고 나서 낙랑국(國)을 습격하여 남낙랑구의 옛 수도인 평양을 빼앗아 도읍을 옮기고, 남낙랑국은 풍천원(楓川原: 지금의 평강(平康)과 철원(鐵原) 사이)으로 옮겼는데, 고이왕은 남낙랑국의 변경을 침략하여 그 백성들을 약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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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9번역 대기
원문
이때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남낙랑과 한편이 되어 동부여를 쳐서 이기고 회군하였다. 고이왕은 아직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백제로서 위(魏)를 대적하여 싸울 수 없음을 알고, 그가 약탈해온 백성들을 돌려주고 화의를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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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10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나 유무(劉茂) 등이 듣지 않고 신라 북부의 여덞 개 나라를 다 남낙랑에게 떼어 붙이려 하였다. 이에 왕이 화를 내며 진충(眞忠)으로 하여금 대방의 기리영(畸離營 : 지역 미상 )을 거쳐 가서 궁준(弓遵)의 목을 베고 위(魏)의 군사들을 물리치니, 대방왕 장씨(張氏)가 이에 백제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그 딸 보과(寶菓)를 고이왕(古爾王)의 태자 책계(責稽)에게 시집보내어 백제와 대(對) 북방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었다. 그리고 기원후 285년에 책계왕(責稽王)이 장인과 사위간의 정과 동맹국 간의 의리를 생각하여 대방을 구원하니, 이것이 백제와 고구려가 충돌하게 된 시초이다.
번역
그러나 유무 등이 듣지 않고 신라 북부의 여덟 개 나라를 모두 남낙랑에게 붙이려 하였다. 이에 왕이 노하여 진충으로 하여금 대방의 기리영을 거쳐 가서 궁준의 목을 베고 위나라 군사들을 물리치니, 대방왕 장씨가 이에 백제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그 딸 보과를 고이왕의 태자 책계에게 시집보내어 백제와 북방에 공수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기원후 285년에 책계왕이 장인과 사위간의 정과 동맹국 간의 의리를 생각하여 대방을 구원하니, 이것이 백제와 고구려가 충돌하게 된 시초이다.
제7편문단 11번역 대기
원문
그 뒤에 고구려는 선비 모용씨(幕容氏)의 발흥(勃興)으로 인하여 서북 방어에 급급하여 남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나, 남낙랑과 동부여는 백제의 강성해짐을 시기하여 기원후 298년에 두 나라가 진(晉)의 원병과 함께 쳐들어갔는데, 책계왕이 나가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책계왕의 아들 분서왕(汾西王)이 즉위하였으나 7년 만에 남낙랑의 자객에게 암살당하였고, 그 뒤를 이어 비류왕(比流王)이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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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12번역 대기
원문
고구려 미천왕(美川王)이 북으로 요동과 북낙랑을 격파하여 선비를 쳐서 물리칠 뿐 아니라 또 남방 경영에도 힘을 써서 남낙랑과 대방을 멸망시키고, 얼마 후에는 또 백제와도 결전을 하게 되었으나, 그 때 미천왕이 죽어서 이 문제는 유야무야 되어버렸다. 미천왕의 아들 고국원왕이 즉위하여 선비에게 패하였음은 이미 전편(前篇)에서 말하였는데, 고국원왕이 북방 경영을 포기하고 남진주의(南進主義)를 취하여 자주 백제를 침벌하다가 마침내 백제의 근구수왕(近仇首王)을 만나 패배하였다. 이로써 드디어 남북 혈전의 형국이 이루어졌는데, 이에 대하여는 다음 장에서 이를 서술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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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13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제 2 장 근구수왕(近仇首王)의 영무(英武)와 고구려의 쇠퇴(附: 백제의 해외 정벌) ==
번역
제 2장 근구수왕의 뛰어난 무용과 고구려의 쇠퇴 (덧붙임: 백제의 해외 원정)
제7편문단 14번역 대기
원문
=== 백제의 대방(帶方) 병합(倂合)과 반걸양(半乞壤)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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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15번역 대기
원문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처음에는 왕후 진씨(眞氏)를 총애하고 왕후에게 푹 빠져 왕후의 친척인 진정(眞淨)을 신임하여 그를 조정의 좌평(佐平 : 형벌과 옥에 관한 일을 담당)을 삼았는데, 진정이 세도를 믿고 함부로 날뛰어 여러 신하들을 억압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아서 20여 년 동안 국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이때 태자 근구수(近仇首)가 영명하여 마침내 진정을 파면하고, 폐정(弊政)을 개혁하고, 대방(帶方)의 장씨(張氏)를 항복시켜 그 땅을 군(郡) · 현(縣)으로 만들고, 육군의 군 편제를 개량하고, 해군을 처음으로 설치하여 바다를 건너 중국을 침략할 야심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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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16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이때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환도성(丸都城)를 버리고 평양으로 천도하여 선비(鮮卑)에게 실패한 치욕을 남방에서 보상받으려 하여 자주 백제를 침입하여 압박하였으며, 기원후 369년에는 기병과 보병 합하여 2만의 군사를 황 · 청 · 적 · 백 · 흑 다섯 가지 색깔의 기(旗)로 나누어 거느리고 반걸양(半乞壞: 지금의 벽란도(碧瀾渡: 예성강의 한 나루))까지 이르렀다.
번역
이때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환도성을 버리고 평양으로 도읍하여, 선비에게 당한 치욕을 남방에서 보상받으려 자주 백제를 침입하여 압박하였으며, 기원후 369년에는 기병과 보병을 합쳐 만이 군사를 황, 청, 적, 백, 흑 다섯 가지 색깔의 기로 나누어 거느리고 반걸양까지 이르렀다.
제7편문단 17번역 대기
원문
근구수가 나가서 싸울 때, 전에 백제의 국영 목장의 목자(牧者)였다가 잘못하여 국마(國馬)의 말굽을 다치고는 죄를 얻게 될까봐 겁을 내어 고구려로 달아났던 사기(斯紀)가 고구려의 군인이 되어서 이 싸움에 참전하였는데, 그가 은밀히 빠져나와 근구수를 찾아와 만나보고 고(告)해 바치기를 “저들의 군사 수가 비록 많으나 거의 다 남의 눈을 속이려고 숫자만 채워 넣은 의병(疑兵)들일 뿐이고, 오직 적기병(赤騎兵)만이 용맹하니, 그들만 깨뜨리면 그 나머지는 스스로 무너져 흩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근구수가 그의 말을 좇아 용감한 정예병들을 뽑아 적기병을 습격하여 개뜨리고 나서, 고구려의 군사를 전부 쳐서 뿔뿔이 달아나게 하여 수곡성(水谷城: 지금의 신계(新溪)) 서북까지 진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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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18번역 대기
원문
그리고 그곳에다 돌을 쌓아 기념탑을 만들고 패하(浿河: 대동강 상류, 지금의 곡산(谷山), 상원(祥原) 등지 ) 이남을 거두어 전부 백제 땅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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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19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전사와 백제의 재령(載寧) 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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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의 전사와 백제의 재령 천도
제7편문단 20번역 대기
원문
반걸양(半乞壞) 전쟁 후 3년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그 빼앗긴 땅을 회복하려고, 정예병 2만으로 패하(浿河)를 건넜는데,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근구수(近仇首)를 보내어 미리 강 남쪽 언덕에 복병하였다가 불의에 맞아 싸워서 고국원왕을 사살하고 패하를 건너 수도인 평양을 함락시키니, 고구려가 이에 다시 국내성(國內城: 지금의 집안현(輯安縣))으로 도읍을 옮기고, 고국원왕의 아들 소주류왕(小朱留王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소수림왕(小獸林王))을 세워 백제를 방어하였다. 근초고왕이 상한수 ( 上漢水 )---지금의 재령강 ( 載寧江 ) 에 이르러 황기 ( 黃旗 ) 를 세워 크게 열병식을 행하고 서울을 상한성 ( 上漢城 ) 지금의 재령 ( 載寧 ) 으로 옮겨 더욱 북방 진출 을 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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