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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百濟BC 18 – AD 660

문헌 원문 ·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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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제7편 백제 강성 朝鮮上古史 第7篇

신채호 · 1931 · 저본 한국어 위키문헌
문단 83개 · 번역 확정 0개
제7편문단 4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래서 고국원왕은 즉위 후에 모용수와 싸워 요동을 회복하고 와려족을 몰아내서 북쪽 경계를 지키기에 급급하여 남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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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고국원왕은 즉위한 후 모용수와 싸워 요동을 되찾고 와려족을 쫓아내어 북쪽 국경을 지키는 데 급급하여 남쪽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제7편문단 42번역 대기
원문
그러나 고국양왕 말년에 이르러 태자 담덕 ( 談德 ) 곧 뒤의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영특하고 용감하여 병마 ( 兵馬 ) 를 맡아 매양 신속한 전략으로 백제의 군사를 습격하여 석현 ( 石峴 ) 등 10 여 성을 회복하니, 진사왕이 여러 번 크게 패하여 드디어 한강 ( 漢江 ) 남쪽의 위례성 ( 慰禮城 ) ---지금의 광주 ( 廣州 ) 남한산 ( 南漢山 ) 으로 도읍을 옮기고, 담덕의 군사가 두려워서 나아가 싸우지 못하여, 중한수 ( 中漢水 ) --- 지금 한강 이북의 땅이 거의 고구려의 차지가 되고 관미성 ( 關彌城 ) --- 지금의 강화 ( 江華 ) 는 예부터 천험 ( 天險 ) 으로 일컫는 곳이지마는 또한 담덕의 해군에게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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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43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삼국사기에는 이 전쟁을 기록하였으나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석에는 이런 말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삼국사기는 원래 고기 ( 古記 ) 에 의거한 것인데, 고기가 이제 전하지 않지마는 여러 책에 인용된 고기의 문자를 보면 편년사 ( 編年史 ) 가 아니고 기전체 ( 紀傳體 ) 이기 때문에 연대의 조사가 매우 곤란하다. 김부식이 착실히 조사해보지 않고 아무렇게나 모든 사실을 각 왕의 연조에 분배하였으므로 아라가라 ( 阿羅加羅 ) 의 멸망은 법흥왕 ( 法興王 ) 원년의 일인데 진흥왕 ( 眞興王 ) 37 년의 일이라 하였고, 담덕의 석현 ( 石峴 ) 등 성의 회복과 나려족의 격퇴는 고국양왕 말년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태자 담덕으로 있을 때의 일인데 왕이 된 뒤의 일로 잘못 기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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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는 이 전쟁을 기록하였으나 광개토대왕의 비석에는 이런 말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삼국사기는 원래 고기에 의거한 것인데, 고기가 이제 전하지 않지만 여러 책에 인용된 고기의 문자를 보면 편년사가 아니고 기전체이기 때문에 연대의 조사가 매우 곤란하다. 김부식이 착실히 조사해보지 않고 아무렇게나 모든 사실을 각 왕의 연도에 분배하였으므로, 아라가라의 멸망은 법흥왕 원년의 일인데 진흥왕 37년의 일이라 하였고, 담덕의 석현 등 성의 회복과 나라족의 격퇴는 고구려 양왕 말년에 광개토대왕이 태자 담덕으로 있을 때의 일인데 왕이 된 뒤의 일로 잘못 기록하였다.
제7편문단 44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잘 분별한 뒤에 삼국사기를 읽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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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잘 분별한 후에 삼국사기를 읽는 것이 좋다.
제7편문단 45번역 대기
원문
===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의 과려족(顆麗族) 원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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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46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고구려 태자 담덕 ( 談德 ) 이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나려가 자주 변경을 침노하므로 즉위 5 년, 기원후 395 년에 원정군을 일으켜 파부산 ( 파富山 ) 과 부산 ( 負山 ) 을 지나 염수 ( 鹽水 ) 에 이르러 그 부락 6, 7 백을 파괴하고 소 · 말 · 양을 노획하여 돌아오니, 파부산은 수문비사 ( 修文備史 ) 에 지금 음산산맥 ( 陰山山脈 ) 의 와룡 ( 臥龍 ) 이라 하였고, 부산은 지금 감숙성 ( 甘蕭省 ) 서북쪽의 아랍선산 ( 阿拉善山 ) 이라 하였으며, 염수는 몽고지지 ( 蒙古地誌 ) 에 의하면 소금기[鹽分]가 있는 호수나 강이 허다한데 아랍선산 아래에 길란태 ( 吉蘭泰 ) 란 염수가 있어 물가에 늘 2자 이상 6자 이하의 소금더미가 응결된다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보면 대개 광개토왕의 발자취가 지금의 감숙성 서북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고구려 역사상의 유일한 원정이 될 것이다.
번역
고구려 태자 담덕이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나라가 자주 국경을 침범했으므로 즉위 5년인 기원후 395년에 원정군을 일으켜 파부산과 부산을 지나 염수에 이르러 그 부락 6, 7백을 파괴하고 소·말·양을 노획하여 돌아왔다. 파부산은 수문비사에 지금 음산산맥의 와룡이라 하였고, 부산은 지금 감숙성 서북쪽의 아랍선산이라 하였으며, 염수는 몽고지지에 의하면 소금기가 있는 호수나 강이 허다한데 아랍선산 아래에 길란태라는 염수가 있어 물가에 늘 2자 이상 6자 이하의 소금더미가 응결된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대개 광개토왕의 발자취가 지금의 감숙성 서북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고구려 역사상 유일한 원정이 될 것이다.
제7편문단 47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이 원정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누락되었고, 광개토왕의 비문에만 기록되었는데 와려가 혹시 본기에 있는 대로 글안[契丹]이 아닌가 하지마는 실은 글안은 선비 ( 鮮卑 ) 의 후예니 광개토왕 당시의 선비는 모용씨 · 우문씨 등이요 , 글안이란 명칭이 없었으니 본기의 글안은 곧 후세 역사가들이 와려를 글안으로 망령되게 고친 것이다. 와려가 글안이 아니면 어느 종족인가? 위서 ( 魏書 ) 나 북사 ( 北史 ) 에 의하면 흉노 ( 匈奴 ) 의 후예인 유유 ( 유유 ) 라는 종족이 지금의 몽고 등지에 분포되어 한때 강성하였으니 와려나 유유가 그글자의 음이 '라라'이니 와려는 곧 흉노의 후예이다.
번역
이번 원정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빠져 있고, 광개토왕 비문에만 기록되어 있다. 와려가 혹시 본기에 있는 대로 글안이 아닌지 의심하지 마라. 실로 글안은 선비의 후예이니, 광개토왕 당시의 선비는 모용씨나 우문씨 등이었고, '글안'이라는 명칭 자체가 없었으니 본기의 글안은 곧 후세 역사가들이 와려를 글안으로 잘못 고친 것이다. 와려가 글안이 아니라면 어느 종족인가? 위서나 북사에 의하면 흉노의 후예인 유유라는 종족이 지금의 몽골 등지에 분포하여 한때 강성했으니, 와려나 유유가 그 글자의 음이 '라라'이니, 와려는 곧 흉노의 후예이다.
제7편문단 48번역 대기
원문
=== 광개토태왕 왜구(倭寇) 격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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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49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왜 ( 倭 ) 는 일본의 본 이름이니, 지금 일본이 왜와 일본을 구분하여 왜는 북해도 ( 北海道 ) 의 아이누 족이요, 일본은 대화족 ( 大和族 ) 이라 한다. 그러나 일본 음에 화 ( 和 ) · 왜 ( 慶 ) 가 같으니 일본이 곧 왜임이 분명한데 저들이 근세에 와서 조선사나 지나사에 쓰인 '왜'가 너무 문화 없는 흉포한 야만족임을 부끄럽게 여겨 드디어 화(和)란 명사를 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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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는 일본의 본래 이름이니, 지금 일본이 왜와 일본을 구분하여 왜는 홋카이도의 아이누 족이고, 일본은 대화족이라 한다. 그러나 일본 음에 화와 왜가 같으니 일본이 곧 왜임이 분명한데 저들이 근세에 와서 조선사나 지나사에 쓰인 '왜'가 너무 문화 없는 흉포한 야만족임을 부끄럽게 여겨 드디어 화라는 명사를 지어냈다.
제7편문단 50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백제 건국 이후까지도 왜가 어리석고 무지하여, 일본삼도 ( 日本三島 : 일본의 국토를 이룬 세 섬, 곧 本州 · 四國·九州 ) 에서 고기잡고 사냥으로 생활을 할 뿐 아무런 문화가 없었는데, 백제의 고이왕 ( 古 爾王 ) 이 그들을 가르쳐 인도해서 봉직 ( 縫織 ) 과 농작 ( 農作 ) 과 그 밖의 백공 ( 百工 ) 의 기예를 가르치고 박사 왕인 ( 王仁 ) 을 보내 논어 ( 論語 ) 와 천자문 ( 千字文 ) 을 가르쳐주고 백제의 가명 ( 假名 ) 곧 백제의 이두자 ( 吏讀字 ) 에 의하여 일본의 가나 ( 假名 ) 란 것을 지어주었으니 이것이 소위 일본 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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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건국 이후까지도 왜가 어리석고 무지하여, 일본삼도에서 고기잡이와 사냥으로 생활할 뿐 아무런 문화가 없었는데, 백제의 고이왕이 그들을 가르쳐 인도하여 봉직과 농작과 그 밖의 백공의 기예를 가르치고 박사 왕인을 보내 논어와 천자문을 가르쳐주었으며, 백제의 가명 곧 백제의 이두자에 의하여 일본의 가나라는 것을 지어주었으니 이것이 소위 일본 자라는 것이다.
제7편문단 51번역 대기
원문
왜가 이와 같이 백제의 교화를 받아 백제의 속국이 되었으나 천성이 침략하기를 좋아해서 도리어 백제를 침범하여 진사왕 말년에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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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52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나 백제가 고구려에게 석현 ( 石峴 ) 등 10 여 성을 빼앗낌을 통분히 여겨 기원후 391 년 ( 광개토왕 원년 ) 에 왕이 진무 ( 眞武 ) 로 하여금 고구려가 새로 점령한 땅을 공격하고, 한편으로 왜와 친교하여 함께 고구려에 대한 동맹을 맺었다.
번역
그러나 백제가 고구려에게 석현 등 열여 성을 빼앗긴 것을 통분히 여겨 기원후 391년(광개토왕 원년)에 왕이 진무로 하여금 고구려가 새로 점령한 땅을 공격하고, 한편으로 왜와 친교하여 함께 고구려에 대한 동맹을 맺었다.
제7편문단 53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5 년 ( 기원후 395 년 ) 에 광개토왕이 와려 원정에서 회군하여 수군으로 백제의 연해 ( 沿海 ) 와 연강 ( 沿江 ) 의 일팔성 ( 壹八城 ) · 구모로성 ( 臼模盧城 ) · 고모야라성 ( 古模耶羅城 ) · 관미성 ( 關彌城 ) 등을 함락시키고, 육군으로 미추성 ( 彌鄒城 ) · 야리성 ( 也利城 ) · 소가성 ( 掃加城 ) · 대산한성 ( 大山韓城 ) 등을 함락시키고 왕이 몸소 갑옷 투구를 두르고 아리수 ( 阿利水 ) --- 지금의 월당강 ( 月唐江 ) 을 건너 백제 군사 8 천여 명을 죽이니, 백제의 아신왕 ( 阿莘王 ) 이 다급하여 왕제 한사람과 대신 10 사람을 볼모로 올리고 남녀 1 천 명, 세포 ( 細布 ) 1 천 필을 바치고 '노객 ( 如客 ) '의 맹서 ( 盟書 ) 를 쓰고 고구려를 피해 사산 ( 사山 ) ---지금의 직산 ( 稷山 ) 으로 천도하여 '신위례성 ( 新慰禮城 ) '이라 일컬었다 .
번역
5년(기원후 395년)에 광개토왕이 와려 원정에서 돌아와 수군으로 백제의 연안과 연강의 일팔성, 구모로성, 고모야라성, 관미성 등을 함락시키고, 육군으로 미추성, 야리성, 소가성, 대산한성 등을 함락시키고 왕이 몸소 갑옷 투구를 두르고 아리수(지금의 월당강)를 건너 백제 군사 8천여 명을 죽이니, 백제의 아신왕이 다급하여 왕제 한 사람과 대신 열 사람을 볼모로 올리고 남녀 천 명, 세포 천 필을 바치고 '노객'의 맹서를 쓰고 고구려를 피해 사산(지금의 직산)으로 천도하여 '신위례성'이라 일컬었다.
제7편문단 54번역 대기
원문
그 뒤 고구려가 북쪽 선비와의 싸움이 있을 적마다 백제는 그 맹약을 어기고 왜병 ( 倭兵 ) 을 불러 고구려가 새로 점령한 땅을 침노하고 또 신라가 고구려와 한편 됨을 미워하여 왜병으로 신라를 침노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용병이 신과 같이 신속하여 북으로 선비를 치는 틈에 매양 백제의 기선 ( 機先 ) 을 제어하여 왜를 격파해서 신라를 구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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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55번역 대기
원문
임나가라 ( 任那加羅 ) ---지금의 고령 ( 高靈 ) 에서 왜병을 대파하여 선라의 내물왕 ( 奈勿王 ) 이 몸소 광개토왕을 찾아보고 사례함에 이르렀으며, 기원후 407 년 지금의 대동강 수전 ( 水戰 ) 에서 가장 기묘한 공을 세워 왜병 수만 명을 전멸시키고 갑옷 투구 1 만여 벌과 수없이 많은 무기와 물자를 얻으니 왜가 이를 두려워하여 다시는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여 남쪽이 오랫동안 평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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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56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광개토태왕의 환도(丸都) 천도와 선비(鮮卑) 정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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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환도 천도와 선비 정복
제7편문단 57번역 대기
원문
광개토왕은 야심이 많고 무략 ( 武略 ) 이 뛰어난 인물이지마는 동족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만은 대단하였다. 그래서 백제를 공격함은 그가 왜와 결탁함을 미워해서이지 땅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왕의 유일한 목적은 북쪽의 강성한 선비를 정벌하여 지금의 봉천성 ( 奉天省 ) · 직예성 ( 直匠省 ) 등지를 차지하려 하였던 것이므로 남쪽에 대한 전쟁은 늘 소극적 의미를 가진 것이요, 북쪽의 전쟁이 비로소 적극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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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58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래서 왕은 제 5 의 서울인 안시성 ( 安市城 )--- 지금 개평 ( 蓋平 ) 부근으로 천도하고, 선비 모용씨와 10 여 년 전쟁에 계속하여 매양 허를 찔러 불의에 쳐서 선비를 격파, 마침내 요동으로 부터 요서 ( 遼西 )--- 지금의 영평부 ( 永平府 ) 까지 차지하니, 상승 ( 常勝 ) 의 명장이라 일컫던 연왕 ( 燕王 ) 모용수 ( 慕容垂 ) 도 패하여 물러나고, 그 뒤를 이은 연왕 ( 燕王 ) 성 ( 盛 ) · 희 ( 熙 ) 등 지나 역사상 일대의 효웅들이 다 꺾여서 할 수 없이 수천 리의 땅을 고구려에게 떼어 주어 광개토왕이란 그 존호 ( 存號 ) 와 같이 국토를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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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왕은 제5의 도읍지인 안시성(安市城)으로 천도하고, 선비 모용씨와 10여 년간 전쟁을 계속하며 매번 허를 찔러 불의에 쳐서 선비를 격파하였으며, 마침내 요동으로부터 요서(遼西), 즉 지금의 영평부까지 차지하니, 상승의 명장이라 일컫던 연왕 모용수도 패하여 물러나고, 그 뒤를 이은 연왕 성과 희 등 지나 역사상 한대의 효웅들이 모두 꺾여서 어쩔 수 없이 수천 리의 땅을 고구려에게 빼앗겨 광개토왕이라는 존호와 같이 국토를 넓혔다.
제7편문단 59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진서 ( 晋書 ) 에 겨우 “태왕 ( 太王 : 好太王 ) 이 연 평주 ( 燕 平州 ) 의 숙군성 ( 宿軍城 ) 을 침노하므로 평주자사 ( 平州刺史 ) 모용귀 ( 慕容歸 ) 가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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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에 겨우 태왕이 연평주의 숙군성을 침노하였으므로 평주자사 모용귀가 도망쳤다.
제7편문단 60번역 대기
원문
”고 기록 하였을 뿐이고, 그 외에는 도리어 연 ( 燕 ) 이 상승한 것으로 기록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춘추 ( 春秋 ) 에 적 ( 狄 ) 이 위 ( 衛 ) 를 멸망시킨 것을 기록하지 않음과 같이 외국과의 전쟁에 패한 것을 숨기는 것은 지나 사관 ( 史官 ) 의 상례거니와 당시 이 모용씨 ( 慕容氏 ) 의 연이 멸망하고 척발씨 ( 拓跋氏 ) 의 위 ( 魏 ) 가 강성하였음도 호태왕이 연을 공격한 것과 직접으로 관계가 있고, 동진 ( 東晋 ) 의 유유 ( 劉裕 ) 가 일어나서 선비족 ( 鮮卑族 ) 과 강족 ( 差族 ) 을 이기고 송고조 ( 宋高祖 ) 가 황제될 터를 닦은 것도 호태왕의 연을 공격한 것과 간접적으로 관계있는 것인데, 저들이 그 완고하고 편벽된 상례를 지켜 사실을 사실대로 쓰지 아니하였으므로, 기원후 5 세기 초의 지나 대국 ( 大局 ) 의 변화한 원인이 가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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