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百濟BC 18 – AD 660문헌 원문 · 번역
조선상고사 제7편 백제 강성
제7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문은 진서 ( 晋書 ) 와 달리 곧 호태왕의 후손 제왕이 세운 것인데, 그 가운데 선비정벌에 대한 문구가 기재되지 아니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일찍이 호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 ( 輯安縣 ) 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 사람 영자평 ( 英子平 ) 이란 소년을 만났는데, 필담 ( 筆談 ) 으로 한 비에 대한 그의 이야기 는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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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경 평안호태왕의 비문은 진서와 달리 호태왕의 후손 제왕이 세운 것인데, 그 가운데 선비 정벌에 대한 문구가 기재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일찍이 호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 사람 영자평이라는 소년을 만났는데, 필담으로 한 비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제7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비가 오랫동안 풀설 속에 묻혔다가 최근에 영희 ( 榮禧 : 역시 만주 사람 ) 가 이를 발견하였는데, 그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땅을 침노해 빼앗은 글자는 모두 칼과 도끼로 쪼아내서 알아볼 수 없게 된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 볼 수 없는 글자가 생겨나서 진적 ( 眞的 ) 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첨가된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니까 이 비문에 호태왕의 정작 선비 ( 鮮卑 ) 정복한 큰 전공이 없음은 삭제된 때문이다. 아무튼 호태왕이 평주 ( 平州 ) 를 함락시키고 그 뒤에 선비의 쇠퇴를 타 자꾸 나아갔더면 호태왕이 개척한 토지가 그 존호 이상으로 넓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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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풀설 속에 묻혀 있다가 최근 영희(榮禧)라는 만주 사람이 이를 발견했는데, 그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땅을 침범하여 빼앗은 글자는 모두 칼과 도끼로 부숴 알아볼 수 없게 된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것을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 파는 과정에서 왕왕 글자가 떨어져 나간 곳을 석회로 메워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생겨나서 진실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덧붙여진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므로 이 비문에는 호태왕의 실제 선비 정복이라는 큰 공적이 빠져 있는 것이다. 아무튼 호태왕이 평주를 함락시키고 그 뒤에 선비가 쇠퇴하는 흐름을 따라 나아갔더라면, 호태왕이 개척한 토지는 기록된 것보다 더 넓었을 것이다.
제7편번역 대기
원문
그러나 이 미 말한 바와 같이 호태왕은 동족을 사랑하는 이였으므로 연신 ( 燕臣 ) 풍발 ( 馮跋 ) 이 연왕 희 ( 熙 ) 를 죽이고, 고구려 선왕의 서손 ( 庶孫 ) 으로 연에서 벼슬하던 고운 ( 高雲 ) 을 세워 천왕 ( 天王 ) 이라 일컫고 호태왕에게 보고하니, 호태왕은 “이는 동족이니 싸울 수 없다.”하고 사신을 보내 즉위를 축하하고 촌수를 따져 친족의 의를 말하고 전쟁을 그만두니 호태왕의 북진 ( 北進 ) 정책이 이에 종말을 고하였다. 호 태왕은 기원후 375 년 ( 백제 근구수왕 원년 ) 에 나서 기원후 391 년에 즉위하여 413 년에 돌아가니 나이 39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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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조각난 비석이 지금 봉천성 집안현 북쪽 2 리쯤에 있는데 길이가 대략 21 척 ( 폭 4 척 7 촌 ~6 척 5 촌 ) 이니, 근세에 만주 사람 영희 ( 榮禧) 라는 이가 발견하여 인행 ( 印行 ) 하였는데 비석에 떨어져나간 글자가 많았다. 그 뒤에 일본 사람이 그 비를 차지하여 인행해서 팔았으나 그 떨어져나간 글자를 혹 석회로 발라서 글자를 만든 곳이 있어서 학자들이 그 진상을 잃었음을 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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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평안호태왕 조각난 비석이 지금 봉천성 집안현 북쪽으로 두 리쯤에 있는데, 길이가 대략 스물한 자(폭 네 자 일곱 촌에서 여섯 자 다섯 촌)이니, 근세에 만주 사람 영희라는 이가 발견하여 인행하였으나 비석에 떨어져 나간 글자가 많았다. 그 뒤에 일본 사람이 그 비를 차지하여 인행했으나, 떨어진 글자를 혹 석회로 발라 글자를 만든 곳이 있어 학자들이 그 진상을 잃었음을 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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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4 장 장수태왕(長壽太王)의 남진정책과 백제의 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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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장수 태왕의 남진 정책과 백제의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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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태왕(長壽太王)의 역대(歷代) 정책(政策)의 변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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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413 년에 장수태왕이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491 년에 돌아가니 재위 79 년이었는데, 이 79 년 동안은 조선 정치사상에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기간이다. 무슨 변화인가? 곧 고구려 역대 제왕들이 혹은 북진주의 ( 北進主義 ) 를 쓰고 혹은 남북병진주의 ( 南北幷進主義 ) 를 써왔는데 북수남진주의 ( 北守南進主義 ) 가 장수태왕 때부터 비롯되어 드디어 남방 세 나라 대 고구려 공수동맹을 환기 ( 煥起 ) 시켰다. 남방의 백제는 이미 강성해졌고, 신라와 가라 ( 加羅 : 駕洛 ) 도 차차 강성해져서 전일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으니 고구려 정치가가 되어서는 부득이 남쪽을 돌아보지 아니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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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413년에 장수태왕이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491년에 사망했으니 재위 기간은 79년이었다. 이 79년 동안은 조선 정치사상에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시기이다. 그 변화란 무엇인가? 곧 고구려 역대 제왕들이 북진주의를 쓰거나 남북병진주의를 써왔는데, 북수남진주의가 장수태왕 때부터 비롯되어 마침내 남방 세 나라와의 대고구려 공수동맹을 일으켰다. 남방의 백제는 이미 강성해졌고, 신라와 가라도 차차 강성해져서 전일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으니 고구려 정치가가 되어서는 부득이 남쪽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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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은 다만 외족 ( 外族 ) 여러 나라 지나 · 선비 · 와려 ( 硬麗 ) 등 을 정복하여 동족 여러 나라는 자연 그 깃발 아래 무릎을 꿇도록 하였거니와 장수태왕은 이 정책을 위험시하여 먼저 동족 여러 나라를 통일한 뒤에 외족과 싸우는 것이 옳다고 하여 드디어 광개토왕의 정책을 변경하여 평양으로 천도하고 북수남진주의를 쓰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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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은 다만 외족 여러 나라와 선비, 와려 등을 정복하여 동족 여러 나라는 자연 그 깃발 아래 무릎 꿇게 하였으나, 장수태왕은 이 정책을 위험하게 여겨 먼저 동족 여러 나라를 통일한 뒤에 외족과 싸우는 것이 옳다고 하여 드디어 광개토왕의 정책을 바꾸어 평양으로 도읍하고 북쪽으로 진출하는 방책을 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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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연 ( 燕 ) 의 신하 풍발 ( 馮跋 ) 이 연왕 희 ( 熙 ) 를 죽이고 고구려의 지손 ( 支孫 ) 고운 ( 高雲 ) 을 세워 황제를 삼아서 광개토왕의 문죄 ( 問罪 ) 를 면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풍발이 고운을 죽이고 스스로 서서 천왕 ( 天王 ) 이라 하였다. 제 2 세 홍 ( 弘 ) 에 이르러는 선비 별부 ( 別部 ) 의 척발씨 ( 拓跋氏 ) 가 지금의 산서 ( 山西 ) 등지에 나라를 세워 날로 커져서 황하 ( 黃河 ) 이북을 거의 다 차지하고 군사를 내어 연을 치니 홍의 국토 가 날로 줄어들어서 견디어내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자주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서 구원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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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은 북수남진 ( 北守南進 ) 이 그의 작정한 정책이었으므로 위 ( 魏 ) 와 말썽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연이 모용희 ( 慕容熙 ) 이래로 백성의 힘을 빼앗아 대궐과 동산을 극히 장려하게 만들 뿐 아니라 궁중에 진귀한 보물과 미인을 수없이 모아들여서 음탕과 호사가 모든 나라의 으뜸이었으므로, 비상한 이기심을 가진 장수왕이 이를 탐내어 연의 사신을 속여 “고구려가 남쪽 백제의 난이 있어 아직 큰 군사를 낼 수 없으나 연왕이 즐겨 고구려에 와서 머무르면 마땅히 장사를 보내서 영접하고 일후에 기회를 보아 구원해주겠노라.”고 하니 연왕 홍 ( 弘 ) 이 이를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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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에게 북쪽을 지키며 남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가 세운 정책이었기에 위나라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연나라의 모용희로 인해 백성들의 힘을 빼앗아 궁궐과 동산을 지나치게 화려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궁중에 진귀한 보물과 미인을 수없이 모아들여 음탕함과 호사스러움이 모든 나라의 으뜸이었기에, 비상한 이기심을 가진 장수왕이 이를 탐내어 연나라 사신을 속여 "고구려에 남쪽 백제의 난이 있어 아직 큰 군사를 보낼 수 없으나 연왕께서 즐겨 고구려에 와서 머무르시면 마땅히 장사를 보내 영접하고 나중에 기회를 봐 구원해 주겠다"라고 하니, 연왕 홍이 이를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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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426 년에 위가 기병 1 만과 보병 수만을 내어 연의 서울 화룡 ( 和龍 )---지금의 업 ( 업 ) 을 침노하매, 장수왕이 ' 말치〔左輔〕' 맹광 ( 孟光 ) 을 보내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연왕 흥을 맞이하게 하니, 위의 군사가 이미 연의 서울에 이르러 서문으로 입성하는지라 맹광이 급히 동문으로 들어가 위에 항복한 연의 상서령 ( 尙書令 ) 곽생 ( 郭生 ) 의 군사와 싸워 곽생을 쏘아 죽이고 격파하고 대궐에 불을 지르고 진귀한 보물과 미인을 거두어가지고 돌아왔다. 위의 임금은 그 보물과 미인을 빼앗겼음은 나무라지 못하고, 다만 연왕 홍이 고구려에 머무름을 싫어하여 그를 넘겨주기를 청하였으나 장수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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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426년에 위나라가 기병 만과 보병 수만을 내어 연의 서울 화룡(和龍), 즉 지금의 업을 침공하자, 장수왕이 '좌보' 맹광을 보내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연왕 흥을 맞이하게 하였다. 위의 군사가 이미 연의 서울에 이르러 서문으로 입성하자, 맹광은 급히 동문으로 들어가 위에 항복한 연의 상서령 곽생의 군사와 싸워 곽생을 쏘아 죽이고 격파하였으며, 대궐에 불을 지르고 진귀한 보물과 미인을 거두어 돌아왔다. 위의 임금은 그 보물과 미인을 빼앗긴 것을 나무라지 못하고, 다만 연왕 홍이 고구려에 머무는 것을 싫어하여 그를 넘겨주기를 청하였으나 장수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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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위의 환심을 잃지 아니하려 하여 자주 위와 교통하고 또 남지나의 송 ( 宋 ) 을 친히 사귀어 위를 견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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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승(圍碁僧)의 음모와 백제의 피폐(疲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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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승의 계략과 백제의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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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은 외교의 수단으로 지나의 위 ( 魏 ) 와 송 ( 宋 ) 을 견제하고는 백제를 파멸시키기에 전력하였다. 그러나 왕은 부왕 광개토왕과 같은 전략가가 아니라 흉칙하고 악독한 음모가였다. 적국에 대하여 칼이나 활로 정면을 공격하지 않고 먼저 간사하고 악독한 계책으로 심복을 썩인 뒤에 손을 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 비밀히 조서를 내려 백제의 내정을 문란케 할 기묘한 계략을 가진 책사 ( 策士 ) 를 구하였는데, 그 조서에 응하여 불교승 ( 佛敎增 ) 도림 ( 道琳 ) 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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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은 외교의 수단으로 위와 송을 견제하며 백제를 멸망시키려 전력하였다. 그러나 왕은 부왕 광개토대왕과 같은 전략가가 아니라 흉칙하고 악독한 음모가였다. 적국에 대하여 칼이나 활로 정면 공격하지 않고 먼저 간사하고 악독한 계책으로 심복을 썩인 뒤에 손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 비밀히 조서를 내려 백제의 내정을 문란하게 할 기묘한 계략을 가진 책사를 구하였는데, 그 조서에 응하여 불교승 도림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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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백제의 근개루왕 ( 近蓋婁王 ) 은 바둑의 명수였고 도림도 바둑의 명수였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비밀히 아뢰어 거짓 죄를 지은 사람의 행장으로 차려 백제로 들어가서 근개루왕을 만나보고 바둑동무가 되어 아침 저녁으로 근개루왕을 모시고 바둑을 두었다. 근개루왕은 자기의 바둑 적수가 천하에 오직 도림 한 사람 뿐이라 하여 사랑하기 짝이 없었다. 도림이 몇 해 동안 근개루왕의 곁에 있어 왕의 성격과 행동을 자세히 알아보고는 “신이 한낱 망명해온 죄인으로서 대왕의 총애를 받아 의식 거처를 이같이 사치하고 아름답게 하니 이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이제 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다하여 한 마디 대왕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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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의 나라가 안으로는 산을 끼고 밖으로는 바다와 강이 둘러 있어 적병이 백만이라도 어찌하지 못할 천험 ( 天險 ) 이니, 대왕께서 이같은 천험에 의하여 숭고한 지위와 부유한 왕업을 가지고 사방의 눈과 귀를 일으켜 세울 만한 기세를 지으시면 사방의 여러 나라들이 바야흐로 존숭하여 섬기기를 게을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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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의 나라는 안으로는 산으로, 밖으로는 바다와 강이 둘러싸고 있어 적군이 백만이라도 어찌할 수 없는 천혜의 지형이니, 대왕께서 이 같은 천혜에 힘입어 높은 지위와 풍요로운 왕업을 갖추시고 사방의 눈과 귀를 일으켜 세울 만한 기세를 가지신다면, 사방의 여러 나라들이 마땅히 존경하고 섬기는 것을 게을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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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성을 높이 쌓지 못하시고 대궐을 크게 짓지 못하시며 선왕의 해골을 작은 뫼에 파묻고 인민의 집은 해마다 장마에 떠내려 보내서 외국인이 보기에 창피한 일이 많으니 누가 대왕의 나라를 우러러보며 높이 받들려고 하겠습니까? 신은 대왕을 위하여 취하실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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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성을 높이 쌓지 못하시고 대궐을 크게 짓지 못하시며 선왕의 해골을 작은 언덕에 묻으시고 백성들의 집은 매년 장마에 떠내 보내서 외국인이 보기에는 창피한 일이 많으니 누가 대왕의 나라를 우러러보며 높이 받들려고 하겠습니까? 신은 대왕을 위하여 취하실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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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개루왕이 그의 말을 달게 여겨 전국의 남녀를 전부 징발하여 벽돌을 구워 둘레 수십 리나 되는 왕성 ( 王城 ) 을 높이 쌓고 성 안에는 하늘에 닿을 듯한 대궐을 짓고 욱리하 ( 郁里河 )--- 지금의 양성 ( 陽城 ) 한래 가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대석관 ( 大石棺 ) 을 만들어 부왕의 해골을 넣고 큰 왕릉을 만틀어서 묻고, 왕성의 동쪽에서 숭산 ( 崇山 ) 의 북쪽까지 욱리하의 제방을 쌓아 어떠한 장마에도 물의 재난이 없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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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공사를 치르고 나니 국고가 탕진되고 군자 ( 軍資 ) 도 모자라고 백성들의 힘도 쇠잔해지니,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나라 형세가 위태롭기가 누란 ( 累卵 ) 과 같았다. 이에 도림이 성공한 줄을 알고 도망하여 고구려에 돌아와서 장수왕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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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공사를 치르고 나니 국고가 탕진되고 군자마저 모자라며 백성들의 힘까지 쇠잔해지자,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나라 형세가 위태로워 누란과 같았다. 이에 도림은 성공한 줄을 알고 도망하여 고구려에 돌아와 장수왕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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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군의 침입과 근개루왕(近蓋婁王)의 순국(殉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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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군의 침입과 근개루왕의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바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