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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百濟BC 18 – AD 660

문헌 원문 ·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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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제7편 백제 강성 朝鮮上古史 第7篇

신채호 · 1931 · 저본 한국어 위키문헌
문단 83개 · 번역 확정 0개
제7편문단 21번역 대기
원문
삼국사기 고구려 지리지 ( 地理志 ) 에는 고국원왕의 평양 천도를 기록하고 소주류왕의 국내성 재천도는 기록하지 아니하여 , 역대의 사학가들이 모두 고국원왕 이후에는 고구려가 내처 평양 등지에 서울한 줄로 안다 . 그러나 고구려가 국내성을 고국천 ( 故國川 ) · 고국양 ( 故國壞 ) · 고국원 ( 故國原 ) 이라 일컬었으니 , 고국원왕의 시체가 그 천도의 역사 ( 役事 ) 를 따라 북쪽에 옮겨 장사지내졌으므로 고국원왕이라 일컬은 것이다 . 이는 이때 고구려가 국내성에 환도 ( 還都 ) 한 한 증거다 . 광개토경평안호태왕 ( 廣開土境平安好太王 ) 의 비문에 의하면 평안호태왕은 국내성에서 생장하여 국내성 부근에 장사지냈음이 분명하니 이는 평안호태왕의 전대 ( 前代 ) 에 국내성에 환도한 또 한 증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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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22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국내성 환도는 곧 백제의 침략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 또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근초고왕이 고구려 평양을 빼앗고 물러나 한성 ( 漢城 ) 에 도읍하였다 .”고 하였고 , 지리지에는 한성을 곧 남평양 ( 南平壞 ) 이라 하였으며 , 이 밖에도 삼국사기 가운데 한성을 고구려의 남평양으로 친 데가 대여섯 군데나 된다 .
번역
국내성은 백제의 침략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근초고왕이 고구려 평양을 빼앗고 물러나 한성에 도읍하였다"고 하였으며, 지리지에는 한성을 곧 남평양이라 하였고, 이 밖에도 『삼국사기』 가운데 한성을 고구려의 남평양으로 친 곳이 대여섯 군데나 된다.
제7편문단 23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나 지금의 한성은 오직 장수왕 ( 長壽王 ) 이 한 번 함락시킨 일 이외에 그 이전에는 어느 해 어느 달에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는 기록이 전연 없으니 북평양 ( 北平壞 ) 은 북낙랑 ( 北樂浪 ) 곧 요동의 개평 ( 蓋平 ) · 해성 ( 海城 ) 등지요 , 남평양은 곧 지금의 평양이니 근초고왕이 쳐 빼앗은 평양이 지금의 한성 ( 서울 ) 이 아니라 지금의 평양인 한 증거요 , 지리지에 중반군 ( 重盤君 : 지금 재령의 딴 이름 ) 이 한성 ( 漢城 ) 이라 하였으니 , 백제가 이미 평양을 함락하고 북진하여 지금의 재령에 도읍하였을 것이 사리에 맞을 뿐더러 만일 근초고왕이 쳐 빼앗은 평양이 지금의 한성이라고 한다면 어찌 “고구려의 평양을 빼앗아 도읍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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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의 한성은 오직 장수왕이 함락시킨 일 외에는 그 이전 어느 해 어느 달에 고구려 땅이 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으니, 북평양은 곧 북낙랑, 즉 요동의 개평이나 해성 등지이며, 남평양은 곧 지금의 평양이다. 근초고왕이 빼앗은 평양이 지금의 한성이 아니라 지금의 평양인 증거요, 지리지에 중반군(지금 재령의 다른 이름)이 한성이라 하였으니, 백제가 이미 평양을 함락하고 북진하여 지금의 재령에 도읍했을 것이 마땅할 뿐더러 만일 근초고왕이 빼앗은 평양이 지금의 한성이라고 한다면 어찌 "고구려의 평양을 빼앗아 도읍하였다" 할 수 있겠는가.
제7편문단 24번역 대기
원문
”고 기록하거나 “고구려의 한성을 빼앗아 도읍하였다 .”고 기록하지 않고 구태여 평양과 한성을 갈라서 “고구려의 평양을 빼앗고 물러나 한성에 도읍하였다 .”라고 기록하였으랴 ? 이것은 근초고왕이 빼앗은 평양이 한성이 아니라 지금의 평양인 또 하나의 증거이다 . 본기에 의하면 근초고왕이 물러난 한성 부근에 한수 ( 漢水 ) · 청목령 ( 靑木領 ) 등 지명이 있으므로 어떤 이는 위의 한수를 지금의 한강 ( 漢江 ) 이라 하고 , 위의 청목령을 지금의 송악 ( 松嶽 ) 이라고 하지마는 대개 고대에 서울을 옮기면 그 부근의 지명도 따라 옮겼으니 위의 한수 · 청목령 등은 다 근초고왕이 전도할 때에 따라 옮긴 지명이요 , 지금의 한강과 지금의 송악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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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25번역 대기
원문
백제에 원래 세 한강이 있었으니 지금 한성에 가까운 한강이 그 하나요 , 앞에 말한 재령 ( 載寧 ) 한성의 월당강 ( 月居江 ) 한강이 그 둘이요 , 나중에 문주왕 ( 文周王 ) 이 천도한 직산 ( 稷山 ) 위례성 ( 慰禮城 ) 한성에 가까운 지금 양성 ( 陽城 ) 의 한내가 그 셋이다· 이 책에서는 그 구별의 편의를 위하여 제 1 은 중한수 ( 中漢水 ) · 중한성 ( 中漢城 ) 이라 하고 , 제 2 는 상한수 ( 上漢水 ) · 상한성 ( 上漢城 ) 이라 하고 , 제 3 은 하한수 ( 下漢水 ) · 하한성 ( 下漢城 ) 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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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26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근구수왕(近仇首王) 즉위 후의 해외경략(海外經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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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구수왕이 즉위한 후의 해외 경략
제7편문단 27번역 대기
원문
근구수왕이 기원후 375 년에 즉위하여 재위 10 년 동안에 고구려에 대하여는 겨우 한 번 평양 침입이 있었으나 바다를 건너 지나 대륙을 경략 하여 선비 ( 鮮卑 ) 모용씨 ( 慕容氏 ) 의 연 ( 燕 ) 과 부씨 ( 符氏 ) 의 진( 秦 )을 정벌하여 , 지금의 요서 ( 遼西 ) · 산동 ( 山東 ) · 강소 ( 江蘇 ) · 절강 ( 浙江 ) 등지를 경략하여 넓은 땅을 장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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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28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이런 기록이 비록 백제 본기에는 오르지 않았으나 양서 ( 梁書 ) 와 송서 ( 宋書 ) 에 "백제가 요서와 진평군 ( 晋平郡 ) 을 공략하여 차지하였다 ( 百濟 略有遼西晋平郡 )· ”고 했고, 자치통감 ( 資治通鑑 ) 에는 “부여 ( 扶餘 ) 가 처음에 녹산 ( 塵山 ) 에 웅거하였다가 백제에게 격파당해 서쪽 연 ( 燕 ) 가까이로 옮겼다."(扶餘 初據鹿山 爲百濟所殘破 西徒近燕 ) ”고 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번역
이러한 기록은 비록 백제 본기에는 실리지 않았으나, 양서와 송서에 "백제가 요서와 진평군을 공략하여 차지하였다"라고 했으며, 자치통감에는 "부여가 처음에 녹산에 웅거하다가 백제에게 격파당해 서쪽 연 가까이로 옮겼다"고 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제7편문단 29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대개 근구수가 근초고왕의 태자로서 군국 ( 軍國 ) 대사를 대리하여 이미 침입하는 고구려를 격퇴하고, 나아가서 지금의 대동강 이남을 차지하고는 해군을 확장하여 바다를 건너 지나 대륙에 침입하여 모용씨를 쳐서 요서와 북경( 北京 )을 빼앗아 요서 ( 遼西 ) 진평 ( 晋平 ) 두 군을 설치하고, 녹산 ( 塵山 )---지금의 합이빈 ( 哈爾濱 ) 까지 들어가 부여의 서울을 점령하여 북부여가 지금의 개원 ( 開原 ) 으로 천도하기에 이르렀으며, 모용씨가 망한 뒤 지금의 섬서성 ( 陝西省 ) 에서는 진왕 ( 秦王 ) 부견 ( 符堅 : 역시 선비족 ) 이 강성해지매, 근구수왕이 또 진과 싸워 지금의 산동 ( 山東 ) 등지를 자주 정벌하여 이를 피곤하게 하였으며, 남으로 지금의 강소 · 절강성 등지를 차지하고 있는 진 ( 晋 ) 을 쳐서 또 한 얼마간의 주군 ( 州軍 ) 을 빼앗았으므로 여러 책의 기록이 대략 이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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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근구수가 근초고왕의 태자로서 군국 대사를 대신하여 이미 침입하는 고구려를 물리치고, 나아가 지금의 대동강 이남을 차지한 뒤 해군을 확장하여 바다를 건너 대륙에 침입하여 모용씨를 쳐서 요서와 북경을 빼앗아 요서 진평 두 군을 설치하고, 녹산, 즉 지금의 하얼빈까지 들어가 부여의 서울을 점령하여 북부여가 지금의 개원으로 천도하기에 이르렀으며, 모용씨가 망한 뒤 지금의 섬서성에서는 진왕 부견(역시 선비족)이 강성해지매, 근구수왕이 또 진과 싸워 지금의 산동 등지를 자주 정벌하여 이를 지치게 하였으며, 남쪽으로 지금의 강소·절강성 등을 차지하고 있는 진을 쳐서 또 한동안 주군을 빼앗았으므로 여러 책의 기록이 대략 이러하다.
제7편문단 30번역 대기
원문
그러면 진서 ( 晋書 ) 나 위서 ( 魏書 ) 나 남제서 ( 南齊書 ) 에는 어찌하여 이를 빼버렸는가? 지나 사관 ( 史官 ) 이 매양 국치 ( 國恥 ) 를 꺼려 숨기는 괴상한 버릇이 있어, 지나에 들어가 주인 노릇한 모용씨의 연 ( 蘇 ) 이나 부씨 ( 符氏 ) 의 진 ( 奏 ) 이나 척발씨 ( 拓跋氏 ) 의 위 ( 魏 ) 나 근세의 요 ( 遼 ) · 금 ( 金 ) · 원 ( 元 ) · 청 ( 淸 ) 같은 것은 저들이 자기네의 역대 제왕으로 인정하므로 그 공업 ( 功業 ) 을 그대로 기록하였거니와 그 외에는 거의 이를 삭제하였을 뿐더러 당태종 ( 唐太宗 ) 이 백제와 고구려를 침노하여 핍박할 때 그 장사를 고무하기 위해 양국의 지나 침입 기록을 없애버리고는 조선의 양국 토지의 절반이 본래 지나의 소유였다고 위증 ( 僞證 ) 하니, 진서는 당태종 자신의 저서이므로 말할 것도 없이 백제 근구수왕의 대 지나 전공 ( 戰功 ) 을 뺐을 것이고, 위서 · 남제서 같은 것은 당태종 이전의 것이므로 또한 구수왕의 서정 ( 西征 ) 이야기를 뺐을 것이며, 오직 양서 ( 梁書 ) 나 송서 ( 宋書 ) 의 “백제가 요서를 공략해서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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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3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고 한 구절은 그 기록이 너무 간단하고 사실이 너무 소략 ( 少略 ) 하므로, 당태종이 우연히 주의하지 못하여 그 문자가 그대로 유전 ( 流傳 ) 된 것일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백제 본기에는 이런 일을 빼었는가? 이는 신라가 백제를 미워하여 이를 뺏을 것이고, 또는 후세에 사대주의가 성행하여 무릇 조선이 지나를 친 사실은 겨우 이미 지나사에 보인 것만을 뽑아다 기록하고 그 나머지는 다 빼버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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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 구절은 그 기록이 너무 간단하고 사실이 너무 소략하므로, 당태종이 우연히 주의하지 못하여 그 문자가 그대로 유전된 것일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백제 본기에는 이런 일을 빼었는가? 이는 신라가 백제를 미워하여 이를 뺏을 것이고, 또는 후세에 사대주의가 성행하여 무릇 조선이 지나를 친 사실은 겨우 이미 지나사에 보인 것만을 뽑아다 기록하고 그 나머지는 다 빼버린 때문이다.
제7편문단 32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근구수왕의 무공에 관한 기록만 이같이 삭제되었을 뿐 아니라 문화에 관한 것도 많이 삭제되었으니, 이를테면 근구수왕이 10 여 년은 태자로, 10 년은 대왕으로 백제의 정권을 잡았는데 본기에 근구수왕의 문화적 사업에 관한 기록이라고는 겨우 박사 ( 博士 ) 고흥 ( 高興 ) 을 얻어 백제서기 ( 百濟書記 )---백제사를 지은 것 한 가지밖에 없다 . 그러나 나는 일본사의 성덕태자 ( 聖德太子 ) 의 사적이 거의 근구수왕의 것을 훔쳐다가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번역
근구수왕의 무공에 관한 기록만 이같이 삭제되었을 뿐 아니라 문화에 관한 것도 많이 삭제되었으니, 이를테면 근구수왕이 10여 년은 태자로, 10년은 대왕으로 백제의 정권을 잡았는데 본기에 근구수왕의 문화적 사업에 관한 기록이라고는 겨우 박사 고흥을 얻어 백제서기, 즉 백제사를 지은 것 한 가지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일본사의 성덕태자의 사적이 거의 근구수왕의 것을 훔쳐다가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7편문단 33번역 대기
원문
근구수의 근 ( 近 ) 은 음이 '검건'이니 백제 때에는성 ( 聖 ) 을 '검건'이라하였으므로, 근초고·근구수·근개루 ( 近蓋童 ) 의 근 ( 近 ) 이 다 성 ( 聖 ) 을 의미하는 것이요, 구수 ( 仇首 ) 는 음이 '검구수', 구수는 마구 ( 馬廐 ) 를 일컬음이므로 일본의 성덕태자의 성덕 ( 聖德 ) 이란 칭호는 근구수의 근 ( 近 ) 을 가져간 것이요, 성덕태자가 마구간 언저리에서 났으므로 구호 ( 廐戶 ) 로 이름했다고 하는 것은 근구수의 구수 ( 仇首 ) 를 본받은 것이다. 이로 미루어 '성덕태자가 헌법17 조를 제정했다. '고 하는 것과 ' 불법 ( 佛法 ) 을 들여갔다. '고 하는 것도다 일본인이 근구수왕의 공적을 흠모하여 이를 본떠다가 저 성덕태자전 가운데 넣은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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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34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 침류왕 (枕流王 ) 원년 ( 기원후 384년 ) 9월에 “호승 ( 胡增 ) 마라난타 ( 摩羅難陀 ) 가 진 ( 晋 ) 으로부터 왔다. ”고 하였는데, 역사가들이 이를 빙거하여 백제 불교의 시초를 침류왕 원년으로 잡지마는 삼국사기에 매양 전왕의 말년을 신왕의 원년으로 삼고, 인하여 전왕 말년의 일을 선왕 원년의 일로 잘못 쓴 것이 허다하니 이는 따로 변론할 것이거니와 마라난타가 백제에 들어온 해는 근구수왕 말년 기원383년이요, 침류왕 원년 기원후 384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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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를 보면 백제 침류왕 원년(기원후 384년) 9월에 "호승 마라난타가 진나라로부터 왔다"고 하였는데, 역사가들이 이를 근거로 백제 불교의 시초를 침류왕 원년으로 잡지 않으나 삼국사기에 매양 전왕의 말년을 신왕의 원년으로 삼고, 인하여 전왕 말년의 일을 선왕 원년의 일로 잘못 쓴 것이 허다하니 이는 따로 변론할 것이거니와 마라난타가 백제에 들어온 해는 근구수왕 말년 기원전 383년이며, 침류왕 원년 기원후 384년이 아니다.
제7편문단 35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제 3 장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의 북진정책과 선비(鮮卑) 정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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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광개토대왕의 북진 정책과 선비 정복
제7편문단 36번역 대기
원문
=== 광개토태왕의 북토(北討) 남정(南征)의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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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37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기원후 384 년에 근구수왕 ( 近仇首王 ) 이 죽고 맏아들 침류왕 ( 枕流王 ) 이 왕위를 이은 지 2 년 만에 죽으므로, 둘째아들 진사왕 ( 辰斯王 ) 이 즉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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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384년에 근구수왕이 죽고 맏아들 침류왕이 왕위를 이은 지 2년 만에 죽었으므로, 둘째아들 진사왕이 즉위하였다.
제7편문단 38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진사왕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용감하다 일컬어졌으나 천성이 호탕하여 근구수왕이 성취한 강대국의 권력을 빙자하여 인민을 가혹하게 부려서 청목령 ( 靑木嶺 ) --- 지금의 송도 ( 松都 ) 로부터 팔곤성 ( 八坤城 )--- 지금의 곡산 ( 谷山 ) 등지까지 성책 ( 城柵 ) 을 쌓고, 다시 서쪽으로 꺾어 서해 ( 西海 ) 까지 이르러 천여 리 장성을 쌓아 고구려를 막게 하고, 서울에는 백제 건국 이래 처음이라 할 만한 장려한 대궐을 짓고 큰 연못을 파서 여러 가지 고기를 기르고 연못 가운데는 가산 ( 假 山 ) 을 만들어 기이한 새와 이상한 풀을 길러서 오락이 극도에 이르러 인민이 원망하고, 해외의 영토는 다 적국에게 빼앗겨 나라의 형세가 점차 쇠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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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왕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용감하다고 일컬어졌으나 천성이 호탕하여 근구수왕이 이룩한 강대국의 권력을 빌미로 백성을 가혹하게 부려 청목령(靑木嶺)에서 팔곤성(八坤城)까지 성책을 쌓고, 다시 서쪽으로 꺾어 서해까지 이르러 천여 리 장성을 쌓아 고구려를 막게 했으며, 서울에는 백제 건국 이래 처음이라 할 만한 장대한 대궐을 짓고 큰 연못을 파서 여러 가지 고기를 기르고 연못 가운데는 가산을 만들어 신기한 새와 이상한 풀을 길러 오락이 극에 달해 백성들이 원망하고, 해외의 영토는 모두 적국에게 빼앗겨 나라의 형세가 점차 쇠약해졌다.
제7편문단 39번역 대기
원문
고구려 고국양왕 ( 故國壞王 ) 은 곧 진사왕과 한때이니 조왕 ( 祖王 ) 피살의 원수와 국토를 깎인 치욕을 갚기 위해 늘 백제 치기를 별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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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문단 40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이때 선비의 모용씨 ( 幕容氏 ) 가 진 ( 秦 ) 에게 망하고 진왕 ( 秦王 ) 부견 ( 符堅 ) 이 강성하여 90 만 군사로 동진 ( 東晋 ) 을 치다가 크게 패하는지라 고국양왕이 이를 기회하여 요동 · 북낙랑 ( 北樂浪 ) · 현도 등 군을 다 회복하였는데, 모용씨 중에 모용수 ( 熹容垂 ) 란 자가 다시 궐기하여 지금의 직예성 ( 直 匠省 ) 에 웅거하여 천왕 ( 天王 ) 의 자리에 나아가 나라 이름을 다시 연 ( 燕 ) 이라 하여 세력을 회복하고, 자주 군사를 내어 요동을 집적거리고, 또 몽고 등지에 와려족 [ 와麗族 : 本紀의 契丹(거란) ]이 강성 해져서 고구려의 신성 ( 新城 ) 등지를 침략하였다.
번역
이때 선비의 모용씨가 진에게 망하고 진왕 부견이 강성하여 90만 군사로 동진을 치다가 크게 패하자, 고국양왕이 이를 기회 삼아 요동·북낙랑·현도 등의 군을 모두 회복하였다. 그런데 모용씨 중에 모용수가 다시 일어나 지금의 직예성에 거처하며 천왕의 자리에 나아가 나라 이름을 연이라 하여 세력을 회복하고, 자주 군사를 내어 요동을 점령하였으며, 또 몽고 등지에 와려족이 강성해져서 고구려의 신성 등을 침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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