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古朝鮮BC 2333 – BC 108문헌 원문 · 번역
조선상고사 제2편 수두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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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인이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보전 ( 保全 ) 함을 얻었으므로 공구씨 (孔丘氏: 孔子 ) 가 관중의 공을 칭찬하여, “관중이 피발 ( 披髮 ) 좌임 ( 左 ) 을 징계하였다. ”고 하였는데, 피발은 조선의 머리 땋은 것을 가리킨 것이고, 좌임은 조선의 왼쪽으로 여미는 옷깃을 가리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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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인이 이 전쟁 덕분에 보전함을 얻었으므로 공구씨가 관중의 공로를 칭찬하여, "관중이 머리를 풀고 왼쪽 옷깃을 바로잡았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피발은 조선의 머리 <0xEB><0x95><0x8B>은 것을 가리키며, 좌임은 조선의 왼쪽으로 여미는 옷깃을 가리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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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관자 ( 管子 ) 》에 대략 이 전쟁의 결과를 적었는데, a) 지나의 문자가 부과 ( 浮誇: 부화하고 과장함 ) 가 많으며, 이러한 대외 전쟁에 더욱 심하고, b)《관자 》 는 관중의 저작이 아니라 전국시대 ( 戰國時代 ) 말엽에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이므로, 직접 눈으로 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다만 그 대체만 말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조선이 서북 지방을 잃어 오랫동안 쇠약에 빠져 었었던 것은 가릴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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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에 대략 이 전쟁의 결과를 적었는데, a) 지나의 문자가 부풀리고 과장하는 것이 많으며, 이러한 대외 전쟁에 더욱 심하고, b)《관자》는 관중의 저작이 아니라 전국시대 말엽에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이므로, 직접 눈으로 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다만 그 대체만 말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조선이 서북 지방을 잃어 오랫동안 쇠약에 빠져 있었던 것은 가릴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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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단군 연대(年代)의 고증(考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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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연대에 대한 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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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 ( 前史 ) 에는 단군 왕검 1220 년 후에 기자 ( 箕子 ) 의 왕조선을 기재하였으나, 기자는 기자 자신이 왕이 된 것이 아니고, 기원전 323 년경에 이르러 그 자손이 비로소 불조선왕이 되었으니, 이는 제 2 편 제 2 장에 기술하겠거니와, 이제 사실 ( 史實 ) 을 따라 기자조선을 삭제한다. 또 전사에 단군이 처음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구월산 ( 九月山 ) 으로 옮기고, 그 자손에 이르러서는 기자를 피하여 북부여로 갔다고 하지마는 이도 또한 근거없는 망령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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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에는 단군 왕검이 1220년 후에 기자(箕子)의 왕조선을 기록하였으나, 기자는 스스로 왕이 된 것이 아니며, 기원전 323년경에 이르러 그 자손이 비로소 불조선왕이 되었으니, 이는 제 2편 제 2장에서 기술하겠으며, 이제 사실(史實)을 따라 기자조선을 삭제한다. 또한 전사에 단군이 처음 평양성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구월산으로 옮기고, 그 자손에 이르러서는 기자를 피해 북부여로 갔다고 하였으나 이 또한 근거 없는 망령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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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무릇 구월산에 도읍을 옮겼다 함은 고구려사에 초록 ( 抄綠 ) 한 위서( 魏書 ) 의,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 檀君王檢 立國阿斯達 國號朝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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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구월산에 도읍을 옮겼다는 것은 고구려사 초록 위서에 기록되어 있다.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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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고 한 구절로 인하여, 아사 ( 阿斯 ) 를 음이 아흡〔九〕에 가깝고, 달 ( 達 ) 은 음이 달〔月〕과 같다 하여 마침내 구월산을 아사달이라고 하는 것이지마는, 구월산은 황해도 문화현 ( 文化縣: 지금의 信川那 ) 에 있는 산인데, 문화현의 옛 이름이 궁홀 ( 弓忽 ) 이요, 궁홀은 이두문의 ‘궁골’로 읽을 것이니, 궁골에 있는 산이므로 궁골산이라 한 것으로서, 마치 개홀 ( 皆忽: 音 개골 ) 에 있는 산이므로, 개골산〔金剛山〕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인데, 어찌 궁골산을 구월산이라 와전하였으며, 구월산을 아홉달산으로 억지 해석을 하여 아사달산 ( 阿斯達山 ) 으로 망령되게 증거하니,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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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 구절로 인해, 아사(阿斯)의 음이 아흡[九]에 가깝고, 달(達)은 음이 달[月]과 같다고 하여 마침내 구월산을 아사달이라고 부르는 것이지만, 구월산은 황해도 문화현(지금의 신천나)에 있는 산인데, 문화현의 옛 이름이 궁홀이고, 궁홀은 이두문의 ‘궁골’로 읽을 것이니, 궁골에 있는 산이라서 궁골산이라 한 것과 같고, 마치 개홀(皆忽: 음 개골)에 있는 산이라서 개골산[금강산]이라고 한 것과 같은데, 어찌하여 궁골산을 구월산으로 잘못 전하고, 구월산을 아홉 달 산으로 억지로 해석하여 아사달산(阿斯達山)으로 망령되게 증거하는 것이랴.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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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아사달은 이두문에 l ‘ 아스대’로 읽는 옛 말 소나무를 ‘ 아스’라 하고, 산을 대라 한 것이니, 지금 합이빈 ( 哈爾濱 ) 의 완달산 ( 完達山 ) 이 곧 아사달산이다. 이곳은 북부여의 옛 땅이니, 왕검의 상경 ( 上京 ) 이요, 지금의 개평현 ( 蓋平縣 ) 동북쪽 안시 ( 安市 ) 의 고허 ( 古噓) 인 ‘아리티’가 중경 ( 中京 ) 이요, 지금의 평양 ‘펴라’가 단군의 남경 ( 南京 ) 이니, 왕검 이래로 형편을 따라 삼경 중 하나를 골라 서울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본 도읍은 북부여의 땅 ‘ 아스대’인데, 이제 그 자손이 기자를 피하여 북부여로 갔다 함이 어디에 닿은 소리인가 ? 그러므로 이 설을 채용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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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은 이두문에서 '아스대'로 읽는 옛말로, 소나무를 '아스'라 하고 산을 대(臺) 자에 써서, 지금 하얼빈의 완달산이 곧 아사달산이다. 이곳은 북부여의 옛 땅으로, 왕검의 상경이며, 지금 개평현 동북쪽 안시의 고허인 '아리티'가 중경이고, 지금 평양의 '펴라'가 단군의 남경이니, 왕검 이래로 형편에 따라 삼경 중 하나를 골라 서울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본 도읍은 북부여의 땅 '아스대'인데, 이제 그 자손이 기자를 피해 북부여로 갔다는 말이 어디에 닿는 소리인가? 그러므로 이 설을 채용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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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또 전사에는 단군의 원년 ( 元年 ) 무진 ( 戊辰 ) 을 당요 ( 唐堯 ) 25 년이라 하였지마는, 지나도 주소 ( 周召) 공화 ( 共和: 기원전 841 년 ) 이후에야 연대를 기록하게 되었으니 어찌 당요 25 년인지를 알수 있으랴 ? 그러므로 단군 기원을 확실하게 지적하지 아니한다. 고기 ( 古記 ) 에 단군의 나이에 대해 1,048 세 혹은 1,908세 등의 설이 있으나, 이는 신라 말엽에 ‘신수두’를 진단 ( 震檀) 으로, 환국 ( 桓國 ) 을 환인 ( 桓因 ) 으로 고쳐서 불전 ( 佛典 ) 의 말로 조선 고사를 농락한 불교도들이, 인도 고전의 3 만 년, 3 천 년, 5 백 년 등 장수를 했다는 불조 ( 佛祖 ) 의 기록을 본받아서 만든 말이라, 한 마디의 반박도 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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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전사에는 단군의 원년(戊辰)을 당요 25년이라 하였으나, 지나도 주소 공화(기원전 841년) 이후에야 연대를 기록하게 되었으니 어찌 당요 25년인지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단군 기원을 확실하게 지적하지 않는다. 고기에는 단군의 나이에 대해 1,048세 혹은 1,908세 등의 설이 있으나, 이는 신라 말엽에 '신수두'를 진단으로, 환국을 환인으로 고쳐서 불전의 말로 조선 고사를 농락한 불교도들이, 인도 고전의 3만 년, 3천 년, 5백 년 등 장수를 했다는 불조의 기록을 본받아 만든 말이라, 한마디의 반박도 할 가치가 없다.
제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이조 초에 권근 ( 權互 ) 이, “대를 물려 얼마나 되었던가, 해를 거듭하 여 천 년이 지났네 ( 傳世不知幾 歷年會過千 ). ”라는 시를 지어 이를 번안하였는데, 이는 다만 불가 ( 佛家 ) 의 허황한 말을 바로잡았다 할 수 있으나, 또한 단군의 시말 ( 始末 ) 을 모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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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초에 권근이 "대를 물려 얼마나 되었던가, 해를 거듭하여 천 년이 지났네"라는 시를 지어 이를 번안하였는데, 이는 다만 불가(佛家)의 허황한 말을 바로잡았다고 할 수 있으나, 또한 단군의 시작과 끝을 모르는 말이다.
제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옛날 2 천년 전에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으니, 고구려 건국 전 2천 년이 단군 왕검의 원년이요, 삼국 중엽까지도 ‘신 수두’를 받들어, 단군이 거의 정치상 반주권 ( 半主權 ) 을 가져 그 처음에서 끝까지 2 천 몇백 년이 될 것인데, 어찌 1 천 년만으로 헤아리랴. 그러나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 대왕과 대단군이 함께 서서 교정 ( 敎政 ) 분립의 싹이 시작되었으므로 본편은 이것으로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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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2천 년 전에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으니, 고구려 건국 전 2천 년이 단군 왕검의 원년이며, 삼국 중엽까지도 '신 수두'를 받들어 단군이 거의 정치상 반주권을 가져 그 처음부터 끝까지 2천여 몇백 년이 될 것이나, 어찌 1천 년만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 대왕과 대단군이 함께 서서 교정 분립의 싹이 시작되었으므로 본편은 이것으로 끝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