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高句麗BC 37 – AD 668문헌 원문 · 번역
조선상고사 제8편 삼국 혈전
제8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백제는 신위례성 ( 新慰禮城 ) 이 무너져서 외우 ( 外憂 ) 가 한창 심한 가운데 내란이 또한 잦아 문주왕 ( 文周王 ) 은 곰나루〔熊津〕로 천도한 뒤 4 년 ( 연표에는 3 년 ) 만에 반란을 일으킨 신하 해구 ( 解仇 ) 에게 죽임을 당하고, 맏아들 임근왕 ( 壬斤王 : 본기에는 三斤이라 하였으나 그의 딴 이름 壬乞로 보면 三斤의 三은 王의 잘못 ) 이 l3 살의 소년으로서 즉위 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좌평 ( 佐平 ) 진남 ( 眞男 ), 덕솔 ( 德率 ) 진로 ( 眞老 ) 등과 비밀히 모의하여 해구를 벤 영주 ( 英主 ) 였지만 3 년 만에 15 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그 해 기원후 479 년에 동성대왕이 즉위하였다.
번역
백제는 신위례성이 무너져서 외우가 심하고 내란까지 잦아지자 문주왕은 곰나루로 천도한 뒤 4년 만에 반란을 일으킨 신하 해구에게 죽임을 당했고, 맏아들 임근왕이 스물세 살의 소년으로 즉위하였다. 그 이듬해 좌평 진남, 덕솔 진로 등과 비밀히 모의하여 해구를 베었던 영주였으나 3년 만에 열다섯 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그 해 기원후 479년에 동성대왕이 즉위하였다.
제8편번역 대기
원문
왕의 이름은 마모대 ( 摩牟大 ) 이니 전사 ( 前史 ) 에 마모 ( 摩牟 ) 라 쓴 것은 끝의 한 자를 생략한 것이고 모대 ( 牟大 ) 라고 쓴 것은 위의 한 자를 생략한 것이다. 왕이 즉위 당시의 나이가 얼마였던 것은 역사에 기록되지 아니하였으나 임근 ( 壬斤 ) 의 종제 ( 終第 ) 이니까 열너덧 살에 지나지 못했을 것이다.
번역
제8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왕은 어린 소년으로 이같이 어려운 판국을 당했지마는 천성이 숙성하고 백발백중의 활쏘는 재주가 있어 고구려와 위 ( 魏 ) 를 물리쳐 국난을 평정하였을 뿐 아니라 바다를 건너 지나의 지금의 산동 ( 山東 ) · 절강 ( 漸江 ) 등지를 점령하고 일본을 쳐서 속국을 만들었으며 그 밖에도 전공이 허다했는데, 삼국사기에는 다만 당시 천재 ( 天災 ) 인 한두 번의 홍수와 가뭄과 왕의 사냥한 일을 기록하였을 뿐이요, 그 나머지는 모두 뺐으니 이는 신라 말기의 문사들이 삭제한 것일 것이다. 이제 다음에 그의 약사 ( 略史 ) 를 말하기로 한다.
번역
왕은 어린 소년으로 이같이 어려운 판국을 당했으나 천성이 숙성하고 백발백중의 활쏘는 재주가 있어 고구려와 위를 물리쳐 국난을 평정했을 뿐 아니라 바다를 건너 지나의 지금의 산동과 절강 등지를 점령하고 일본을 쳐서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그 밖에도 전공이 허다했는데, 삼국사기에는 다만 당시 천재인 한두 번의 홍수와 가뭄과 왕의 사냥한 일을 기록했을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빼니 이는 신라 말기의 문사들이 삭제한 것일 것이다. 이제 다음에 그의 약사를 말하겠다.
제8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장수태왕의 음모와 위병(魏兵)의 침입 ===
번역
장수 태왕의 계략과 위나라 군대의 침입
제8편번역 대기
원문
이때 지나는 황하 ( 黃河 ) 남북으로 갈려 곧 위 ( 魏 )· 제 ( 齊 ) 두 나라 로 분립하였다. 위는 곧 선비족 ( 鮮卑族 ) 의 척발씨 ( 拓跋氏 ) 로 모용씨 ( 慕容氏 ) 의 연 ( 燕 ) 을 대신하여 일어난 나라인데, 그 세력이 대단히 커져서 당시 유일한 강국으로 치게 되었다. 그런데 장수왕은 남쪽 네 나라의 동맹으로 인해 백제를 합치지 못하겠으므로, 손을 대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신랄한 수완을 부려 제 3 국으로 하여금 먼저 백제를 격파하게 하고 자기는 그 뒤에서 이익을 거두려고 하였다. 그래서 해마다 황금 · 명주 10 되를 위왕에게 보내주다가 3 년 만에 사신 예실불 ( 芮悉弗 ) 을 빈손으로 위에 보냈다.
번역
제8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위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예실불이“사비 ( 泗此 ) 부여 ( 扶餘 ) 에는 황금산이 있고 섭라 ( 涉羅 : 지금의 濟州 ) 에는 명주연 ( 明珠淵 ) 이 었어 두 가지 보물이 한량없이 나므로 전일에는 이를 캐어서 폐하에게 바친 것인데, 이제 사비부여는 백제의 서울이 되고 섭라도 백제가 정복하여 황금산과 명주연이 다 그의 손에 들어가서 우리 고구려인은 그 두 가지 보물을 구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폐하께 갖다드릴 것이 있겠습니까? ” 하였다. 위의 임금과 신하들이 이 말을 곧이듣고 백제를 쳐서 황금산의 황금과 명주연의 명주를 빼앗을 야욕이 치밀어 이에 동침 ( 東侵 ) 의 군사를 일으켰다.
번역
위왕이 그 까닭을 묻자, 예실불이가 말하였다. "사비 부여에는 황금산이 있고 섭라(지금의 제주)에는 명주연이 있어 두 가지 보물이 한량없이 나옵니다. 전일에는 이를 캐어 폐하께 바쳤으나, 이제 사비부여는 백제의 서울이 되고 섭라도 백제가 정복하여 황금산과 명주연이 모두 그의 손에 들어가 우리 고구려인은 그 두 가지 보물을 구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폐하께 갖다 드릴 것이 있겠습니까?" 위왕과 신하들이 이 말을 곧이듣고 백제를 쳐서 황금산의 황금과 명주연의 명주를 빼앗을 야욕이 치밀어 이에 동쪽으로 침공할 군사를 일으켰다.
제8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삼국사기에는 위서 ( 魏書 ) 에서 뽑아다가 예실불의 일을 장수왕의 아들 문자왕 ( 文咨王 ) 때의 일로 기록하였으나 남양예씨 ( 南陽芮氏 ) 의 족보에 의하면 예실불을 그 시조라 하고 그가 위에 사신간 일을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기록하였으니, 대개 위가 북으로는 고구려, 남으로는 제 ( 齊 )--- 곧 그 육지가 맞닿아 있는 나라를 두어두고 멀리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싸운다는 것은 해운 ( 海運 ) 이 불편한 고대에 있어서 땅을 다투려는 자의 일이 아니니 예실불의 말에 속아 황금과 명주를 가지려 하였음이 사실인 듯하고, 위의 백제 침입이 장수왕 때요 문자왕 때가 아니니 삼국사기의 연대가 틀린 듯하므로 이제 삼국사기를 버리고 예씨의 족보를 좇는다.
번역
삼국사기에는 위서에서 뽑아다가 예실불의 일을 장수왕의 아들 문자왕 때의 일로 기록하였으나, 남양예씨의 족보에 의하면 예실불을 그 시조라 하고 그가 위에 사신간 일을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기록하였다. 대개 위가 북으로는 고구려, 남으로는 제—곧 그 육지가 맞닿아 있는 나라를 두어두고 멀리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싸운다는 것은 해운이 불편했던 고대에 있어서 땅을 다투려는 자의 일이 아니니, 예실불의 말에 속아 황금과 명주를 가지려 하였음이 사실인 듯하고, 위의 백제 침입이 장수왕 때요 문자왕 때가 아니니 삼국사기의 연대가 틀린 듯하므로 이제 삼국사기를 버리고 예씨의 족보를 따른다.
제8편번역 대기
원문
=== 위병(魏兵)의 두 차례 침입과 두 번의 패배 ===
번역
제8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지나 대륙의 나라로 조선에 침입한 자가 많으나 그 군사의 수가 대략 10 만에 이른 것은 척발씨의 위가 시초였고, 이같이 큰 적을 격퇴한 이는 백제의 동성왕이 처음이었다 . 위서 ( 魏書 ) 에는 그 나라의 수치를 숨기기 위해 이를 기록하지 않았고, 삼국사기는 백제의 공을 샘하여 그 사적을 삭제한 신라의 사필 ( 史筆 ) 을 그대로 좋아 기록하지 않은 것이고 오직 남제서 ( 南齊書 ) 에 그 대략이 기재되었으나 그것도 당태종 ( 唐太宗 ) 의 훼방으로 대부분은 빠지고 겨우 동성왕이 남제 ( 南齊 ) 에게 보낸 국서가 남아 있어 그 사실의 편린 ( 片鱗 ) 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번역
지나 대륙의 나라로 조선에 침입한 자가 많았으나, 그 군사의 수가 대략 십만에 이른 것은 척발씨의 위가 시초였고, 이같이 큰 적을 격퇴한 이는 백제의 동성왕이 처음이었다. 《위서》에는 그 나라의 수치를 숨기기 위해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며, 《삼국사기》는 백제의 공을 샘하여 그 사적을 삭제한 신라의 사필을 그대로 좋아 기록하지 않은 것이고, 오직 《남제서》에 그 대략이 기재되었으나 그것도 당태종의 훼방으로 대부분은 빠지고 겨우 동성왕이 남제에게 보낸 국서가 남아 있어 그 사실의 편린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제8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 국서는 완전한 원문이냐 하면, “중국인이 남의 시문 ( 조선인의 詩文 ) 을 고침에 대담하여 중국을 '수방 ( 殊方 )' 혹은 '원방 ( 遠邦 )'이라 쓴 자구는 저네가 채집 ( 採輯 ) 할 때에 반드시 '황도 ( 皇都 )' 혹은 '대방 ( 大邦 )' 등으로 고친다.”라고 한 박연암 ( 朴燕嚴 ) 선생의 말이 있으니, 심상한 음풍영월 ( 吟風咏月 ) 의 시나 글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정치상에 관계되는 국서이랴.
번역
그 국서는 완전한 원문으로, "중국인이 남의 시문(조선인의 시문)을 고치면서 중국을 '수방' 혹은 '원방'이라 쓴 구절은 저들이 채집할 때 반드시 '황도' 혹은 '대방' 등으로 고친다."라고 한 박연암 선생의 말이 있으니, 심상한 음풍영월의 시나 글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정치상에 관계되는 국서이겠는가.
제8편번역 대기
원문
우리가그 국서로 인하여 1) 기원후 490 년에 위가 두 번이나 보병 · 기병 수십 만을 내어 백제를 침노하였음과 2) 동성왕이 첫 번째에 삭녕장군 ( 朔寧將軍 ) 면중왕 ( 面中王 ) 저근 ( 姐瑾 ), 건위장군 ( 建威將軍 ) 팔중후 ( 八中候 ) 부여고 ( 扶餘古 ), 건위장군 부여역 ( 技餘 歷 ), 광무장군 ( 廣武將軍 ) 부여고 ( 柱餘固 ) 를 보내어 위병을 맞아 싸워서 이를 크게 격파하였음과 3) 동성왕이 두 번째에는 정로장군 ( 征虜將軍 ) 매라왕 ( 邁羅王 ) 사법명 ( 沙法名 ), 안국장군 ( 安國將軍 ) 벽중왕 ( 辟中王 ) 찬수류 ( 贊首流 ), 무위장군 ( 武威將軍 ) 불중후 ( 弗中候 ) 해례곤 ( 解禮昆 ), 광위장군 ( 廣威將軍 ) 면중후 ( 面中候 ) 목간나 ( 木千那 ) 를 보내어 또 위병을 맞아 쳐서 수만 명을 목베었음과 4) 동성왕이 이 두 번의 큰 싸움에 큰 승리를 얻고 국서와 우격 ( 우격 : 나라의 급한 일에 내는 敵文 ) 을 여러 나라에 보내서 이를 과시하였음과 5) 동성왕이 여러 대 이래로 쇠잔해진 백제에 나서 국세가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두 번의 큰 싸움의 승리를 의지하여 국운을 만회하고 마침내 해외 경략 ( 經略 ) 의 터를 닦았음과 6) 당시 출전한 대장들은 저근·사법명·부여고·부여역·부여고·찬수류·해례곤·목간나 등이 있었음을 알 뿐이요, 전선 ( 戰線 ) 이 얼마나 길었으며 싸움이 얼마나 계속되었는지, 후자는 육전 ( 陸戰 ) 이거니와 전자는 육전이었는지 해전이었는지 이는 다 분명치 아니하다.
번역
제8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어찌하여 전후 두 차례의 전쟁에 대장은 각각 네 사람이었던가? 이는 백제왕도 부여나 고구려와 같이 중 ( 中 ) · 전 ( 前 ) · 후 ( 後 ) · 좌 ( 左 ) · 우 ( 右 ) 의 5 군 ( 軍 ) 제도를 써서 동성왕이 중군 ( 中軍 ) 대원수 ( 大元帥 ) 가 되고 네 사람은 각기 네 원수가 된 때문이었다. 어찌하여 저근이나 사법명이 동성왕의 신하로서 또한 왕이 되었는가? 신 (伸 ) 은 조선의 고제 ( 古制 ) 이니 대왕은 '신하'의 번역으로 곧 한 나라에 군림 한 천자를 일컫는 것이고, 왕은 '한'의 번역으로 곧 대왕을 보좌하는 소왕 ( 小王 ) 들의 칭호이기 때문이다.
번역
어찌하여 전후 두 차례의 전쟁에서 대장이 각각 네 사람이었는가? 이는 백제왕도 부여나 고구려와 같이 중·전·후·좌·우의 다섯 군 제도를 써서 동성왕이 중군 대원수가 되고 네 사람이 각기 네 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저근이나 사법명이 동성왕의 신하로서 또한 왕이 되었는가? 신은 조선의 고제이니, 대왕은 '신하'의 번역으로 곧 한 나라에 군림한 천자를 일컫는 것이고, 왕은 '한'의 번역으로 곧 대왕을 보좌하는 소왕들의 칭호이기 때문이다.
제8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동성대왕(東城大王)의 해외(海外) 경략(經略)과 중도에 돌아가심 ===
번역
동성대왕의 해외 경영 전략과 도중에 돌아가심
제8편번역 대기
원문
조선 역대로 바다를 건너 영토를 둔 것은 오직 백제의 근구수왕 ( 近仇首王 ) 과 동성왕 두 시대이다. 동성왕 때는 근구수왕 때보다 더욱 영토가 넓었으므로, 구당서 ( 舊居書 ) 의 백제전 ( 百濟傳 ) 에 백제의 지리를 기록하되 “서 ( 西 ) 로 바다를 건너 월주 ( 越州 ) 에 이르고, 북으로 바다를 건너 고려 ( 고구려 ) 에 이르고, 남으로 바다를 건너 왜 ( 倭 ) 에 이른다 ( 西渡海至越州 北懷海至高麗 南渡海至慶 ). ”라고 하였는데, 윌주는 지금 의 회계 ( 會稽 ) 이니 회계 부근이 다 백제의 소유였다. 문헌비고 ( 文獻備考 ) 에 “월왕 ( 越王 ) 구천 ( 句錢 ) 의 고도 ( 古都 ) 를 둘러싼 수천 리가 다 백제의 땅이었다.
번역
제8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라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킨 것이고, 고려는 당인 ( 唐人 ) 이 고구려를 일컬은 명사이다. 고구려의 국경인 요수 ( 遼水 ) 서쪽 ---지금의 봉천 ( 奉天 ) 서쪽이 다 백제의 소유였으니, 만주원류고 (滿洲源流考 ) 에 “금주 ( 錦州 ) · 의주 ( 義州 ) · 애훈 ( 愛훈) 등지가 다 백제이다. ”라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킨 것이다. 왜는 지금의 일본이니, 위에 인용한 구당서의 위 두 구절에 의하면 당시 일본 전국이 백제의 속국이 되었던 것을 의심할 나위 없다. 백제가 위의 해외 식민지를 어느 때에 잃었는가 하면 성왕 ( 聖王 ) 의 초년에 고구려에게 패하고 말년에 신라에게 패하여 나라의 형세가 한때 쇠약해졌으니, 이때에 이르러서 는 해외 식민지가 거의 몰락하였을 것이다.
번역
라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킨 것이고, 고려는 당나라 사람이 고구려를 일컫는 명사이다. 고구려의 국경인 요수 서쪽, 즉 지금의 봉천 서쪽이 모두 백제의 소유였으니, 만주원류고에 “금주 · 의주 · 애훈 등지가 모두 백제이다.”라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킨 것이다. 왜는 지금의 일본이니, 위에 인용한 구당서의 위 두 구절에 의하면 당시 일본 전국이 백제의 속국이 되었던 것을 의심할 나위가 없다. 백제가 위의 해외 식민지를 어느 때에 잃었냐면 성왕의 초년에 고구려에게 패하고 말년에 신라에게 패하여 나라의 형세가 한때 쇠약해졌으니, 이때에 이르러서는 해외 식민지가 거의 몰락하였을 것이다.
제8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동성왕이 이같이 전공을 이루었으나 수해와 한재가 심한 때임을 돌아보지 않고 화려하게 큰 임류각 ( 臨流聞 ) 을 짓고 그 앞에 원림 ( 園林 ) 을 만들고 못을 파서 진기한 새와 기이한 고기를 기르고 또 사냥을 즐겨 자주 거동을 하였는데, 기원 501 년 11 윌에 사비부여 ( 泗此扶餘 ) 마포촌 ( 馬浦村 ) 의 사냥에서 큰 눈을 만나 묵고 있다가 왕을 원망하던 위사좌평 ( 衛士佐平 ) 가림성주 ( 加林城主 ) 백가 ( 백加 ) 의 자객 칼에 죽으니 재위 23 년이요 그 나이 겨우 30 여 살이었다.
번역
동성왕이 이와 같이 큰 공을 세웠으나 수해와 한재가 심한 때임을 돌아보지 않고 화려하게 큰 임류각을 짓고 그 앞에 원림을 만들고 못을 파서 진기한 새와 기이한 고기를 기르고 또 사냥을 즐겨 자주 거동하였는데, 기원 501년 11월에 사비부여 마포촌의 사냥에서 큰 눈을 만나 머물다가 왕을 원망하던 위사좌평 가림성주 백가의 자객 칼에 죽으니 재위 23년이고 그 나이가 겨우 서른 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