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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高句麗BC 37 – AD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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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제10편 고구려 대당전쟁 朝鮮上古史 第10篇

신채호 · 1931 · 저본 한국어 위키문헌
문단 72개 · 번역 확정 0개
제10편문단 1번역 대기
원문
== 제1장 임유관(臨愉關)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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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문단 2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고구려· 수(隋) 전쟁의 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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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의 원인
제10편문단 3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세력과 세력이 만나면 서로 충돌되는 것은 공리(公理)요 정리(定理)다. 고대 동아시아에 있어서 비록 수많은 족속이 대립하였지마는 다 무무하고 미개한 유목의 야만족들이라 혹 한때 정치상 세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문화가 없으므로 뿌리없는 나무와 같이 붕괴하는 날에는 다시 일어날 터까지 없어지거니와, 토착(土着)한 민족으로 오랜 역사와 상당히 발달한 문화를 가진 자는 지나와 조선이었다. 지나와 조선은 고대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이니 만나면 어찌 충돌이 없으랴? 만일 충돌이 없는 때라면 반드시 피차 내부의 파탄과 불안이 있어서 각기 그 내부의 통일에 바쁜 때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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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끼리 만나면 서로 부딪치는 것은 이치요 법칙이다. 고대 동아시아에 수많은 부족들이 대립했지만, 모두 무무하고 미개한 유목 야만족들이라 혹 한때 정치적으로 세력을 가졌다고 해도 문화가 없으므로 뿌리 없는 나무와 같이 붕괴하는 날에는 다시 일어날 힘조차 없어지기 마련이다. 토착민으로 오랜 역사와 상당히 발달한 문화를 가진 자는 지나와 조선이었다. 지나와 조선은 고대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이니 만나면 어찌 충돌이 없겠는가? 만약 충돌이 없는 때라면 반드시 서로 내부의 파탄과 불안이 있어서 각기 그 내부 통일에 바쁜 때였을 것이다.
제10편문단 4번역 대기
원문
상고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구려 건국 이래로 조선은 아직 봉건(封建) 상태에 있어 여러 나라가 서로 번갈아 침범하므로 외정(外征) 할 힘이 없고 지나는 한(漢)이 통일하여 외정할 힘이 넉넉하였으므로 한의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가장 잦았다. 태조(太祖) · 차대(次大) 두 대왕 때에는 고구려가 비록 조선을 통일하지 못하였으나 국력이 매우 강성하여 조선 안에서는 거의 대적할 세력이 없었으므로 한을 쳐서 요동(遼東)을 점령하는 동시에 직예(直匠) · 산서(山西) 등지도 그 침략의 범위 안에 들었다. 그러나 오래지 아니하여 왕위 쟁탈의 난리가 거듭되어 마침내 발기(發岐)가 요동을 들어 공손도(公孫度)에게 항복해서 고구려는 가장 인민이 많이 모여 사는 기름진 땅을 잃어 약한 나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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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문단 5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고구려가 그 약한 나라의 지위를 변하려고, 조조(曺操) 자손의 위(魏)며 모용씨(慕容氏)의 연(燕), 곧 지나 북방의 나라들에 향 하여 도전하는 동안에 백제와 신라가 남쪽에서 일어나 고구려와 대등한 세력을 이루었다. 고국양(故國壞) · 소수림(小獸林) · 광개토(廣開土) 세 대왕이 일어나서 요동을 치고, 또 서북으로 글안을 정복하여 열하(熱河) 등지를 점령하였으며, 장수왕(長壽王)이 70년 동안 백성의 힘을 길러 인구가 크게 불고 나라의 힘이 팽창하여 지나와 맞서 싸울 만하게 되었다.
번역
고구려가 약한 나라의 지위를 바꾸려고 조조 자손의 위(魏)와 모용씨의 연(燕), 즉 지나 북방의 나라들을 향해 도전하는 동안에 백제와 신라가 남쪽에서 일어나 고구려와 대등한 세력을 이루었다. 고국양, 소수림, 광개토 세 대왕이 일어나 요동을 치고, 또 서북으로 글안을 정복하여 열하 등지를 점령하였으며, 장수왕이 70년 동안 백성의 힘을 기르어 인구가 크게 불고 나라의 힘이 팽창하여 지나와 맞서 싸울 만하게 되었다.
제10편문단 6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나 남쪽 네 나라의 고구려에 대한 공수동맹이 이루어져서 뒤에서 견제를 받아 장수왕 이래로 드디어 북진주의를 버리고 남쪽 통일에 힘썼고, 지나도 남북으로 나뉘어서 산해관(山海關) 동쪽을 엿볼 겨를이 없으므로 위(魏)의 척발씨(拓跋氏)의 백제 침입(제8 편 제2장 참고), 주(周)의 우문씨(宇文氏)의 고구려 침입(곧 溫達이 격퇴한) 같은 일시적 침입은 있었으나 피차의 흥망을 다투는 계속적 혈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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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남쪽 네 나라와 고구려 사이에 공수동맹이 이루어져 뒤에서 견제를 받았고, 장수왕 때부터 마침내 북진주의를 버리고 남쪽 통일에 힘썼다. 지나 역시 남북으로 나뉘어 산해관 동쪽을 엿볼 겨를이 없었으므로, 위나라의 탁발씨가 백제를 침입한 것(제8편 제2장 참고)이나 주나라의 우문씨가 고구려를 침입했던 것(온달이 격퇴함) 같은 일시적인 침입은 있었으나 서로의 흥망을 다투는 계속적인 혈전은 없었다.
제10편문단 7번역 대기
원문
그러나 기원 590년경에 이르러 우문씨의 제위(帝位)를 빼앗은 수(隋)의 문제 (文帝) 양견(楊堅)이 진(陳 : 지나 江南 6국의 하나)을 아우르고 전 지나를 통일하여 강대한 제국이 되어(수의 황가와 장국이나 재상들이 거의 다 鮮卑族으로 지나에 同化된 지 오래임) 지나 이외의 나라들을 깔보았는데 북쪽의 돌궐(突厥)이나 남쪽의 토욕혼(吐谷渾)은 다 쇠약하여 지나에 대해 신하의 예를 취하였고, 오직 동쪽의 고구려란 제국이 가장 강성하여 지나에 대항하니 어찌 저 오만하고 자존(自尊)한 지나 제왕이 참을수 있는 일이랴. 이것이 수가 고구려를 침노한 첫째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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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문단 8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백제와 신라는 수십 년 동안 서로 풀지 못할 원수를 맺었지마는 갑자기 옹서(翁壻)간의 나라가 되어서(제9편 제1장 참고) 피차 화호(和好)하고 두 나라가 다 고구려를 미워하여 각기 사신을 수(隋)에 보내서 고구려 치기를 청하고 또 가끔 고구려 국정의 허실을 수에 알려주어 수의 임금과 신하의 야심을 조장시켰다. 이것이 수가 고구려를 침노한 둘째 원인이었다. 뒤에 신라가 당(唐)에게 망하지 않고 구구한 반 독립국이나마 지녀 내려온 것은 고구려의 오랜 동안 끈덕진 저항과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맹렬한 진공(進攻)이 있었던 때문이니, 만일 고구려가 수에게 망했더라면 백제나 신라도 다 수의 한 군현(郡縣)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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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신라는 수십 년 동안 서로 풀지 못할 원수를 맺었으나, 갑자기 옹서간의 나라가 되면서 서로 화친하고 두 나라는 모두 고구려를 미워하여 각기 사신을 수에 보내 고구려 치기를 청했으며, 또 가끔 고구려 국정의 허실을 수에 알려주어 수의 임금과 신하들의 야심을 부추겼다. 이것이 수가 고구려를 침노한 둘째 원인이었다. 뒤에 신라가 당에게 망하지 않고 구구한 반독립국이나마 지켜 내려온 것은 고구려의 오랜 동안 끈덕진 저항과 연개소문의 맹렬한 진공이 있었기 때문이니, 만일 고구려가 수에게 망했더라면 백제나 신라도 모두 수의 한 군현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제10편문단 9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므로 우리가 고사를 읽을 때에 신라 · 백제 가 수에 대해 응원을 청한 사실을 보고는 책을 물리고 한숨을 짓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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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가 고사를 읽을 때 신라와 백제의 수에 대해 응원을 청했던 사실을 보고는 책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게 된다.
제10편문단 10번역 대기
원문
=== 수문제(隋文帝)의 모욕적인 언사의 국서(國書)와 강이식(姜以式)의 북벌 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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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문단 1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기원후 597년은 곧 고구려 영양왕 8년이요, 수의 문제(文帝)가 진(陳) 을 병합하여 지나를 통일한 지 17년되는 해이다 수는 이즈음에 자주 풍년이 들고 군사가 넉넉하자 고구려에 대해 자웅을 다투고자 무망 (誣罔)이 심하고 패만(悖慢)하기 이를 데 없는 모욕적인 글을 보내왔는데, 그 대강은 이러하였다.
번역
기원후 597년은 고구려 영양왕 8년이며, 수의 문제(文帝)가 진(陳)을 병합하여 지나를 통일한 지 17년이 되는 해이다. 이때는 자주 풍년이 들고 군사가 넉넉하자 고구려에 대해 자웅을 다투고자 무망하고 패만하기 이를 데 없는 모욕적인 글을 보내왔는데, 그 대강은 이러하였다.
제10편문단 12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짐이 천명을 받아 온 천하를 애육(愛育)하여 왕에게 바다 한 귀퉁이를 맡기는 것은 교화(敎化)를 드날려서 원로방지(圓로方趾)로 각기 그 천성 (天性)을 다하게 함이라, 왕이 매양 사절을 보내 해 마다 조공 (朝貢)하니, (다른 나라가 사신 보내는 것을 조공이라고 함은 지나 춘추시대 이래의 상례로 그들의 역사책에나그렇게 썼을뿐 대등한나라에 보내는 국서에는 쓰지 못했는데, 이제 고구려의 노여움을 격발시켜 한 번 싸우고자 고의로 쓴 것임) 비록 번부(藩附)라 일컫기는 하지마는 정성이 미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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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천명을 받아 온 천하를 사랑으로 기르고 왕에게 바다 한 구석을 맡기는 것은 가르침을 펼쳐 둥글고 네모난 곳으로 각기 그 타고난 성품을 갖추게 하는 것이다. 왕이 매년 사절을 보내 해마다 조공하니, (다른 나라가 사신 보내는 것을 조공이라고 함은 지나 춘추시대 이래의 상례로 그들의 역사책에나 그렇게 썼을 뿐 대등한 나라에 보내는 국서에는 쓰지 못했는데, 이제 고구려의 노여움을 격발시켜 한 번 싸우고자 고의로 쓴 것이다) 비록 번속이라 일컫지는 않으나 정성이 미흡하다.
제10편문단 13번역 대기
원문
왕이 이미 짐의 신하이니 짐의 덕을 본받음이 옳은데, 왕은 말갈(靺鞨)을 구축하고 글안을 가두어 왕의 신첩 (臣妾)을 만듣고 짐에게 내조(來朝)하는 것을 막아 착한 사람이 의를 사모함을 밉게 여기니 어찌 이같이 해독이 심하냐? 짐의 태부(太府)에 공인 (工人)이 적지 아니하니 왕이 쓰고자 할진대 아뢰면 얼마든지 보낼 것인데, (부강함을 과장한 말) 왕이 지난번에 가만히 재물을 써서 소인을 이용하여 군사를 기르고 병기를 수리하니 이것이 무엇을 하려 함이 냐.-----고구려가 비록 땅이 좁고 백성이 적지마는 이제 왕을 내쫓고 반드시 다른 관리를 보낼 것이로되, 왕이 만일 마음을 씻고 행실을 바 꾸면 곧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반드시 달리 관리를 두랴. 왕은 잘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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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문단 14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요수(遼水)가 넓다 한들 장강(長江 : 揚子江)과 어찌 비하 며, 고구려 군사가 많다 한들 진국(陳國)과 비하랴. 짐이 만일 기를 생각을 두지 않고 왕의 허물을 책할진대, 한 장군을 보내면 족하리니 무슨 큰 힘이 들랴마는 그래도 순순히 타일러서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삼국사기에는 수의 문제가 이 글을 평원왕(平原王) 32년(기원후 590 년)에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수서(隋書)에는 문제의 개황(開皇) 17년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평원왕 32년은 문제 개황 17년 이 아니니‘ 삼국사기에는 연조를 잘못 기록하였고, 개황 17년은 평원왕이 돌아간 지 7년 뒤이니, 수서에는 왕의 대를 잘못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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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수가 넓다 한들 장강과 어찌 비교하며, 고구려 군사가 많다 한들 진국과 비하랴. 짐이 만일 기를 생각을 두지 않고 왕의 허물을 책할진대, 한 장군을 보내면 족하리니 무슨 큰 힘이 들랴마는 그래도 순순히 타일러서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삼국사기에는 수의 문제가 평원왕 32년(기원후 590 년)에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수서에는 문제의 개황 17년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평원왕 32년은 문제 개황 17년이 아니니 삼국사기에는 연조를 잘못 기록하였고, 개황 17년은 평원왕이 돌아간 지 7년 뒤이니, 수서에는 왕의 대를 잘못 기록한 것이다.
제10편문단 15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이웃나라 제왕의 별세는 매양 그 사실을 보고해온 해에 기록하고, 따라서 그 사실이 발생한 연조를 틀리게 고쳐 쓰는 것은 지나의 춘추시대 이래의 습관이므로 수서에 그러한 잘못된 기록이 생기게 된 것인데, 삼국사기는 평원(平原) · 영양(慶陽) 두 본기의 연대는 고기(古記) 를 좇고 서로 관계된 사실은 오로지 수서에서 뽑아 기록하여 수서에 이 글이 평원왕에게 보낸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사기에 그 글을 평원왕 32년에 옮겨 기재하여 연대를 그르치는 동시에 사실에 관계된 인물까지 잘못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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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나라 제왕의 별세는 매번 그 사실을 보고해 온 해에 기록하고, 따라서 그 사실이 발생한 연도를 틀리게 고쳐 쓰는 것은 지나의 춘추시대 이래의 습관이라 수서에 그러한 잘못된 기록이 생기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는 평원과 영양 두 본기의 연대는 옛 기록을 따르고 서로 관계된 사실은 오로지 수서에서 뽑아 기록하여 수서에 이 글이 평원왕에게 보낸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사기에 그 글을 평원왕 32년에 옮겨 기재하여 연대를 그르치는 동시에 사실과 관련된 인물까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제10편문단 16번역 대기
원문
영양왕이 이 모욕적인 글을 받고 크게 노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회답의 글을 보낼 것을 의논하니, 강이식(姜以式)이 “이같이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회답할 것입니다.” 하고 곧 개전(開戰)하기를 주장하니 왕이 그의 말을 좇아 강이식으로 병마원수(兵馬元帥)를 삼아서 정병 5만을 거느리고 임유관(臨愉關)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예 (濊 : 隋書의 靺鞨) 군사 1만으로 요서 (遼西)에 침입하여 수의 군사를 유인하게 하고 글안 군사 수천 명으로 바다를 건너가 지금의 산동(山東)을 치게 하니 이에 두 나라의 첫 번째 전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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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문단 17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삼국사기에는 강이식의 이름이 보이지 아니하니 그것은 수서만을 뽑아 기록하였기 때문이거니와, 대동운해(大東韻海)에는 강이식을 살수전쟁(薩水戰爭) 때의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라 하였고, 서곽잡록(西郭雜錄)에는 강이식을 임유관 전쟁의 병마원수라고 하여 두 책의 기록이 같지 아니하다. 그러나 살수전쟁에는 왕의 아우 건무(建武)가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육지를 맡았으니 어찌 병마도원수 강이식이 있었으랴? 그러므로 서곽잡록의 기록을 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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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는 강이식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데, 이는 수서만을 뽑아 기록했기 때문이며, 대동운해에는 강이식을 살수전쟁 때의 병마도원수로 하였고, 서곽잡록에는 강이식을 임유관 전쟁의 병마원수라고 하여 두 책의 기록이 같지 않다. 그러나 살수전쟁에는 왕의 아우 건무가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이 육지를 맡았으니 어찌 병마도원수 강이식이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서곽잡록의 기록을 따른다.
제10편문단 18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임유관(臨愉關)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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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관 전투
제10편문단 19번역 대기
원문
이듬해 고구려의 군사가 요서에 침입하여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 (韋沖)과 접전을 벌이다가 거짓 패하여 임유관에서 나오니, 수의 문제 가 30만 대군을 들어 한왕(漢王) 양양(楊諒)으로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을 삼아 임유관으로 나오고, 주나후(周羅喉)로 수군총관(水軍總 管)을 삼아서 바다로 나아가게 하였다. 주나후는 평양으로 향한다는 말을 퍼뜨렸으나 실은 양식 실은 배를 인솔하여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양의 군량을 대주려 함이었다. 강이식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 가운데 들어가 이를 맞아 쳐서 배를 격파하고, 군중에 영을 내려 성책을 지키고 나가 싸우지 말라하니, 수의 군사는양식이 없는데다가 또한 6월의 장마를 만나 굶주림과 전염병에 숱한 사람이 낭자하게 죽어가 퇴군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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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문단 20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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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식이 이를 추격하여 전군을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기를 얻어 개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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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식이 이것을 추격하여 전군을 거의 섬멸하고 수많은 군기를 얻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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