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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高句麗BC 37 – AD 668

문헌 원문 ·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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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제9편 고구려 대수전쟁 朝鮮上古史 第9篇

신채호 · 1931 · 저본 한국어 위키문헌
문단 135개 · 번역 확정 0개
제9편문단 1번역 대기
원문
== 제 1 장 신라의 발흥(勃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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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문단 2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진흥대왕(眞興大王)의 화랑(花郞)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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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대왕이 화랑도를 세우다
제9편문단 3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화랑은 한때 신라가 크게 일어난 원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세에 한문화(漢文化) 가 발호 (跋扈)하여 사대주의파(事大主義派)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인심 · 풍속 · 학술을 지배하여 온 조선을 들어 지나화(支那化) 하려는 판에 이에 반항 · 배척하여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것이 이 화랑이었다. 송도 (松都) 중엽 이후로는 화랑의 여맥이 아직 없어지지 아니하여 비록 직접으로 그 감화를 받는 사람은 없지마는 그래도 간접으로 화랑의 유풍 여운을 받아 가까스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것은 화랑이었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려 함은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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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은 한때 신라가 크게 일어난 원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 한문화가 날뛰어 사대주의파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인심, 풍속, 학술을 지배하여 온 조선을 들어 지나화하려는 판에 이에 반항하고 배척하여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것이 이 화랑이었다. 송도 중엽 이후로는 화랑의 여맥이 아직 없어지지 아니하여 비록 직접으로 그 감화를 받는 사람은 없지마는 그래도 간접으로 화랑의 유풍 여운을 받아 가까스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것은 화랑이었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려 하는 것은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제9편문단 4번역 대기
원문
그러나 화랑파(花郞派) 에 스스로 기록한 문헌인 선사 ( 仙史 ) · 화랑세기 ( 花郞世紀 ) · 선랑고사 ( 仙郞故事 ) 등은 다 없어져서 화랑의 사적을 알자면 오직 화랑의 문외한인 유교도(儒敎徒)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와 불교도 무극(無極 : 一然) 의 삼국유사 두 책 가운데 과화숙식(過火熟食 : 생각지 않고 한 일이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유익하게 됨)으로 적은 수십 줄의 기록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데 그 수십 줄의 기록이나마 정확하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 이제 삼국사에 보인 화랑 설치의 실록(實錄)을 말하려 한다. 사기 진흥대왕 본기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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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문단 5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37 년 봄에 비로소 원화 (源花) 를 받들었다. 처음에 임금과 신하들이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음을 근심하여 무리가 모여서 떼지어 놀게 해서 그 행동을 살펴본 다음에 채용해서 쓰고자 하여 마침내 아름다운 여인 두 사람을 골랐는데, 한 사람은 남모(南毛), 또 한 사람은 준정(俊貞)이라 하였다. 그 무리가 3 백여 명이 모였는데 두 여인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시기하여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억지로 술을 권하여 몹시 취하게 한 다음 끌어다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일이 발각되어 준정이 처형되니 무리들이 불화해 져서 다 흩어져버렸다. 그 뒤에 다시 얼굴이 아름다운 남자를 골라 몸을 꾸며서 이름을 화랑(花郞)이라고 하여 받드니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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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 봄에 비로소 원화를 받들었다. 처음에 임금과 신하들이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음을 근심하여 무리가 모여서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동을 살펴본 후에 채용해서 쓰고자 하니, 마침내 아름다운 여인 두 사람을 골랐는데, 한 사람은 남모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준정이라 하였다. 그 무리가 삼백여 명이 모였는데 두 여인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시기하여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억지로 술을 권하여 몹시 취하게 한 다음 끌어다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일이 발각되어 준정이 처형되니 무리들이 불화해져서 모두 흩어져 버렸다. 그 뒤에 다시 얼굴이 아름다운 남자를 골라 몸을 꾸미고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받드니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제9편문단 6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들은 서로 도의(道義)를 연마하기도 하고 혹은 서로 노래와 음악을 즐기기도 하며, 산수 (山水)를 유람하여 아무리 멀어도 아니 가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의 바르고 그름을 알아서 착한 사람을 골라 조정에 추천하였다. 그래서 김대문(金大門)의 화랑세기(花郞世記)에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나오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고 하였고,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는 '나라에 현묘한 교가 있어 풍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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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서로 도리를 닦기도 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을 즐기기도 하며, 산수를 유람하여 아무리 멀어도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해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아서 착한 사람을 골라 조정에 추천하였다. 그래서 김대문(金大門)의 화랑세기에는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나오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라고 하였고,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에는 '나라에 현묘한 교가 있어 풍류라고 한다.'
제9편문단 7번역 대기
원문
교를 베푼 근원으로 신사(神史)에 자세히 갖추어져 있는데 실로 삼교( 三敎 : 유교 · 불교 · 선교 )를 포함하고 있어 인간을 접화(接化)하며 또한 들어와서는 집안에 효도하고 ,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한다고 한 것은 노사구 (魯司寇 : 孔子)의 취지요 , 무위(無爲) 의 일에 처하고 불언(不言)의 교를 행한다고 한 것은 주주사(周柱史 : 老子)의 종지(宗旨)요, 모든 악한 일을 하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고 한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 : 釋迦)의 교화(敎化)이다.'라고 하였다. 당 (唐) 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新羅國記)에는 '귀인(貴人)의 자제로서 아름다운 사람을 골라 몸을 단장하게 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하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존중하여 섬겼다.' 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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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문단 8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三十七年春 始奉源花 初君臣病無以知人 欲使類聚群遊 以觀其行義 然後學而用之 遂簡美女二人 一曰南毛 一曰俊貞 聚徒三百餘人 二女爭娟相妬 俊貞引南毛於私第 强勸酒至醉 曳而投河水以殺之 俊貞伏誅 徒人失和罷散 其後更取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知其人邪正 擇其善者薦之於朝 故金大問花郞世記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 崔致遠鸞郞碑序曰 ' 國有玄妙之道曰 風流說敎之源 備祥神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唐令狐澄新羅國記曰 '擇貴人子弟之美者 傳紛粧飾之 名曰花郞 國人皆尊事之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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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7년 봄에 처음으로 꽃을 받들어 모시니, 군주와 신하들이 병들어 사람을 알 길이 없었다. 무리 지어 놀게 하여 그들의 행실과 의리를 보고 나서 배우고 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여인 둘을 뽑았으니, 한 명은 남모라 하고 다른 한 명은 준정이라 했다. 무리 중 삼백여 명의 사람들을 모아 두 여인이 서로 예쁘다고 시기하며 질투하였다. 준정이 남모를 사적인 곳으로 이끌어 술을 마시게 하여 취하게 만든 뒤, 강물에 던져 죽이려 하였다. 준정은 결국 참수당하였고, 무리 사람들은 화합을 잃고 흩어졌다. 그 후 또 아름다운 남자들을 뽑아 꾸미고 이름을 화랑이라 하니 받들어 모셨다. 무리 사람들이 모여 때로는 도의로 서로 갈고닦거나,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즐기며 산수에서 놀았다. 멀지 않은 곳이 없었기에 이로써 그 사람들의 사악함과 바름을 알게 되었다. 그중 착한 자를 뽑아 조정에 추천하였다. 고로 금대(金大)가 화랑의 세상 기록에 이르기를 '어질고 돕는 충신은 이로부터 빛나며, 좋은 장수와 용맹한 병졸이 되니, 이로써 생겨났다' 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이 난랑비 서문에 이르기를 '나라에 오묘한 도가 있어 풍류설을 가르침의 근원으로 삼아 상서로운 신화사들이 실로 세 가지 가르침을 포함하여 무리 사람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들어가면 집에서 효도하고, 나갈 때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노나라 사구(魯司寇)의 뜻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에 처하며 말하지 않은 가르침으로 행하는 것이 주주사(周柱史)의 근본이며, 모든 악을 짓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죽건 태자(竺乾太子)의 변화와 같다' 하였다. 당나라 영호정(唐令狐澄)이 신라국 기록에 이르기를 '귀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자들을 뽑아 꾸미고 이름을 화랑이라 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를 받들어 모셨다.'
제9편문단 9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글의 끝에 김대문과 최치원의 말을 인용하여 화랑을 몹시 찬미한 듯 하나 자세히 상고해 보면 크게 잘못되고 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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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끝에서 김대문과 최치원의 말을 빌려 화랑을 지나치게 칭송하는 듯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크게 잘못되었고 터무니없다.
제9편문단 10번역 대기
원문
사다함전(斯多含傳)에 의하면 사다함이 가라 (加羅) 정벌에 참여한 것이 진흥대왕(眞興大王) 23 년이니, 37 년 이전에 이미 화랑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이제 37 년에 화랑이 비롯하였다고 함은 무슨 말인가?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화는 여자 교사이니 원화를 폐지한 뒤에 남자 교사를 두어 국선(國仙) 혹은 화랑이라 일컬었는데, 이제 원화를 화랑이라 함이 무슨 말인가? 대개 김부식의 때에는 화랑의 명칭도 아주 끊어지지 않고, 화랑의 문적 (文籍) 이 많이 남아 있을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지은 소위 사기에는 그 설치의 연대를 모호하게 하고, 그 원류(源流) 의 구별을 가리지 못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김부식은 유교도의 영수(領袖) 로서 화랑파 윤언이(尹彦頤)를 내쫓고 화랑의 역사를 말살한 자이니 그의 마음대로 하자면 삼국사기 가운데 화랑이라는 명사(名詞)를 한 자도 남겨두지 아니하였겠지마는 다만 그는 지나를 숭배하는 사람이라 우리의 이야기가 무엇이고 지나의 서적에 나왔으면 이를 사기에서 빼지 못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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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문단 1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므로 그가 아무리 화랑을 시샘하여도 다만 지나의 대중 유사 ( 大衆遺事 ) · 신라국기 ( 新羅國記 ) 같은 글 속에 화랑이라는 말이 실려 있는 것은 사기에서도 빼지 못하였다. 그가 이 장 끝에 인용한 신라국기가 겨우 '택귀인자제 ( 擇貴人子弟 )' 이하 모두 24 자에 지나지 아니하나 도종의(陶宗儀)의 설부(說郛)에 인용한 신라국기에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이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음을 근심하여 --- 채용하여 쓰고자---”라고 한 말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면 그 이하의 사실과 김대문 · 최치원의 논평까지도 대개 신라국기의 것을 뽑아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이와같이 신라국기에 있는 화랑 설치의 사적을 인용하고 , 본국에 전해지고 있는 것을 말살해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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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가 아무리 화랑을 시샘하여도 다만 지나의 대중 유사나 신라국기 같은 글 속에 화랑이라는 말이 실려 있는 것은 사기에서도 빼지 못하였다. 그가 이 장 끝에 인용한 신라국기가 겨우 '택귀인자제' 이하 모두 스물네 자에 지나지 않으나, 도종의의 설부에서 인용한 신라국기에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이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음을 근심하여 --- 채용하여 쓰고자---'라고 한 말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면 그 이하의 사실과 김대문·최치원의 논평까지도 대개 신라국기의 것을 뽑아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이와같이 신라국기에 있는 화랑 설치의 사적을 인용하고 본국에 전해지고 있는 것을 말살해버렸다.
제9편문단 12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 다음 삼국유사에 기록된 화랑의 실록 ( 實錄 ) 은 다음과 같다 . “진흥왕이 즉위하였다---크게 선선을 숭상하여 남의 집 아름다운 처녀를 골라서 원화로 만들었다. 그것은 무리를 모아 선비를 뽑고, 또 효·제 ·충·신 ( 孝悌忠信 ) 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었으니, 또 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요(大要)였다. 이에 남모랑(南毛娘)과 교정랑(姣貞娘 : 俊貞娘) 두 원화를 선출하니 무리가 3,4 백 명이나 모였다. 교정랑이 남모랑을 투기하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남모랑을 취하도록 마시게 하여 몰래 끌어다가 죽이고 북천(경주 북쪽에 있는 내) 물 속에 돌로 눌러 매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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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삼국유사에 기록된 화랑의 실록은 다음과 같다. 진흥왕이 즉위하여 크게 선선을 숭상하고 남의 집 아름다운 처녀를 골라 원화로 만들었다. 그것은 무리를 모아 선비를 뽑고, 또 효와 제와 충과 신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었으니,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큰 요체였다. 이에 남모랑과 교정랑(준정낭) 두 원화를 선출하니 무리가 삼천사백 명이나 모였다. 교정랑이 남모랑을 속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남모랑을 취하도록 마시게 하여 몰래 끌어다가 죽이고 북천 물 속에 돌로 눌러 매장시켰다.
제9편문단 13번역 대기
원문
무리들이 그녀가 간 곳을 알지 못하여 슬피 울며 흘어졌는데 어떤 사람이 그 음모를 알고, 노래를 지어 거리의 아이들을 꾀어 돌아다니며 부르게 하였다. 남모랑의 무리가 듣고 그 시체를 북천 속에서 찾아내고 교정랑을 죽였다. 이에 대왕 ( 진흥왕 ) 은 명령을 내려 원화를 폐지하였는데 몇 해 뒤에 왕이 다시 나라를 크게 일으키려면 먼저 풍월도(風月道 : 花郞道)를 일으켜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명령을 내려 양가(良家)의 남자로서 덕이있는 사람을 뽑아 이름을 화랑(花郞)이라 고치고, 처음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국선의 시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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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문단 14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眞興王 - - -卽位 - - - 多尙神仙 擇人家娘子美艶者 捧爲原花 要聚徒選士 敎之以孝悌忠信 亦理國之大要也 乃取南毛娘 · 교貞娘兩花 聚徒三四百人 교貞娘질적毛娘多置酒 飮毛娘 至醉 潛여去北川中 擧石埋殺之 其徒罔知去處 悲泣而散 有人知其謀者 作歌 誘街巷小童 昌於街 其徒聞之 尋得其戶於北川中 乃殺교貞娘 於是 大王下令 發原花累年 王又念欲興邦國 須先風月道 更下令 選良家男子 有德行者 改爲花郞 始奉薛原郞 爲國仙 此花郞國仙之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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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은 즉위하여 많은 신선들을 모시고 사람의 아내 중 아름다운 자를 뽑아 원화로 삼았으며, 무리들을 모아 선비들을 뽑고 그들에게 효도와 우애, 충성심과 믿음을 가르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큰 요점이었다. 이에 남쪽 모씨와 교정낭 두 꽃을 모으고 무리 삼사백 명을 거느렸다. 교정낭이 술을 마시고 모낭이 취하여 잠행으로 북천 속으로 사라지자, 그 무리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고 슬피 울며 흩어졌다. 이 계책을 아는 사람이 노래를 지어 거리의 어린아이들을 유인하였고, 창에서 이를 들은 무리들이 마침내 북천 속에서 그 집을 찾아 교정낭을 죽였다. 이에 대왕이 명령하여 원화를 모아 여러 해에 걸쳐 왕은 또 나라를 세우고자 하니 먼저 풍월의 도가 필요하다고 여겨 다시 명령하여 덕행 있는 좋은 집안의 남자들을 뽑아 화랑으로 삼았고, 비로소 설원랑을 받들어 나라의 신선으로 삼았다. 이 화랑이 국가의 신선이 된 시작이었다.
제9편문단 15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위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비하여 좀 자세하나 상말에 이른바 아닌 밤중의 홍두깨같이 나온 소리가 적지 아니하니 이를테면 진흥대왕이 신 선을 숭상하여 원화 · 화랑을 받들었다 하였으니 원화나 화랑이 도사(道士 )나 황관(黃冠 : 野人)의 종류란 말인가? 삼국유사의 작자는 불교도였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작자인 유교도같이 남을 배척하는 섬술을 가지지 아니하였을 것이지마는 그 기록이 모호하기는 매일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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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비하여 좀 자세하나 상말에 이른바 아닌 밤중의 홍두깨같이 나온 소리가 적지 않으니, 이를테면 진흥대왕이 신 선을 숭상하여 원화와 화랑을 받들었다 하였는데, 원화나 화랑이 도사나 황관(야인)의 종류란 말인가? 삼국유사의 작자는 불교도였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작자인 유교도같이 남을 배척하는 섬술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 기록이 모호하기는 매일반이다.
제9편문단 16번역 대기
원문
국선 · 화랑 (國仙花郞)은 진흥대왕이 고구려의 '선배'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선배'를 이두자(吏讀字)로 선인(先人) 혹은 선인(仙人)이라 썼음은 이미 제 3 편에서 말하였거니와 '선배'를 신수두 단(壇) 앞의 경기회에서 뽑아 학문을 힘쓰고 수박(手搏) · 격검(擊劍) · 사예(射藝) · 기마(騎馬) · 태껸 · 깨끔질 · 씨름 등 여러 가지 기예를 익히고 사방의 산수를 탐험하며 시와 노래와 음악을 익히고, 공동으로 한 곳에서 자고 먹고 하며, 평시에는 환난(患難)의 구제, 성 · 길 등의 수축 등을 스스로 담당하고, 난시에는 전장에 나아가 죽음을 영광으로 알아서 공익을 위해 한 몸을 희생하는 것이 선배와 같으니 국선(國仙)이라 함은 고구려의 선인(仙人)과 구별하기 위해 위에 국(國) 자를 더하여 지은 이름이고, 화랑이라 함은 고구려의 '선배'가 조백(조帛)을 입어 조의(조衣) 라 일컬은 것과 같이 신라의 '선배'는 화장을 시키므로 화랑이라 일컬은 것이니 또한 조의와 구별한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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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문단 17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원화는 마치 유럽 중고시대 예수교 무사단(武士團)의 여교사(女敎師) 처럼 남자의 정성(情性)을 조화하기 위하여 둔 여교사이니, 소재만필(昭齋만筆)에 “화랑의 설(說)에 사람이 전쟁 중에 죽으면 천당(天堂)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노인으로 죽으면 죽은 뒤의 영혼도 노인이 되며, 소년으로 죽으면 죽은 뒤의 영혼도 소년이 된다고 하여 화랑들이 소년으로 전쟁에서 죽는 것을 즐겼다.”고 하였으니, 다만 국선(國仙)의 선(仙) 자로 인해 장생불사(長生不死)를 구하는 지나의 선도(仙道)로 알면 큰 잘못이다. 최치원이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고 불언(不言)의 교를 행한다고 한 것은 주주사(周柱史)의 종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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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는 마치 유럽 중세 시대 예수교 무사단의 여교사와 같아서 남자의 정성을 조화시키기 위해 둔 여교사인데, 소재만필에 "화랑의 설에 사람이 전쟁 중에 죽으면 천당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노인으로 죽으면 죽은 뒤의 영혼도 노인이 되며, 소년으로 죽으면 죽은 뒤의 영혼도 소년이 된다고 하여 화랑들이 소년으로 전쟁에서 죽는 것을 즐겼다"고 하였으니, 다만 국선(國仙)의 선 자로 인해 장생불사를 구하는 지나친 선도로 알면 큰 잘못이다. 최치원이 "무위의 일에 처하고 불언의 교를 행한다"고 한 것은 주주사의 종지이다.
제9편문단 18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라고 한 것은 다만 국선의 교가 유·불·도삼교의 특징을 갖추어 가졌음을 찬탄한 말이니 국선은 투쟁에서 생활하여 무위나 불언과는 거리가 아주 천만 리나 떨어진 교이다. 앞에 말한 삼국사기의 “나라에 현묘(玄妙)한 교가 있어 풍류라고 한다. ”라고 한 것과 삼국유사의 “득오(得烏)는 이름이 풍류황권(風流黃卷)에 딸려 있었다. ”라고 한 것으로 보면 국선의 교를 '풍류(風流)' 라 이름하였음을 가히 알 수 있고, 앞에 말한 삼국유사의 “나라를 크게 일으키려면 먼저 풍월도를 일으켜야 한다.”고 한 것과 삼국사기 검군전(劍君傳)의 “나는 풍월(風月)의 뜰에서 수행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면 국선의 도를 또한 풍월이라고 하였음을 가히 알 수 있다.
번역
라고 말한 것은 다만 국선이 교가 유·불·도삼교의 특징을 갖추었음을 칭찬하는 말이니, 국선은 투쟁 속에서 생활하여 무위나 불언과는 아주 아득하게 떨어진 가르침이다. 앞서 언급한 삼국사기의 "나라에 현묘한 가르침이 있어 풍류라고 한다."라는 말과 삼국유사의 "득오(得烏)는 이름이 풍류황권(風流黃卷)에 속해 있었다."라는 말을 보면, 국선의 가르침을 '풍류'라 이름 지었음을 알 수 있고, 앞서 언급한 삼국유사의 "나라를 크게 일으키려면 먼저 풍월도를 일으켜야 한다."는 말과 삼국사기 검군전(劍君傳)의 "나는 풍월의 뜰에서 수행하였다."라는 말을 보면, 국선의 도를 또한 풍월이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9편문단 19번역 대기
원문
풍류는 지나 문자의 유희풍류(遊戱風流)의 뜻이 아니라 우리말의 풍류 곧 음악을 가리키는 것이고, 풍월도 지나 문자의 음풍영월(吟風영月)의 뜻이 아니라 우리말의 풍월 곧 시가(詩歌)를 가리키는 것이니, 대개 화랑의 도가 다른 학문과 달라 기술도 힘쓰지마는 음악과 시가에 가장 전념하여 인간 세상을 교화하였으니, 삼국사기 악지(樂志)에 보인 진흥왕이 지은 도령가(徒領歌)와 설원랑(薛原郞) 이 지은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은 물론 화랑이 지은 것이거니와, 삼국유사에 이른바 “신라 사람들이 향가(鄕歌) 를 매우 숭상했다. 그러므로 왕왕 능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는 일이 많았다.( 羅人尙響歌者 尙矣---故往往能感動天地鬼神者 非一 ) ”라고 한 향가 또한 거의 화랑의 무리가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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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문단 20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최치원의 향악잡영(鄕樂雜영)을 보면 이 시가와 음악으로 많이 연극을 행했으니, 부여 사람이나 삼한 사람이나 노래를 좋아하여 밤낮으로 노래와 춤이 끊이지 아니했다 함은 삼국지에도 분명히 실려 있거니와, 신라가 습속(習俗)으로 교도(敎導)의 방법을 세워 시가 · 음악 · 연극 등을 행하여 인심을 고무하였기 때문에, 원래 조그만 나라로서 마침내 문화상 · 정치상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대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화랑의 원류(源流)를 적은 선사(仙史) · 선랑고사(仙郞故事) · 화랑세기(花郞世記) 등이 다 전해지지 않았으나, 선사는 곧 신라 이전, 단군 이래 고구려 · 백제까지의 유명한 '선배'를 적은 것이니, 고구려 본기의 “평양은 선인(仙人) 왕검(王儉) 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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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향악잡영을 보면 이 시가와 음악으로 많은 연극을 벌였으니, 부여 사람이나 삼한 사람이나 노래를 좋아하여 밤낮으로 노래와 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 것은 삼국지에도 분명히 실려 있다. 신라가 습속으로 교도의 방법을 세워 시가·음악·연극 등을 행하여 민심을 고무했기 때문에, 본래 작은 나라였으나 마침내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화랑의 근원을 적은 선사·선랑고사·화랑세기 등이 모두 전해지지는 않았으나, 선사는 곧 신라 이전 단군 이래 고구려와 백제까지의 유명한 '선배'를 기록한 것이니, 고구려 본기에 "평양은 선인 왕검의 집"이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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