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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高句麗BC 37 – AD 668

문헌 원문 ·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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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제10편 고구려 대당전쟁 朝鮮上古史 第10篇

신채호 · 1931 · 저본 한국어 위키문헌
문단 72개 · 번역 확정 0개
제10편문단 2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수서에는 “양양의 군사는 장마에 전염병을 만나고, 주나후의 군사는 풍랑을 만나 퇴각하였는데 , 죽은 자가 열에 아흡이었다. ”고 하여 불가항력(不可抗力)의 자연의 힘에 패한 것이고, 고구려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고 기록하였으나 이는 중국의 체면을 위해 치욕을 숨기는 저 들의 이른바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의한 것이니, 임유관 싸움은 물론이고 다음 장에서 말할 살수(薩水) 싸움의 기록에도 그러한 투의 기록 이 많다. 아무튼 임유관 싸움 이후에 수의 문제가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피차 휴전 조약을 맺고 상품의 무역 을 다시 시작하여 두 나라 사이에 10여 년 동안이나 아무 일이 없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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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에는 "양양의 군사는 장마에 전염병을 만나고, 주나후의 군사는 풍랑을 만나 퇴각하였는데, 죽은 자가 열에 아흡이었다."라고 하여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힘에 패한 것이지, 고구려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는 중국의 체면을 위해 치욕을 숨기려는 저들의 이른바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의한 것이니, 임유관 싸움은 물론이고 다음 장에서 말할 살수(薩水) 싸움의 기록에도 그러한 투의 기록이 많다. 아무튼 임유관 싸움 이후에 수나라가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서로 휴전 조약을 맺고 상품의 무역을 다시 시작하여 두 나라 사이에 10여 년 동안이나 아무 일이 없었다.
제10편문단 22번역 대기
원문
== 제2장 살수(薩水)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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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문단 23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고구려 · 수(隋) 제2차 전쟁의 원인과 동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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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수나라의 두 번째 전쟁의 원인과 동기
제10편문단 24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고구려가 장수왕(長壽王) 이래로 남진주의(南進主義)를 취해 서북의 지나와는 친교를 맺고 남쪽의 신라 · 백제에 대하여 군사를 쓰다가 수(隋)가 지나의 남북을 통일하니, 고구려가 이를 두려워하여 우리도 빨리 신라와 백제를 토멸해서 조선을 통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자주 남쪽 정벌의 군사를 일으켰다. 신라와 백제는 동서끼리의 전쟁으로 인하여 서로 화합할 여지가 없게 되어 해마다 무력으로 다투는데, 게다가 북쪽 고구려의 침략이 있어 국력이 피폐해져 견디어낼 수 없으므로 두 나라는 제각기 사신을 수에 보내서 고구려 공격을 종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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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장수왕 때부터 남쪽으로 진출하는 방식을 취하여 서북의 지나와는 친교를 맺고 남쪽의 신라와 백제에 군사를 일으키다가, 수나라가 지나의 남북을 통일하자 고구려는 이를 두려워하여 우리 역시 빨리 신라와 백제를 토벌하여 조선을 통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자주 남쪽 정벌의 군사를 일으켰다. 신라와 백제는 동서 간의 전쟁으로 인해 서로 화합할 여지가 없게 되어 해마다 무력으로 다투었는데, 게다가 북쪽 고구려의 침략이 있어 국력이 쇠하여 견딜 수 없었으므로 두 나라는 각기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종용하였다.
제10편문단 25번역 대기
원문
그러나 수는 임유관 싸움에 혼이 나서 고구려를 가벼이 대적하지 못할 줄을 알고 이를 거절하였는데 문제(文帝)가 죽고 양제(煬帝) 가 즉위하여서는 해마다 풍년이 들어 전국이 부유해지고 각지의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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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문단 26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양제는 순유(巡遊)를 좋아하여 지금의 직예성 (直匠省) 통주(通州)에서 황하(黃河)를 건너 지금의 절강성(斯江省) 항주(抗州)에까지 3천 리 긴 운하를 파서 용주(龍舟 : 제왕이 타는 배) 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토곡흔(吐谷渾)---지금의 서장(西藏), 서돌궐(西突厥) ---지금의 몽고(蒙古), 돌궐(突厥) ---지금의 몽고 동부 등 여러 나라의 조공을 받아 이 하늘 아래에는 오직 수만이 강대한 제국이라고 자랑하려 하는데, 동방의 고구려가 있어 조선의 서북쪽---지금의 황해 · 평안 · 함경 세 도와 지금의 봉천(奉天) · 길림(吉林) · 흑룡(黑龍) 세 성을 모두 차지하여 토지는 비록 수보다 좁지마는 인구가 번식하고 군사가 용감하여 수와 겨루려 하니, 일찍이 병마도원수로 강남(江南)의 진(陳)을 토평하여 무공을 자랑하고 허영적 야심이 가득한 양제가 어찌 잠시인들 고구려를 잊으랴? 그 폭발하지 않은 것은 다만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번역
양제는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여 지금의 직장성 통주에서 황하를 건너 지금의 절강성 항주에 이르기까지 삼천 리 긴 운하를 파서 용주를 타고 이리저리 다니며 토곡흔, 지금의 서장, 서돌궐, 지금의 몽고, 돌궐, 지금의 몽고 동부 등 여러 나라의 조공을 받아 이 하늘 아래에는 오직 수만이 강대한 제국이라고 자랑하려 하는데, 동방에 고구려가 있어 조선의 서북쪽, 지금의 황해, 평안, 함경 세 도와 지금의 봉천, 길림, 흑룡 세 성을 모두 차지하여 토지는 비록 수보다 좁지마는 인구가 번성하고 군사가 용감하여 수와 겨루려 하니, 일찍이 병마도원수로 강남의 진을 토평하여 무공을 자랑하고 허영적 야심이 가득한 양제가 어찌 잠시나 고구려를 잊으랴? 그 폭발하지 않은 것은 다만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10편문단 27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기원후 607년(양제 즉위 후 3년)에 양제가 수백의 기병을 거느리고 유림(楡林)---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영하(寧夏)에 이르러 돌궐의 계민 가한(啓民可汗)의 장막에 들렀다. 이때 돌궐이 비록 수에 대해 신하라 일컫고 있었으나 또한 고구려의 강함을 두려워하여 자주 사신을 보내 조공하여 두 나라 속국의 구실을 하므로 고구려가 답사(答使)를 보냈는데, 양제가 이것을 알고 계민가한을 위협하여 고구려 사신을 불러보았다. 양제의 총신 배구(裵矩)가 양제를 꾀어 “고구려의 땅은 거의 한사군(漢四郡)의 땅인데, 중국이 이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수치입니다. 선제(先帝:文帝)가 일찍이 고구려를 토멸하려 하셨으나 양양이 재능이 없어서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전하께서 어찌 이를 잊으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번역
기원후 607년(양제 즉위 후 3년)에 양제가 수백 기병을 거느리고 유림(楡林)---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영하(寧夏)에 이르러 돌궐의 계민 가한의 장막에 들렀다. 이때 돌궐이 비록 자신들을 신이라 칭하고 있었으나 또한 고구려의 강함을 두려워하여 자주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두 나라의 속국 역할을 하였으므로, 고구려가 답사(答使)를 보냈다. 양제가 이를 알고 계민 가한을 위협하여 고구려 사신을 불러들였다. 양제의 총신 배구가 양제를 꾀어 “고구려 땅은 거의 한사군의 땅인데, 중국이 이것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수치입니다. 선제(先帝:文帝)께서 일찍이 고구려를 토벌하려 하셨으나 양양이 재능이 없어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전하께서 어찌 이를 잊으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제10편문단 28번역 대기
원문
그래서 양제는 고구려의 사신을 보고 “만일 고구려 왕이 입조(入朝)하지 않으면 짐이 마땅히 출순(出巡 : 침입한다는 뜻)할 것이다.” 하고 을러댔다. 사신이 귀국하여 보고하는 말을 들은 고구려 조정의 의논이 어떠하였던가는 역사책에 빠져서 알 수 없거니와 배구는 동번풍속기(東藩風俗記) 30권을 지어 양제에게 울렸는데 그 가운데 평양의 가려(佳麗)함과 개골산(皆骨山 : 金剛 山)의 영수(靈秀)함을 격찬하여 순수를 좋아하는 양제의 동침(東侵) 할 욕심을 더욱 부채질하여 명분없는 군사를 일으켜서 동양 고사상 미증유의 대전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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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문단 29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수양제(隋煬帝)의 침입과 그 전략 ===
번역
수양제의 침입과 그 전략
제10편문단 30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기원후 611년 6윌에 수의 양제가 고구려를 치는 조서를 내려 전국의 군사를 이듬해 정윌 안으로 탁군(啄郡)---지금의 직예성(直匠省) 탁현(啄縣)에 모이게 하고, 유주총관(幽州總管) 원홍사(元弘嗣)를 보내 동래(東萊) 지금의 연태(烟台) 해구(海口)에서 병선 300척을 만들게 하고, 4월에 강남(江南)과 회남(淮南)의 수수(水手) 1만 인, 노수(弩手) 3만 인과 영남(領南)의 배랍수(排랍手) 3만 인을 징발하여 수군을 증강하고, 5월에 하남(河南) · 회남에 조서를 내려 병거(兵車) 5만 대를 만들어서 군사와 무기와 군막(軍幕)을 실어 나르게 하고, 7 월에 강남 · 회남의 민부(民夫)와 배를 징벌하여 여양창(黎陽倉) · 낙구창(洛口倉) 등 창고의 쌀을 탁군으로 운반하게 하니, 강과 바다에는 배들이 1천여 리에 널리고 육지에는 각지의 물건 운반하는 일꾼이 항상 수십만 명이 동원되어 떠들어대는 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였다.
번역
기원후 611년 6월에 수의 양제가 고구려를 치는 조서를 내려 전국의 군사를 이듬해 정월 안으로 탁군, 즉 지금의 직장성 탁현에 모이게 하고, 유주총관 원홍사에게 보내 동래, 즉 지금의 연태 해구에서 병선 300척을 만들게 하며, 4월에 강남과 회남의 수수 1만 명, 노수 3만 명과 영남의 배랍수 3만 명을 징발하여 수군을 증강하고, 5월에 하남과 회남에 조서를 내려 병거 5만 대를 만들게 하여 군사와 무기와 군막을 실어 나르게 하고, 7월에 강남과 회남의 민부와 배를 징발하여 여양창, 낙구창 등 창고의 쌀을 탁군으로 운반하게 하니, 강과 바다에는 배들이 천여 리에 널리고 육지에는 각지의 물건을 운반하는 일꾼이 항상 수십만 명이 동원되어 떠들어대는 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제10편문단 31번역 대기
원문
이듬해 정월에 양제가 탁군에 이르러 모든 군사를 지휘하는데 좌우 각 12군으로 나누어 한 군단에 대장과 아장(亞將) 각각 한 사람을 두 고, 기병은 40여 대(隊)인데 1대는 100인이요, 10대가 1단(團)이 되어 네 단에 나누고, 보병은 80대인데 20대가 1단이 되어 또한 네 단에 나 누고 치중병 (輜重兵)과 산병 (散兵)도 또한 각각 네 단에 나누어 보병 사이에 끼우고, 갑옷 투구와 기치(旗幟)는 단마다 빛깔을 달리하고 나아가고 물러나고 머무르고 걷는 것이 정연하니 모두 24군단이었다. 하루에 한 군단씩 40리만큼 영(營)을 지어 출발하는데 40일 만에야 다 출발하니 머리와 끝이 서로 닿아 고각(鼓角) 소리가 산하를 뒤흔들고, 깃발이 960리에 뻗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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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문단 32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마지막으로 어영군(御營軍)이 출발하는데 또 한 80리에 뻗치니, 정규의 군사가 합 113만 3천8백 명이라 200만이라 일컬었고, 뒷바라지하는 군사는 400만이나 되니 지나 유사 이래의 대 동병 (動兵) 이었다.
번역
마지막으로 어영군이 출발하는데 또 여덟십 리에 이르러 정규의 군사만 합하여 백삼십삼만 팔천 명이라 하여 이백만이라 일컬었으며, 뒤따르는 군사는 사백만에 달하니 지나 유사 이래 가장 큰 동병이었다.
제10편문단 33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수서(隋書)에 양제 출군의 명령을 기록하되, 좌군(左軍) 12군단은 누방(누方) · 장잠(長岑) · 명해(溟海) · 개마(蓋馬) · 건안(建安) · 남소(南蘇) · 요동(遼東) · 현도(玄도) · 부여 (扶餘) · 조선(朝鮮) · 옥저 (沃沮) · 낙랑(樂浪) 등의 길로 나가고 우군(右軍) 12군단은 점선(점蟬) · 함자(含資) · 흔미(渾彌) · 임둔(臨屯) · 후성(候城) · 제해(提奚) · 답돈(踏頓) · 숙신(蕭愼) · 갈석(碣石) · 동이(東이) · 대방(帶方) · 양평(襄平) 등의 길로 나가서 다 평양에 모이라고 하였다.
번역
수서에 양제가 출군할 명령을 기록하되, 좌군 12군단은 누방, 장잠, 명해, 개마, 건안, 남소, 요동, 현도, 부여, 조선, 옥저, 낙랑 등의 길로 나가고 우군 12군단은 점선, 함자, 흔미, 임둔, 후성, 제해, 답돈, 숙신, 갈석, 동이, 대방, 양평 등의 길로 나가서 모두 평양에 모이라고 하였다.
제10편문단 34번역 대기
원문
명해는 지금의 강화(江華)요, 옥저는 함경도와 훈춘(渾春) 등지요, 임둔과 동이는 지금의 강원도이다, 평양에 모이라는 군사가 어찌 훈춘이나 함경도나 평양 이남의 땅으로 나왔을 것인가? 자치통감(資治通鍵)에 여러 군단의 진행한 실황을 기록하여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가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宇仲文)은 낙랑도(樂浪道)로 나가고,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荊元恒)은 요동도(遼東道)로 나가고, 우효위장군(右驍衛將軍)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沃沮道)로 나가고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은 현도도(玄도道)로 나가고, 우어위장군(右禦衛將單) 장근(張瑾)은 양평도(襄平道)로 나가고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碣石道)로 나가고,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隊城道)로 나가고 우어위호분낭장 (右禦衛虎賁郞將) 위문승(衛文昇)은 증지도(增地道)로 나가서 다 압록수(鴨錄水) 서쪽에 모였다고 하였는데, 낙랑 · 현도는 한(漢) 이래로 요동에 가설(假說)한 북낙랑 · 북현도도 있으니 압록수 서쪽에 모였다 함도 옳거니와 옥저가 어찌 압록수 서쪽이 되는가? 그러므로 지명이 거의 임시로 가정한 이름이고 고구려의 본 지명이 아니니, 이로써 그 행군의 노선을 자세히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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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문단 35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이제 그 전쟁의 광경에 의하여 미루어 보건대 양제의 작전 계획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24군단을 수륙(水陸) 두 방면으로 나누되 육군은 다시 두 부로 나누었다. 그 하나는 어영군(御營軍)과 그 밖의 10여 군단이니 양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의 여러 성을 치기로 하고, 또 하나는 우익위대장군 우문술 등 9군단이니, 우문술이 사령(司令) 이 되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이 참모가 되어, 요수를 건너 고구려 서울 평양에 침입하기로 했으며, 수군이 또한 여러 만 명이니 좌익위대장군 수군총관(水軍總管) 내호아(來護兒)와 부총관 주법상(周法尙)이 양식 실은 배를 영솔하여 바닷길로 쫓아 대동강으로 들어가서 우문술과 합세하여 평양을 공격하기로 한 것이었다.
번역
이제 그 전쟁의 광경으로 미루어 보건대, 양제의 작전 계획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24군단을 수륙 두 방면으로 나누되 육군은 다시 두 부로 나눴다. 그 하나는 어영군과 그 밖의 10여 군단이니, 양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요수를 건너 요동의 여러 성을 치기로 하고, 또 하나는 우익위대장군 우문술 등 9군단이니, 우문술이 사령이 되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이 참모가 되어, 요수를 건너 고구려 서울 평양에 침입하기로 했다. 수군 또한 여러 만 명이니, 좌익위대장군 수군총관 내호아와 부총관 주법상이 양식 실은 배를 거느리고 바닷길로 쫓아 대동강으로 들어가서 우문술과 합세하여 평양을 공격하기로 한 것이었다.
제10편문단 36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대개 태조왕(太祖王) 때에 왕자 수성(遂成 : 뒤의 次大王)이 한(漢)의 군사의 식량 보급로를 끊고 이를 격파한 이래 고구려에서 항상 북방의 침입을 방어할 때 수성이 쓴 계책을 쓰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하고 북방의 침입자들도 이것을 가장 경계하였으므로 이제 수의 양제는 육군은 가는 동안의 식량만 가지고 가며, 목적지인 요동 · 평양의 두 성에 이르는 수군에 의뢰하여 운반해온 양식을 먹고 두 성을 포위하여 지구전(持久戰)을 벌여서 뒤에 고구려의 항복을 받으려 함이었다.
번역
대개 태조왕 때에 왕자 수성이 한나라 군사의 식량 보급로를 끊어 격파한 이래, 고구려에서 항상 북방의 침입을 방어할 때 수성이 쓴 계책은 반드시 승리했고 북방의 침입자들도 이를 가장 경계했으므로, 이제 수의 양제는 육군은 가는 동안의 식량만 가지고 가고, 목적지인 요동과 평양 두 성에 이르는 수군에 의뢰하여 운반해 온 양식을 먹으며 두 성을 포위하여 지구전을 벌여 고구려의 항복을 받으려 했다.
제10편문단 37번역 대기
원문
=== 고구려의 방어와 그 작전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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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문단 38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후세에 살수대전(薩水大戰)을 말하는 이가 거의 을지문덕(乙支文德) 한 사람의 계획으로 치고 또 을지문덕이 겨우 수천 명의 군사로 수의 수백만 대군을 격파한 줄로 말하는데 이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 말이다.
번역
후세에 살수대전(薩水大戰)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거의 을지문덕 한 사람의 계책으로, 또 을지문덕이 겨우 수천 명의 군사로 수나라의 수백만 대군을 격파했다고 말하는데, 이는 사실과 맞지 않는 말이다.
제10편문단 39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고구려가 망할 때에도 그상비군이 30만이 나되었으니, 하물며 영양왕(영陽王)의 전성시기일이랴. 이때에는 오히려 30만 명이 넘었을 것이고 또 광개토왕의 비문에 “왕이 친히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나갔다. ”고 한 것으로 보거나 양제의 고구려에 대한 선전(宣戰) 조서로 보거나 아무튼 고구려 수군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으니, 수군은 대략 수만 명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 30여만 명으로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경계하는 데 몇만 명이 들었을 것이거니와, 그 나머지도 20여만 명이 되니, 이 20만 명은 수에 대항하는 전사가 되었을 것이 아닌가.
번역
고구려가 망할 때에도 상비군이 삼십만이 넘었으니, 하물며 영양왕의 전성기일 터이다. 이때에는 오히려 삼십만 명이 넘었을 것이며, 또 광개토왕의 비문에 "왕이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나갔다"고 한 것으로 보거나 양제의 고구려에 대한 선전 조서로 보거나 아무튼 고구려 수군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니, 수군은 대략 수만 명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 삼십여만 명으로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경계하는 데 몇만 명이 들었을 것이거니와, 그 나머지도 이십여만 명이 되니, 이 이십만 명은 수에 대항하는 전사가 되었을 것이 아닌가.
제10편문단 40번역 대기
원문
물론 수륙군의 대원수(大元帥)는 왕의 아우 건무(建武)요 육군의 원수는 을지문덕이었는데, 양제가 수륙 양면의 방어를 다 중히 여기는 가운데 먼저 지키고 나중에 싸우는 것으로 계획의 중심을 삼아 육상의 장사들은 인민에게 명하여 양식을 거두어가지고 모두 성에 들어가 있게 하고, 수군도 각각 요새 항구의 안전지대로 물러나 지켜 싸움을 피하다가 수의 군사가 양식이 떨어지기를 기다려서 공격하게 하였다.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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