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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高句麗BC 37 – AD 668

문헌 원문 ·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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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제10편 고구려 대당전쟁 朝鮮上古史 第10篇

신채호 · 1931 · 저본 한국어 위키문헌
문단 72개 · 번역 확정 0개
제10편문단 61번역 대기
원문
” 하여, 이에 조서로서는 대개 작년과 같이 여러 장수들의 출정할 길을 지정하였으나 내용은 먼저 오열홀을 쳐서 이를 함락시킨 뒤에 차차 그 지리(地理)의 차례에 따라 각 주군(州郡) 을 평정하고 평양까지 내닫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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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문단 62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이때 수는 크게 패한 뒤라 국고가 텅 비고 군대의 수효가 줄어 많이 모자라고 백성의 힘이 고갈하여 인심이 물끓듯해서 반란을 기도하는 자들이 지은 무향요동낭사가(無向遼東浪死歌)가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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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나라가 크게 패한 뒤라 국고가 텅 비고 군대의 수효가 줄어 많이 모자랐으며 백성의 힘이 고갈하여 인심이 물끓듯 하니 반란을 꾀하는 자들이 지은 무향요동낭사가가 유행하였다.
제10편문단 63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양제는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재물을 강탈하여 군량을 마련하고, 남자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군사로 삼아서 교련한 지 몇 달 만에 요동으로 향하게 하고, 우문술 · 이경(李更) 등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응원하는 길을 막게 하고, 양제는 몸소 어영군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오열홀을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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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제는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재물을 강탈하여 군량을 마련하고, 남자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군사로 삼아 교련한 지 몇 달 만에 요동으로 향하게 하고, 우문술과 이경 등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응원하는 길을 막게 하였으며, 양제는 몸소 어영군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오열홀을 공격하였다.
제10편문단 64번역 대기
원문
당시 오열홀의 성주(城主)의 이름은 비록 역사에 보이지 아니하나 대개 지혜롭고 용감하고 침착하고 의연한 인물이요 성 안의 모든 장졸들은 거의 다 수없이 많은 싸움을 경험한 용사들이었으므로 양제가 비루(飛樓 : 이동하는 누각)를 맨다, 운제(雲梯 : 높은 사닥다리)를 세운다, 지도(地道 : 땅굴)를 판다, 토산(土山)을 쌓는다 하여 성 공격하는 방법을 모조리 다 써보았지마는, 성주는 그때그때 알맞는 방어전을 벌여서 서로 대치한 지 수십 일에 수의 군사가 수없이 많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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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문단 65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수의 동도수장(東都守將)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기별이 와서 양제는 무기와 물자와 성 공격하는 기구 등을 다 버리고 밤 이경(二更)에 비밀히 여러 장수들을 불러 황급히 군사를 돌이켰으나 성주에게 발각되어 그 후군(後軍)이 고구려 군사의 습격을 받아 거의 전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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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도 수장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식이 와서, 양제는 무기와 물자, 그리고 성을 공격하는 기구 등을 모두 버리고 밤 이경에 비밀리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황급히 군사를 돌렸으나 성주에게 발각되어 그 후군이 고구려 군사의 습격을 받아 거의 전멸하였다.
제10편문단 66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수양제(隋煬帝)의 세 번째 침략과 노수(弩手)의 저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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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제의 세 번째 침략과 노수의 저격
제10편문단 67번역 대기
원문
양제는 비록 양현감의 반란을 평정하였지마는 국력이 피폐하고, 인민의 원한이 극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양제는 오히려 패전의 치욕을 씻고자 하여 국내의 병마(兵馬)를 또 징집하여 회원진(懷遠鎭)으로 나아가는데, 군사들이 전번 두 번의 패전으로 인하여 가면 죽을 줄 알므로 도중에서 도망하는 자가 많고 이미 반란을 일으킨 지방은 징집에 응하지 않는 곳도 있었다. 양제는 싸우기 어려울 것을 깨닫고 중지하려고 하다가 그러면 더욱 온 나라 안의 웃음거리가 되어 반란을 진압 할 수 없을 것을 생각하고, 어떤 구실이라도 잡아서 휴전을 하려고 고구려에 대해 반신(叛臣) 곡사정(斛斯政)의 인도를 유일한 조건으로 화의를 제출하였다. 곡사정은 곧 양현감의 무리로서 고구려에 투항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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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문단 68번역 대기
원문
이때에 고구려의 국론이 두 파로 갈리니 한 파는 남쪽의 신라 · 백제를 토멸하기 전에는 지나에 대해 말을 낮추고 후한 예물로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옳다, 전자에 지나에 대한 교제가 너무 강경하여 여러 해 전화를 일으켰으니 오늘부터라도 다시 정책을 변경하여 수와 화의하자 하였고, 또 한 파는 신라와 백제는 산과 내가 몹시 험하여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우며 또 백성들이 굳세어 좀처럼 굴복하지 않는데, 지나의 대륙은 이에 반하여 넓은 들이 많아서 가장 군사를 쓰기가 좋고, 백성들이 전쟁을 두려워하여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쪽이 동요하므로 장수왕의 북수남진책 (北守南進策)이 원래 잘못된 것이다, 오늘 부터라도 이 정책을 버리고 남쪽은 방어만 하고 정병을 뽑아 수를 치면 비록 많은 군사가 아니라도 성공하기 쉬우며, 성공한 뒤에 백성을 위무하고 인재를 채용하면 전 지나를 통일하기가 용이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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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문단 69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앞의 것은 왕의 아우 건무(建武)의 일파이니 많은 호족(豪 族)들이 이에 속해 있었고, 뒤의 것은 을지문덕의 일파이니 일부 무장 (武將)들이 이에 속해 있었다. 두 사람이 다 수에 대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서 나라 사람들의 신망이 다 같이 높았으므로 따라서 두파의 세력도 거의 비슷하였다. 영양왕(영陽王)은 을지문덕의 주장에 찬동하였으나 고구려는 호족 공화(共和)의 나라였으므로 왕이 또한 건무파의 의견을 꺾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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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쪽은 왕의 아우인 건무의 일파로 많은 호족들이 속해 있었고, 뒤쪽은 을지문덕의 일파로 일부 무장들이 속해 있었다. 두 사람이 모두 수에 대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나라 사람들의 신망이 다 같이 높았으므로 따라서 두 파의 세력도 거의 비슷하였다. 영양왕은 을지문덕의 주장에 찬동하였으나 고구려는 호족 공화의 나라였으므로 왕이 또한 건무파의 의견을 꺾지 못하였다.
제10편문단 70번역 대기
원문
그러다가 양제가 곡사정의 인도를 조건으로 화의를 제출하자, 나라 안이 건무파에 많이 붙좋아 우세해져서 드디어 망명해온 가련한 곡사정의 인도를 허락하는 동시에 사자가 국서를 받들고 양제의 군영으로 갔는데, 어떤 장사가 이를 몹시 분개 하여 소뇌[弩弓]를 품고 사자의 수행원으로 가장하고 가만히 사자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양제의 가슴을 쏘아맞히고 달아났다. 비록 이로써 화의를 깨뜨리진 못하고 곡사정의 인도도 중지시키지 못하였으나 양제의 넋을 빼앗고 고구려의 사기가 왕성함을 보임에는 넉넉하였다. 그 화살을 맞고 돌아간 양제는 병도 들고 부끄럽고 노여워서 울분을 참지 못하다가,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워져서 몇 해 안가 암살당하여 수는 마침내 나라가 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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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문단 7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안정복(安鼎福) 선생이 이 전쟁을 논평하다가 영양왕이 살수 승전의 위세로 수의 양제의 아비 죽인 죄를 성토하고 을지문덕 장군을 호령하여 수를 합병하지 못했음을 한하였으나, 양제가 아비 죽인 설은 의문이 있는 일일 뿐 아니라 또한 수의 궁중 비사(秘史)라 고구려 사람이 듣지 못했을 것이니 말할 것 없거니와 그러나 해상잡록(海上雜錄)에는 분명히 이 전쟁 끝에 을지문덕의 일파가 북벌을 주장하였음을 기록했는데, 선생이 이를 그의 저서 동사강목(東史網目 )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마도 비사(秘史)의 설을 정사(正史) 에 넣을 수 없다 함인 것 같다.
번역
안정복 선생이 이 전쟁을 논평하면서 영양왕이 살수에서 승리한 위세로 수나라 양제의 아버지를 죽인 죄를 성토하고 을지문덕 장군을 호령하여 수를 합병하지 못했음을 한하였으나, 양제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설은 의문이 있는 일일 뿐 아니라 또한 수의 궁중 비사라 고구려 사람이 듣지 못했을 것이니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해상잡록에는 분명히 이 전쟁 끝에 을지문덕의 일파가 북벌을 주장했음을 기록했는데, 선생이 이를 그의 저서 동사강목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마도 비사의 설을 정사에 넣을 수 없다고 여긴 듯하다.
제10편문단 72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나 정사 삼국사기 · 동국통감 등은 사대주의의 기록이기 때문에 지나와의 전쟁에 대해서는 오로지 저네 의 기록만 인용하였으니 비사의 설이 도리어 정확한 재료가 아닌가하여 본서에서는 이를 채록(採錄)하였다.
번역
그러나 정사 삼국사기, 동국통감 등은 사대주의 기록이기 때문에 지나와의 전쟁에 대해서는 오로지 저들의 기록만을 인용하였으니, 비사의 설이 도리어 정확한 자료가 아닌가 하여 본서에서는 이를 채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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