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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高句麗BC 37 – AD 668

문헌 원문 ·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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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제5편 고구려 전성 朝鮮上古史 第5篇

신채호 · 1931 · 저본 한국어 위키문헌
문단 138개 · 번역 확정 0개
제5편문단 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제1장 기원후 1세기초 고구려의 국력발전과 그 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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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서기 1세기 초 고구려의 국력 발전과 그 원인
제5편문단 2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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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주류왕(大朱留王) 이후의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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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류왕 이후의 고구려
제5편문단 3번역 대기
원문
기원후 1세기 이후로 기원후 3, 4세기까지의 한강 이남 곧 남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은 아직 초창하여 새로 일어선 때요, 압록강 이남 곧 중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은 다 쇠미해지고, 압록강 이북 곧 북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도 거의 기울어져서, 가라나 신라나 백제나 남낙랑이나 동 부여의 두 나라들이 다 기록할 만한 일이 별로 없고, 오직 고구려와 북부여가 가장 강대한 나라로 여러 나라 중에 크게 떨쳤다. 그러나 대 주류왕 이후 연대가 삭감됨에 따라 사실도 모두 빠져서 그 사적 ( 史積 ) 을 논할 수가 없게 되었고, 이제 지나사에 의거하여 고구려가 지나와 선비에 대해 정치적으로 관련된 한두 사항을 기록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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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4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2.고구려의 대(對) 중국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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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중국의 관계
제5편문단 5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고구려가 동부여와 남낙랑과의 관계로 인하여 늘 한 ( 漢 ) 과 다투더니, 기원후 1 세기경에 한의 외족 ( 外族 ) 에 왕망 ( 王莽 ) 이라는 괴걸 ( 怪傑 ) 이 나와서, 1) 고대 사회주의적인 정전볍 ( 井田法 ) 을 실행하고, 2) 한 문화 ( 漢文化 ) 로 세계를 통일하여 일종의 공산주의적 국가의 건설을 시도하여, 지나 본국뿐 아니라 조선의 여러 나라까지도 얼마간의 관계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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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동부여와 남낙랑과의 관계로 인해 늘 한나라와 다투었으나, 기원후 1세기경에 한나라 외족에 왕망이라는 괴걸이 나타나서, 첫째 고대 사회주의적인 정전법을 실행하고, 둘째 한 문화로 세계를 통일하여 일종의 공산주의적 국가 건설을 시도하였으며, 이는 지나 본국뿐 아니라 조선의 여러 나라까지도 얼마간의 관계가 발생하였다.
제5편문단 6번역 대기
원문
말하자면 지금의 중화민국 ( 中華民國 ) 이전에 지나는 수천 년 동안 왕조의 변역과 군웅의 쟁탈이 무상하였지마는, 기실 을의 세력이 갑의 세력을 대신할 때에, 민중에게는 한때, `요역 ( 요投 ) 을 면제하고 부세 ( 賦稅 ) 를 감해준다 ( 省요役薄賦稅 )'하는 6 장의 혜정 ( 惠政 ) 으로 고식적 ( 始息的 ) 인 편안을 주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옛 규 정을 회복하여 폭 ( 暴 ) 으로써 폭을 대신하는 극이 되풀이될 뿐이었으니, 이를 무의식한 내란이라고는 일컬을지언정, 혁명이라는 아름다운 칭호는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왕망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토지를 평균하게 나누어 빈부의 계급을 없애자는 생각을 대담하게 실행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동양 고대의 유일한 혁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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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7번역 대기
원문
이제 정전설 ( 井田說 ) 발생의 경과와 왕망의 약사 ( 略史 ) 를 말하기로 한다. 정전설은 지나의 춘추시대 ( 春秋時代 ) 말 전국시대 ( 戰國時代 ) 초 ( 기원 전 5 세기경 ) 에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생한 것인데, 당시 여러 나라들이 서로 맞서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나라마다 귀족이 전권 ( 專權 ) 을 하여, 사치가 극에 이르고, 전쟁이 끊일 날 없어서, 부세가 날로 높아가고,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땅을 아울러 가져서 인민의 생활이 말할 수없이 곤란하였으므로, 유약 ( 有若 ) · 맹가 ( 孟軻 : 孟子 ) 등 일부 학자들이 이를 구제하려고 토지평균설 ( 土地平均說 ) --- 정전설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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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8번역 대기
원문
그들의 말에 의하면, “지나의 하 ( 夏 ) · 상 ( 商 ) · 주 ( 周 ) 3 대가 다 정전제 ( 井田制 ) 를 행하였는데, 정 ( 井 ) 자 모양의 9 백 묘 ( 묘 ) 의 땅을 여덟 집에 나누어주어 한 집이 1 백 묘씩을 경작하고, 그 나머지 l 백 묘는 공전 ( 公田 ) 이라 하여 여덟 집이 공동으로 경작하여 공용 ( 公用 ) 에 바치게 하고 또 각자 경작한 1 백 묘에서 소출의 10 분에 1 을 공세 ( 公稅 ) 로 바치게 하여 이를 십일세 ( 什一稅 )라 일컬었다.”고 하고, “선대의 성왕 ( 聖王 ) 은 다시 나지 않고 중국이 분열하여 전국시대가 되매, 제후와 왕들이 그 백성에게서 세를 많이 받기 위하여 정전을 파괴하는 동시에, 정전에 관한 문적 ( 文籍 ) 까지 없애버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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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9번역 대기
원문
어느 민족이고 그 원시 공산제가 있었음을 오늘날의 사회학자들이 다 같이 공언하는 바이니, 지나도 그 태고에 균전제도 ( 均田制度 ) 가 있었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들 ( 有若 · 孟軻 등 ) 이 주장한 정전제는 당시 조선의 균전제를 눈으로 보고 혹은 전해듣고서 이를 모방하려 한 것이고, 그들이 자인한 바와 같이 자기네의 옛 문적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다만 조선의 균전은 팔가동전 (八家同田 ) 이 아니고 사가동전 ( 四家同田 ) 이니, 지금 평양이나 경주에 끼쳐 있는 기자형 ( 器字形 ) 의 고전 ( 故田 ) 이 이를 충분히 증명하는데, 그 세제는 10 분의 1 을 취하는 `십일세 ( 什一脫 ) 가 아니고, 20 분의 1 을 취하는 입일세 ( 卄一脫 )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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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10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맹자가, `맥 ( 貊 : 곧 濊 貊 ) 은 20 에서 1 을 취한다 ( 貊 二十取一 ).'고 한 말이 이를 명백히 지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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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가 '맥(<0xE8><0xB2><0x8A>)은 스무에서 하나를 취한다'라고 말한 것이 이를 분명히 지적한 것이다.
제5편문단 1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저들이 사가동전제를 파가동전제로 고치고 20 분의 1의 세제를 10 분 의 1의 세제로 고쳐서 조선과 달리하고는, 자존적 근성이 깊이 박힌 그들이 이를 조선에서 가져왔다 함을 꺼려 숨기고 중국 선대 제왕의 유제 ( 遺制 ) 라고 속이는 동시에 조선을 이맥 ( 夷貊 ) 이라 일컫고, 조선의 정전은 이맥의 제도라고 배척하여 춘추의 공양전 ( 公洋傳 ) · 곡량전 ( 穀梁傳 ) 이나 맹자와 마찬가지로, “십일 ( 什一 ) 보다 적게 받는 자는 대 맥 ( 大貊 ) · 소맥 ( 小貊 ) 이다 ( 少乎什一者 大貊小貊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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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이 사가동전제를 파가동전제로 바꾸고 20분의 1의 세제를 10분의 1의 세제로 고쳐 조선과 다르게 한 뒤, 자존심이 깊게 박힌 그들이 이를 조선에서 가져왔다고 숨기고 중국 선대 제왕의 유제라고 속이는 동시에 조선을 이맥이라 일컫고, 조선의 정전은 이맥의 제도라고 배척하여 춘추의 공양전이나 곡량전이나 맹자와 마찬가지로, "열한(什一)보다 적게 받는 자는 대맥과 소맥이다."
제5편문단 12번역 대기
원문
”라고 하고, “맥 ( 貊 ) 은 오곡이 잘 되지 않고 오직 기장만 나는데---백관 ( 百官 ) · 유사 ( 有司 ) 를 먹여 살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20 에 1 만 받아도 족하다 ( 貊 五穀不生 唯?용生之 - - -- - -無百官有司之養 故二十取一而足 ).”고 하였다. 후한서 부여 · 옥저 등의 전 ( 傳 ) 에,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기름지고 아름다워오곡이 잘 된다 ( 土地平?---肥美---宜五穀 ).”고 하였고, 위략의 부여 · 고구려 등의 전에는, “그 벼슬에는 상가 ( 相加 ) · 대로 ( 對盧 ) · 패자 ( 沛者 ) 등이 있다 ( 其官 有相加對盧沛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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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13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라고 하였으니, 맹씨 ( 孟氏) · 공양 ( 公洋) · 곡량 ( 穀梁 ) 등의 말이 근거도 없고 이론에도 맞지 않는 조선 배척론임을 볼 것이다. 조엽 ( 趙曄 ) 의 오월춘추 ( 吳越春秋 ) 에는 “하우 ( 夏禹 ) 의 정전 ( 井田 ) 이 조선 ( 본문의 州愼 ) 의 것을 모방해서 행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정한 자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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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씨, 공양, 곡량 등의 말이 근거도 없고 이론에도 맞지 않는 조선 배척론임을 알 수 있다. 조엽의 오월춘추에는 "하우의 정전이 본문의 주신(州愼)의 것을 모방하여 행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정한 자백이다.
제5편문단 14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저들이 정전설을 아무리 소리 높여 외쳤더라도 본래 민중을 휘동하여 부귀의 계급을 타파하려 한 운동이 아니고 오직 임금이나 부귀의 계급을 설복하여 그 이미 얻은 부귀를 버리고 그 가지고 있는 것을 민중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자는 것이므로 민간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임금이나 귀족들은 바야흐로 권리의 쟁탈에 급급하여 정전설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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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이 정전설을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쳤더라도 본래 민중을 휘둘러 부귀의 계급을 무너뜨리려는 운동이 아니었고, 오직 임금이나 부귀한 계층을 설득하여 그 이미 얻은 부귀를 버리고 가지고 있는 것을 민중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자는 것이었으므로 민간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임금이나 귀족들은 바야흐로 권리 다툼에 급급하여 정전설에 귀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제5편문단 15번역 대기
원문
진시황이 여러 나라를 토멸하여 지나를 통일하고 지나의 모든 재부 ( 財富 ) 를 독점하여, 아방궁 ( 阿房宮 ) 을 짓고 만리장성을 쌓다가 2 세에 망하고, 8 년의 큰 난리를 지나 한 ( 漢 ) 나라가 일어나매, 옛날부터 여러 나라에 있어 온 귀족과 토호 ( 土豪 ) 들이 많이 멸망하여 부귀 계급이 훨씬 줄고, 인구도 난리통에 많이 줄어들어 농토 부족이 근심이 없었으므로, 문제되어오던 사회 문제가 얼마 동안 잠잠하였으나, 2 백 년의 태평세월을 지나면서 인구는 크게 번식하고 거농 ( 巨農 ) 과 대상 ( 大商 ) 이 발생하여, 부자는 여러 고을의 땅을 가진 이가 있는 반면에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 사회 문제가 학자나 정치가의 사이에 다시 치열하게 논란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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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16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래서 혹은 한전의 ( 限田議 : 토지 소유를 제한하자는 의논 ) 를 내어 인민의 땅을 얼마 이내로 제한하자고 하고, 혹은 주례 ( 周禮 ) 란 글을 지어, 이것을 지나 고대에 정전제를 실행한 주공 ( 周公 ) 이란 성인이 지은 글이라고 거짓 핑계하여 당시의 제도를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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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또는 한나라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자는 의논을 내어 백성의 땅을 얼마 이내로 제한하자고 하고, 혹은 주례라는 글을 지어 이것이 지나 고대에 정전제를 실행한 주공이라는 성인이 지은 글이라고 거짓 핑계하여 당시의 제도를 반대하였다.
제5편문단 17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런데 이때에 한의 제실 ( 帝室 ) 은 쇠약해지고, 외척 ( 外戚 ) 왕씨 ( 王氏 ) 가 대대로 대사마 ( 大司馬 ) · 대장군 ( 大將軍 ) 의 직책을 가져 정권과 병권을 마음대로 하다가, 왕망이 대사마 · 대장군이 되어서는 한의 평제 ( 平帝 ) 와 유자영 ( 孺子영 ) 두 황제를 독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신 ( 新 ) 이라 하였는데, 왕망은 설로 앞에서 말한 1) 정전제의 실행 2) 한문화 ( 漢文化 ) 의 세계 통일이라는 두 가지 큰 사상을 가진 자였다. 그래서 주례 ( 周禮 ) 를 모방하여 온 지나의 정전 구획 ( 區劃 ) 에 착수하고 또 사신을 이웃 나라에 보내서 많은 재물을 임금에게 뇌물하여, 인명과 지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고치고 한문을 배우라고 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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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때 한나라의 황실은 쇠약해지고 외척 왕씨가 대대로 대사마와 대장군의 직책을 가져 정권과 병권을 마음대로 하다가, 왕망이 대사마와 대장군이 되어 한나라 평제와 유자영 두 황제를 독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신이라 하였는데, 왕망은 설로 앞에서 말한 1) 정전제의 실행 2) 한문화의 세계 통일이라는 두 가지 큰 사상을 가진 자였다. 그래서 주례를 본떠 온 지나의 정전 구획에 착수하고 또 사신을 이웃 나라에 보내 많은 재물을 임금에게 바치게 하여, 인명과 지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고치고 한문을 배우라고 꾀었다.
제5편문단 18번역 대기
원문
이보다 앞서 흉노가 남 · 북 둘로 나뉘어져서 북흉노는 지금의 몽고 북부에 웅거하여 한과 대항하였으나 남흉노는 몽고 남부에 웅거하여 한에 신복 ( 臣服 ) 하였는데, 이때에 왕망의 사신이 남흉노의 선우 ( 單于 ) 낭아지사 ( 囊牙知斯 ) 를 달래어 `두 글자 이상의 이름은 중국 문법에 어긋나니, 낭아지사란 이름을 고쳐 `지 ( 知 )'라 하고, 흉노란 `흉 ( 匈 ) '자가 순하지 못하니 `항노 ( 降奴 )'라 고치고, 선우란 `선 ( 單 )'자가 뜻이 없으니 복우중국 ( 服于中國 ) 이란 뜻으로 `복우 ( 服于 )'라 고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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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19번역 대기
원문
낭아지사가 처음엔듣지 않다가왕망의 재물을 탐내어 한이 준 흉노선우 ( 匈如單于 ) 낭아지사의 인문 ( 印文 ) 을 버리고 왕망이 새로 주는 '항노복우지 ( 降奴服于知 )'란 인문을 받았다. 그러나 왕망이 다시 생각하기를 남흉노가 관할하는 부중 ( 部衆 ) 이 너무 많으니 혹 후일에 근심이 되지 않을까 하여, 그 부중을 12 부로 나누어 열두 복우 ( 服于 ) 를 세우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낭아지사가 크게 노하여 드디어 왕망에게 대항하여 싸우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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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20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왕망이 여러 장수를 보내어 흉노를 치는데, 요동에 조서를 보내고, 고구려현 ( 高句麗縣 ) 이 군사를 징발하였다. 고구려현이란 무엇인가? 한나라 무제가 고구려국을 현으로 만들려다가 패하여 소수 ( 小水 ), 지금의 태자하 ( 太子河 ) 부근에 한 현을 두고 조선 여러 나라의 망명자 · 포로 등을 끌어모아 고구려 현이라 일컬어서, 현도군에 소속시키고, 통솔하는 장관 한 사람을 두어 고구려후 ( 高句麗候 ) 라 일컬은 것이었다. 그 고을〔縣〕 사람들이 먼 길에 출정함을 꺼리므로 강제로 정발을 행하니, 고을 사람들이 새외로 나와서 싸움터로 가지 않고 모두 도둑이 되어 약탈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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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이 여러 장수를 보내 흉노를 치고 요동에 조서를 보내었으며, 고구려현이 군사를 징발하였다. 고구려현이란 무엇인가? 한나라 무제가 고구려국을 현으로 만들려다 실패하여 소수, 지금의 태자하 부근에 한 현을 두고 조선 여러 나라의 망명자와 포로 등을 모아 고구려현이라 일컫고, 현도군에 속시키며 통솔하는 장관 한 사람을 두어 고구려후라 칭한 것이다. 그 고을 사람들이 먼 길에 나가는 것을 꺼리므로 강제로 정발을 행하니, 고을 사람들이 새외로 나와 싸움터로 가지 않고 모두 도둑이 되어 약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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