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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高句麗BC 37 – AD 668

문헌 원문 ·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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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제5편 고구려 전성 朝鮮上古史 第5篇

신채호 · 1931 · 저본 한국어 위키문헌
문단 138개 · 번역 확정 0개
제5편문단 21번역 대기
원문
왕망의 요서대윤 ( 選西大尹 ) 전담 ( 田譚 ) 이 추격하다가 패하여 죽으니, 왕망이 대장군 엄우 ( 嚴尤 ) 를 보내 그 고을의 후 ( 候 ) 추 ( 騶 ) 를 꾀어다가 목배어 장안 ( 長安 ) 으로 보내고 싸움에 크게 이겼음을 보고하니, 고구려현을 하구려현 ( 下句麗縣 ) 이라 고치고 조서를 내려 여려 장수들을 격려하여 이긴 기세를 타 조선의 여러 나라와 흉노의 여러 부족을 쳐서 한화적 ( 漢 化的 ) 시설을 재촉하였다. 이에 조선 여러 나라, 북부여 · 고구려 등의 나라가 왕망에 대항하여 공수 ( 攻守 ) 동맹을 맺고, 왕망의 변경을 자주 침노하여 왕망이 이에 대조선 · 대 흉노의 전쟁을 위해 세금을 늘리고 사람을 징발하여 전 지나가 소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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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22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래서 부유한 백성들만 왕망을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가난한사람들도 떼를지어 일어나 왕망을 토벌하므로, 왕망이 마침내 패망하고 한나라 광무제 ( 光武帝 ) 가 한나라를 중홍하였다.
번역
그래서 부유한 백성들만이 왕망에게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도 떼를 지어 일어나 왕망을 토벌했으므로, 왕망이 마침내 패망하고 한나라 광무제가 한나라를 중흥하였다.
제5편문단 23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삼국사기에는 왕망의 침입을 유류왕 ( 儒留王 ) 31 년의 일로 기록하고, 후·추를 고구려의 장수 연비 ( 延丕 ) 로 하였으나, 이는 삼국사기 의 작자가 1) 고구려 고기 ( 古記 ) 에 연대가 줄어든 공안 ( 公案 ) 이 있음을 보고 고기의 연대를 한서의 연대와 맞추고, 2) 한서의 고구려가 고구려국과 관계없는 한나라 현도군의 고구려현인 줄을 모르고, 이를 고구려국으로 잘못 알아서 한서의 본문에 그대로 초록하는 동시에, 다만 유류왕이 왕망의 장수의 손에 죽어 그 머리가 한 나라 서울 장안 에까지 갔다고 함은, 저들 사대노 ( 事大奴 ) 의 눈에도 너무 엄청난 거짓말인 듯하므로, `고구려후추 ( 高句麗候騶 )' 5 자를 `아장연비 ( 我將延丕 )'의 4 자로 고친 것이다 ( 김부식이 흐리터분한 잘못은 많으나 턱없는 거짓은 못하는 사람이니, 연비는 혹 고기의 작자가 위조한 인물인 듯도 하다.
번역
삼국사기에는 왕망의 침입을 유류왕 31년의 일로 기록하고, 후·추를 고구려의 장수 연비로 하였으나, 이는 삼국사기의 작자가 첫째) 고구려 고기에 연대가 줄어든 공안이 있음을 보고 고기의 연대를 한서의 연대와 맞추고, 둘째) 한서의 고구려가 고구려국과 관계없는 한나라 현도군의 고구려현인 줄을 모르고, 이를 고구려국으로 잘못 알아서 한서의 본문에 그대로 초록하는 동시에, 다만 유류왕이 왕망의 장수의 손에 죽어 그 머리가 한 나라 서울 장안에까지 갔다고 함은, 저들 사대노의 눈에도 너무 엄청난 거짓말인 듯하므로, '고구려후추' 5자를 '아장연비' 4자로 고친 것이다 (김부식이 흐리터분한 잘못은 많으나 턱없는 거짓은 못하는 사람이니, 연비는 혹 고기의 작자가 위조한 인물인 듯도 하다.
제5편문단 24번역 대기
원문
그러나 유류왕은 분명히 왕망보다 백여년 전 인물이고, 한서에 말한 고구려는 분명히 고구려국이 아니니, 설혹 참말로 연비 라는 사람이 있었다 할지라도 유류왕 시대 고구려 사람은 아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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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25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니 왕망은 지나의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의식있는 혁명을 행하려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웃 나라를 너무 무시하여 남의 언어 · 문자 ·종교·정치 ·풍속·생활 등 모든 역사적 배경을 묻지 않고, 한문화 ( 漢文化 ) 로 지배하려 하다가 그 반감을 불러일으켜서 얼마간의 민족적 전쟁을 일으키게 해서, 결과가 내부 개혁의 진행까지 저지하여, 그 패망의 첫째 원인을 만들었다.
번역
그러므로 왕망은 지나의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의식 있는 혁명을 행하려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웃 나라를 너무 무시하여 남의 언어, 문자, 종교, 정치, 풍속, 생활 등 모든 역사적 배경을 묻지 않고, 한문화로 지배하려 하다가 그 반감을 불러일으켜 얼마간의 민족적 전쟁을 일으키게 하여, 결과적으로 내부 개혁의 진행까지 저지하여 패망의 첫째 원인을 만들었다.
제5편문단 26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신수두'교가 비록 태고의 미신이지마는, 전해내려온 연대가 오래고 유행한 지역이 넓어서, 한나라의 유교는 이를 대적할 무기가 못 되고, 이두문이 비록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만든 것이지마는, 조선의 인명 · 지명 등 명사 ( 고대에는 모두 우리 말로 지은 명사 ) 뿐 아니라, 노래나 시나 기록이나 무엇이거나 다 이때 조선인에게는 한자보다 편리하였으므로, 한자로 이두자를 대신 할 가망이 없으니, 왕망의 한 문화적 동방 침략이 어찌 망상이 아니겠는가? 하불며 흉노의 본 이름은 `훈'인데, 구태여 `훈'을 `흉노'로 쓰는 이는 한인 ( 漢人 ) 이고, 고구려의 본 이름은 `가우리'요, 고구려 ( 高句麗 ) 는 그 이두자인데, 구태여 고구려를 구려 ( 句麗 ) 혹은 고구려 ( 高句麗 ) 로 쓰는 이도 한인이었다.
번역
신수두교가 비록 태고의 미신이기는 하나, 전해 내려온 연대가 오래고 유행한 지역이 넓어 한나라의 유교는 이를 대적할 무기가 못 되며, 이두문이 비록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만든 것이지만, 조선의 인명이나 지명 등 명사(고대에는 모두 우리말로 지은 명사)뿐 아니라 노래나 시나 기록이나 무엇이든 이때 조선인에게는 한자보다 편리하였으므로, 한자로 이두자를 대신할 가망이 없으니, 왕망의 한 문화적 동방 침략이 어찌 망상이 아니겠는가? 하불며 흉노의 본 이름은 '훈'인데, 구태여 '훈'을 '흉노'로 쓰는 이는 한인이고, 고구려의 본 이름은 '가우리'요, 고구려는 그 이두자인데, 구태여 고구려를 구려 혹은 고구려로 쓰는 이도 한인이었다.
제5편문단 27번역 대기
원문
한인의 짓도 괘씸하거늘 하물며 게다가 본명과 얼토당토않은 글자를 가져다가 `항노 ( 降奴 )'라 `하고려 ( 下高麗 )'라 함이랴 ? 왕망의 패망함이 또한 당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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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28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3.선비(鮮卑) 대(對) 고구려의 관계
번역
선비와 고구려의 관계
제5편문단 29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고구려와 한이 충돌하는 사이에 서서, 고구려를 도우면 고구려가 이기고, 한을 도우면 한이 이겨, 두 나라의 승패를 좌우하는 자가 있으니, 곧 선비라 일걷는 종족이 그것이었다.
번역
고구려와 한나라가 충돌할 때 서서, 고구려를 돕으면 고구려가 이기고, 한나라를 돕으면 한나라가 이기니, 두 나라의 승패를 좌우하는 자가 있으니, 곧 선비라 불리는 종족이었다.
제5편문단 30번역 대기
원문
선비가 조선의 서북쪽, 몽고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가, 흉노 모돈에게 패하여 그 본거 지를 잃고 내외 흥안령 ( 內外興安領 ) 부근으로 옮겨갔음은 이미 제 2 편 제 3 장에서 말하였거니와, 그 뒤에 선비가 둘로 나뉘어 하나는 그대로 선비라 일컫고, 하나는 `오환 ( 烏桓 )'의 고기를 먹고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목축과 사냥으로 생활하는 종족으로서 각기 읍락 ( 邑落 ) 을 나누어 사는데, 부족 전체를 통솔하는 대인 ( 大人 ) 이 있고, 읍락마다 부대인 ( 富大人 ) 이 있어 그 부족들은 다 그 대인이나 부대인 의 명자 ( 名子 ) 로 성을 삼으며,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젊은 사람을 존중하고, 늙은 사람을 천대하며, 문자가 없으므로 일이 있으면 나무에다 새긴 것으로 신표 ( 信標 ) 를 삼아서 무리를 모으고, 모든 분쟁은 대인에게 판결을 받아서 지는 자는 소나 양으로 배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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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3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조선이 모돈에게 패한 뒤에 선비와 오환이 다 조선에 복종하지 않고, 도리어 조선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므로 고구려 초에 유류왕이 이를 걱정하여 부분노 ( 扶芬奴 ) 의 계략을 쫓아 군사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왕이 친히 거느리고 선비국의 전면을 치고, 다른 한부대는 부분 노가 거느리고 가만히 사잇길로 하여 선비국의 후면으로 들어가서, 왕이 먼저 교전하다가 거짓 패하여 달아나니, 선비가 그 소혈 ( 巢穴 ) 을비워두고 다투어 추격하므로, 부분노가 이에 소혈을 습격 점령하고, 왕의 군사와 함께 앞뒤에서 쳐서, 드디어 선비를 항복받아 속국을 삼았다.
번역
조선이 모돈에게 패한 뒤에 선비와 오환이 모두 조선에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조선의 여러 나라를 침략했으므로 고구려 초에 유류왕이 이를 걱정하여 부분노의 계략을 쫓아 군사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왕이 친히 거느리고 선비국의 전면을 치고, 다른 한 부대는 부분노가 거느리고 가만히 사잇길로 하여 선비국의 후면으로 들어가서, 왕이 먼저 교전하다가 거짓 패하여 달아나니, 선비가 그 소혈을 비워두고 다투어 추격하므로, 부분노가 이에 소혈을 습격 점령하고, 왕의 군사와 함께 앞뒤에서 쳐서, 드디어 선비를 항복받아 속국으로 삼았다.
제5편문단 32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오환은 한의 무제 ( 武帝 ) 가 위우거 ( 衛右秉 ) 를 토멸한 뒤에 이를 불러 우북평 ( 右北平 ) · 어양 ( 뺑陽 ) · 상곡 ( 上용 ) · 안문 ( 確門 ) · 대군 ( 代那 )---지나의 서북부 지금의 직예성 ( 直匠省 ) · 산서성 ( 山西省 ) 일대에 옮겨 살게 하여 흉노의 정찰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 뒤 소재 ( 昭帝 ) 때에 오환이 날로 불어나므로, 당시 한의 집권자 곽광 ( 곽光 ) 이 훗날의 걱정거리가 될까 하여, 오환의 선조 가운데 모돈에게 패하여 죽은 참혹한 역사로써, 오환을 선동하여 모돈의 무덤을 파헤쳐 조상의 원수를 갚게 하니, 흉노의 호연제선우 ( 壺衍제單于 ) 가 크게 노하여 날랜 기병 2 만 명으로 오환을 치매 오환은 한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번역
오환은 한나라 무제가 위우거를 토벌한 뒤 그를 불러 우북평, 뺑양, 상용, 확문, 대군 등 지나의 서북부 지금의 직장성, 산서성 일대로 옮겨 살게 하여 흉노의 정찰을 맡겼다. 이후 소제 때 오환이 날로 불어나자 당시 한나라 집권자인 곽광은 훗날 걱정거리가 될까 염려하여, 오환의 선조 중 모돈에게 패해 죽었던 참혹한 역사를 빌미로 오환을 선동하여 모돈의 무덤을 파헤치게 하여 조상의 원수를 갚게 하였다. 이에 흉노의 호연제단우가 크게 노하여 날랜 기병 2만 명으로 오환을 치자 오환은 한나라에 구원군을 청하였다.
제5편문단 33번역 대기
원문
한이 3 만 군사를 내어 구원한다 일컫고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가 흉노가 물러나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오환을 습격해서 수없이 학살하여 오환이 아주 쇠약해져서 다시 한에 대항하지 못하게 되었다. 왕망의 때에 이르러서는 오환으로 하여금 흉노를 치라 하고 그 처자들을 여러 고을에 볼모로 삼고 오환을 휘몰아서 흉노를 전멸시키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하게 하니, 오환이 분하게 여겨 배반하고 달아나는 자가 많았다. 왕망이 이에 그 볼모로 한 처자를 죄다 죽이니, 그 참혹함이 또 한 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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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34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왕망이 망하고 지나가 크게 어지러워지니, 고구려의 모본왕 ( 募本王 ) 이 이를 기회로 하여, 요동을 회복하여 양평성 ( 襄平城 ) 의 이름을 고쳐 고구려의 옛 이름대로 오열흘 ( 烏列忽 ) 이라 일컫고 선비와 오환과 협력하여 자주 지나를 치니, 한의 광무제가 한을 중흥한 뒤에 요동군 ( 遼東郡 ) 을 지금의 난주 ( 難州 ) 에 옮겨 설치하고, 고구려를 막기 위하여 장군 채동 ( 蔡동 ) 으로 요동 태수를 삼았다. 그러나 채동이 자주 전쟁에 지고, 금백 ( 金帛 ) 으로 선비의 추장 ( 酋長 ) 편하 ( 偏何 ) 를 달래어 서 오환의 추장 흠지분 ( 歆志분 ) 을 살해하게 하니, 모본왕이 다시 선비와 오환을 타일러서 공동작전을 취하였다.
번역
왕망이 망하고 지나 크게 어지러워지자, 고구려의 모본왕은 이를 기회로 삼아 요동을 회복하고 양평성의 이름을 고구려의 옛 이름대로 오열흘이라 부르며 선비와 오환과 협력하여 자주 지나를 치니, 한나라 광무제가 한을 중흥한 뒤에 요동군을 지금의 난주로 옮겨 설치하고, 고구려를 막기 위해 장군 채동으로 요동 태수를 삼았다. 그러나 채동이 자주 전쟁에서 지고, 금백으로 선비의 추장 편하를 달래어 오환의 추장 흠지분을 살해하게 하니, 모본왕이 다시 선비와 오환을 규합하여 공동 작전을 취하였다.
제5편문단 35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한은 계책이 궁하여 해 마다 2 억 7 천만 전 ( 錢 ) 을 고구려 · 선비 · 오환 세 나라에 바치기로 약조하여 휴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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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는 계책이 궁하여 매년 이억칠천만 전을 고구려, 선비, 오환 세 나라에 바치기로 약속하여 휴전을 하였다.
제5편문단 36번역 대기
원문
모본왕이 한을 이기니 몹시 거만해져서, 몸이 아플 때에는 사람으로 누울 자리를 삼고, 누울 때는 사람으로 베개를 삼아서 꼼짝만 하면 그 사람을 목베어 죽여, 그렇게 죽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시신 ( 待臣 ) 두로 ( 柱魯 ) 가 왕의 베개가 되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일찍이 친구에게 울면서 그 사정을 하소연하니, 그 친구가 말하기를, “우리를 살게 하므로 우리가 임금을 위하는 것인데, 우리를 죽이는 임금이야 도리어 우리의 원수가 아닌가? 원수는 죽이는 것이 옳소.” 하였다. 이에 두로가 칼을 품었다가 왕을 죽였다. 모본왕이 죽은 뒤에 신하들이 모본왕의 태자는 못났다고 하여 폐하고 종실에서 맞아다가 세우니 이가 태조왕 ( 太祖王 )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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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37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고구려 본기가 대주류왕 이후는 확실히 연대가 줄어들었으므로 모본왕 본기 부터서야 비로소 근거할 만한 재료가 될 것이지마는, 모본왕을 대주류왕의 아들이라고 함은 그 연대가 줄어든 자취를 숨기려는 거짓 기록이다. 모본왕은 대개 대주류왕의 3 세나 혹은 4세가 됨이 옳고, 모본왕 때에 요동을 회복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태조왕 3 년 ( 기원후 55 년 ) 에 요서와 10 성을 쌓았으니, 요동은 그 전에 한 번 회복되었던 것이 명백하며, 후한서 동이열전 ( 東吏列傳 ) 에, 고구려와 선비가 우북평 ( 右北平 ) · 어양 ( 漁陽 ) · 상곡 ( 上谷 ) · 태원 ( 太原 ) 등지를 침략하다가 채동 ( 蔡동 ) 에 은혜와 믿음으로 불러다 다시 항복하였다.
번역
고구려 본기가 대주류왕 이후는 확실히 연대가 줄어들었으므로 모본왕 본기부터야 비로소 근거할 만한 재료가 될 것이지만, 모본왕을 대주류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 연대가 줄어든 자취를 숨기려는 거짓 기록이다. 모본왕은 대개 대주류왕의 셋째나 혹은 넷째가 되는 것이 옳고, 모본왕 때에 요동을 회복했다는 기록이 없다. 태조왕 3년(기원후 55년)에 요서와 열 성을 쌓았으니, 요동은 그전에 한 번 회복되었던 것이 명백하며, 후한서 동이열전(東吏列傳)에 고구려와 선비가 우북평·어양·상곡·태원 등지를 침략하다가 채동에 은혜와 믿음으로 불러들여 다시 항복하였다.
제5편문단 38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고 하였으나, 세출전 ( 歲出錢 ) 2 억 7 천만 전이 채동전 ( 蔡동傳 ) 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세공 ( 歲貢 ) 이요, 은신 ( 恩信 ) 이 아니다.
번역
고하였으나, 세출전 2억 7천만 전이 채동전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세공이며 은신이 아니다.
제5편문단 39번역 대기
원문
== 제 2 장 태조(太祖)·차(次) 양 대왕의 문치(文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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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40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1. 태조(太祖) · 차(次) 양 대왕의 세계(世系)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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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다음 양대왕의 세계상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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