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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高句麗BC 37 – AD 668

문헌 원문 ·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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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제5편 고구려 전성 朝鮮上古史 第5篇

신채호 · 1931 · 저본 한국어 위키문헌
문단 138개 · 번역 확정 0개
제5편문단 12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태조왕 때에 한이 요동을 지금의 난주 ( 난州 ) 에 옮겨다 설치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기원 169 년에 한이 요동을 회복하려고 경림 ( 耿臨 ) 으로 현도태수를 삼아서 대거하여 침입하였다. 명림답부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신대왕 앞에서 회의를 열고 싸우고 수비할 계책을 논의 하였는데 모두들 나가 싸우기를 주장했으나, 명림답부는, “우리는 군사는 적으나 험한 땅을 가졌고 한은 군사는 많으나 군량을 대기가 힘드니, 우리가 우선 수비를 하여 한의 병력을 지치게 한 뒤에 나가 싸우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길 것입니다.”고 하여 먼저 지키고 나중에 싸우기로 계책을 정하고 각 고을에 명하여 인민과 양식과 가축들을 거두어 성이나 산으로 들어가 굳게 지키게 하였다.
번역
태조왕 때 한나라가 요동을 지금의 난주로 옮겨다 설치한 것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기원 169년에 한나라가 요동을 회복하려고 경림으로 현도태수를 삼아 대규모로 침입하였다. 명림답부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신대왕 앞에서 회의를 열고 싸우고 수비할 계책을 논의하였는데 모두들 나가서 싸울 것을 주장했으나, 명림답부는 “우리에게는 군사는 적으나 험한 땅을 가졌고 한나라는 군사는 많으나 군량을 대기가 어려우니, 우리가 우선 수비를 하여 한나라 병력을 지치게 한 뒤에 나가 싸우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길 것입니다.”라고 하여 먼저 지키고 나중에 싸우기로 계책을 정하고 각 고을에 명하여 인민과 양식과 가축들을 거두어 성이나 산으로 들어가 굳게 지키게 하였다.
제5편문단 122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한의 군사가 침입한지 여러 달을 노략질했으나 , 얻는 것이 없고 싸우려고 해도 응하지 아니하므로, 양식이 떨어져서 배고프고 피로하여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명림답부가 좌원 ( 坐原 ) 까지 추격하여 한의 군사는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명림답부는 한의 침입군을 격파하자 국토를 개척하려고 먼저 선비의 이름난 왕인 단석괴 ( 檀石塊 ) 를 꾀어서 한의 유주 ( 幽州 ) · 병주 (幷州 ) 두 주 ---지금의 직예 · 산서 두 성을 침략하게 하고, 그 뒤를 이어서 고구려의 군사로 한을 치려고 하다가 그만 병이 들어 죽으니 나이 113 살이었다. 신대왕이 친히 가서 통곡을 하고 왕의 예로써 장사지냈다.
번역
한나라 군사가 침입하여 여러 달 동안 약탈했으나 얻는 것이 없고 싸우려 해도 응하지 않자, 양식이 떨어져 배고프고 피곤하여 퇴각하기 시작했다. 명림답부는 좌원까지 추격하여 한나라 군사는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했다. 명림답부는 한나라 침입군을 격파한 뒤 국토를 개척하려 먼저 선비의 이름난 왕인 단석괴를 꾀어 한나라 유주와 병주, 즉 지금의 직예와 산서 두 성을 침략하게 하고, 그 뒤를 이어 고구려 군사로 한을 치려고 하다가 병이 들어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다. 신대왕이 친히 가서 통곡하고 왕의 예로써 장사지냈다.
제5편문단 123번역 대기
원문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엔 신대왕 4 년 ( 기원후 l68 년 ) 에, “한의 현도태수 경림 ( 耿臨 ) 이 와 침범하여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으므로, 왕이 항복하여 현도에 복속하였다.”고 하고, 신대왕 5 년 ( 기원후 l69 년 ) 에, “왕이 대가 ( 大加 ) 우거와 주부 ( 主簿 ) 연인 ( 然人) 등을 보내서 요동태수 공손도 ( 公孫度 ) 를 도와 부산 ( 富山 ) 의 적을 치게 하였다. ”고 하고, 8 년 ( 기원후 172 년 ) 에, “한이 대병 ( 大兵 ) 으로 우리를 공격해왔으므로--- 명림답부가 좌원 ( 坐原 ) 까지 추격하여 이를 크게 깨뜨려 한의 군사가 하나도 돌아가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앞의 두 기록은 후한서와 삼국지에서, 뒤의 한 기록은 고기 ( 古記 ) 에서 뽑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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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124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나 조선 사략 ( 朝鮮史略 ) 에는, “신대왕 5 년에 한의 현도태수 경림이 대병으로 침략해오므로, 명림답부가 좌원 ( 坐原 ) 에서 이를 크게 격파하여 ---.”라고 하여 그 연조가 후한서의, “영제 ( 靈帝 ) 건녕 ( 建寧 ) 2 년 ( 기원 169 년 ) 에 현도태수 경림---백고 ( 伯固 ) 가 항복하였다 ( 靈帝 建寧二年玄도太守耿臨---伯固降 ).
번역
그러나 조선사략에는, "신대왕 5년에 한나라의 현도태수 경림이 대병으로 침략해오므로, 명림답부가 좌원에서 이를 크게 격파하여 ---."라고 하여 그 연조가 후한서의, "영제 건녕 2년(기원 169년)에 현도태수 경림---백고가 항복하였다"이다.
제5편문단 125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고 한 것과 부합하므로 경림의 침략군이 명림답부에게 패하였음이 분명한데, 김부식이 이것을 그릇 두 번의 사실로 나누어, 하나는 신대왕 4 년의 또 하나는 신대왕 8 년의 조항에 기록한 것이고, 공손도는 삼국지에 의하면, 한의 헌제 ( 獻帝 ) 영평 ( 永平 ) 원년에 비로소 요동태수가 되었는데, 영평 원년은 기원 l90 년이요, 신대왕 5 년에서 20 년 후이니, 신대왕이 20 년 후에 요동태수 공손도를 도울 수 없었음이 또한 분명한데,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한 김부식이 그대로 신대왕 본기 가운데 잘못 기록한 것이다.
번역
고(古)의 것과 부합하므로 경림의 침략군이 명림답부에게 패하였음이 분명한데, 김부식은 이것을 두 번의 사실로 나누어 하나는 신대왕 4년의 또 하나는 신대왕 8년의 조항에 기록했고, 공손도는 삼국지에 의하면 한나라 헌제 영평 원년에 비로소 요동태수가 되었는데, 영평 원년은 기원전 190년이고, 이는 신대왕 5년에서 20년 후이므로, 신대왕이 20년 후에 요동태수 공손도를 도울 수 없었음도 분명한데,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한 김부식이 그대로 신대왕 본기 가운데 잘못 기록한 것이다.
제5편문단 126번역 대기
원문
그러나 패해 달아나 경림을 크게 이겼다고 하고, 연대도 닿지 않는 공손도를 신대왕의 종주국으로 기록하였으니, 이런 곳에서 지나사의 거짓이 많음을 보겠거니와, 동국통감 ( 東國通鑑 ) 에는 현도태수 경림이 침략해왔다가 명림답부에게 패한 것을 신대왕 8 년의 일로 기록하여 또 조선사략과 다르다. 대개 이조 초기에는 삼한고기 ( 三韓古記 ) 해동고기 ( 海東古記 ) 등 몇 가지가 있어 삼국사기 이외에도 참고할 만한 책이 더러 있었는데, 그 고기 ( 古記 ) 들이 각각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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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127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제 6 장 을파소(乙巴素)의 업적 ==
번역
제 6 장 을파소의 공적
제5편문단 128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1.왕후(王后)의 정치 간여와 좌가려(左可慮)의 난
번역
왕후의 정치 개입과 좌가려의 난
제5편문단 129번역 대기
원문
기원후 179 년에 신대왕 ( 新大王 ) 이 죽고 고국천왕 ( 故國川王 ) 이 즉위하여서는, 왕후 우씨 ( 于氏 : 椽那于素의 딸 ) 의 뛰어난자색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왕후의 친척 어비류 ( 於卑留 ) 는 `팔치'가 되고, 좌가려 ( 左可慮 ) 는 `발치'가 되어 정권을 마음대로 하니 그 자제들이 교만하고 난폭하여 남의 아내와 딸을 빼앗아다가 첩으로 삼고, 아들과 조카들을 잡아다가 종을 만들며 남의 좋은 밭과 훌륭한 집을 빼앗아 자기네 것으로 만들어서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비방하는 자가 많았다. 왕이 이것을 알고 죄주려고 하니까, 좌가려 등이 마침내 연나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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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130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왕이 기내 ( 畿內 ) 의 군사와 말을 징집하여 이를 쳐 평정하고, 왕후 친족의 정치 간여를 징계하고, 4 부 ( 部 ) 대신에게 조서를 내려, “근자에 벼슬을 총애로써 임명하고 지위가 덕으로써 승진하지 못하여, 덕이 백성에 행해져서 왕실을 움직였으니 이는 다 내가 밝지 못한 때문이다. 너희 4 부는 각기 그 관하의 어진 사람을 천거하라.”고 하였는데, 4 부가 의논하고 동부의 안류 ( 晏留 ) 를 천거하였다.
번역
왕이 기내의 군사와 말을 징집하여 이를 쳐 평정하고, 왕후 친족의 정치 간여를 징계하며, 사부 대신에게 조서를 내려 “근자에 벼슬을 총애로써 임명하고 지위가 덕으로써 승진하지 못하여, 덕이 백성에 행해져서 왕실을 움직였으니 이는 다 내가 밝지 못한 때문이다. 너희 사부는 각기 그 관하의 어진 사람을 천거하라.”고 하니, 사부가 의논하여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였다.
제5편문단 13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2.을파소(乙巴素)의 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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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파소를 등용함
제5편문단 132번역 대기
원문
고국천왕 ( 故國川王 ) 이 안류를 써서 국정을 맡기려고 하니 안류가 자기의 재능은 큰 임무를 맡을 수 없다고 하고, 서압록곡 ( 西鴨綠谷 ) 의 처사 ( 處士 ) 을파소 (乙巴素 ) 를 처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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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133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을파소는 유류왕 때의 대선 을소 (乙素 ) 의 후손인데, 고금의 치란 ( 治亂 ) 에 밝고, 민간의 이로움과 폐단을 잘 알고 학식이 넉넉하였으나, 세상에서 알아주는 자가 없으므로 초야에서 밭갈아 살아가고 벼슬할 뜻이 없었는데, 고국천왕이 말을 낮추고 후한 예로 맞아 스승의 예로써 대접하고, 중외대부 ( 中畏大夫 ) 를 삼아 `일치 '의 작위를 더하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번역
을파소는 유류왕 때의 대선 을소의 후손으로, 옛날부터 나라가 다스려지거나 혼란스러울 때의 이치를 밝히고, 백성들의 이로움과 폐단을 잘 알고 학식이 풍부했으나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초야에서 밭을 갈며 살아가고 벼슬할 뜻이 없었다. 그런데 고국천왕이 말을 낮추어 후한 예로 맞아 스승의 예로 대접하고, 중외대부를 삼아 '일치'라는 작위를 더해주면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제5편문단 134번역 대기
원문
을파소는 자기가 받은 벼슬과 작위가 오히려 자기의 포부를 펼 수 없으므로 굳이 사양하고, 다시 다른 어질고 유능한 이를 구하여 높은 지위를 주어 큰 사업을 성취하기를 정하였다. 왕이 그의 뜻을 알고 을파소로 `신가'를 삼아서 모든 관리의 위에 있어 국정을 처리하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을파소가 초양의 한미 ( 寒微 ) 한 처사로서 하루아 침에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을 시기하여 비난이 자자하니, 왕이 조서를 내려 “만일 `신가'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일족을 멸할 것입니다.” 하고 더욱 을파소를 신임하였다. 을파소는 자기를 알아주고 크게 대우해주는 데 감격하여 지성으로 국정을 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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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135번역 대기
원문
상과 벌을 신중히 하고, 정령 ( 政令 ) 을 밝혀 나라 안이 크게 다스려져서, 고구려 9 백 년 동안 첫째가는 어진 세상으로 일컬어졌다.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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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문단 136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고국천왕 ( 혹은 國襄이라 함 ) 의 이름은 남무 ( 男武 : 혹은 伊夷謨 ) 로,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이 맏아들 발기 ( 拔奇 ) 는 불초하다고, 함께 이이모를 세워서 왕을 삼았는데, 한의 헌제 건안 초에 발기는 자기가 형으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소노가 ( 消奴加 ) 와 함께 각각 딸린 민호 ( 民戶 ) 3 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에게로 가서 항복하고 돌아와 비류수 ( 沸流水 ) 상류에서 살았다 ( 故國川王 ( 或云國襄) 諱 男武 ( 或云伊夷謨 ) 新大王伯固之第二子 伯固薨 國人以長子拔奇不肖 共立伊夷謨爲王 漢獻帝建安初 拔奇怨爲兄不得立 興消奴加各將不戶 三萬餘口 지公公孫康 還住沸流水上 ).
번역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고국천왕(혹은 국상이라 함)의 이름은 남무(혹은 이이모)로,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이 맏아들 발기는 불초하다고 여겨 함께 이이모를 세워 왕으로 삼았는데, 한나라 헌제 건안 초에 발기는 자신이 형으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와 함께 각각 딸린 민호 삼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에게 가서 항복하고 돌아와 비류수 상류에서 살았다." (고국천왕(혹은 국상)의 휘 남무(혹은 이이모),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이 맏아들 발기는 불초하다고 여겨 함께 이이모를 세워 왕으로 삼음. 한나라 헌제 건안 초에 발기는 자신이 형으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와 함께 각각 딸린 민호 삼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에게 가서 항복하고 돌아와 비류수 상류에서 삶.)
제5편문단 137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고 하였으나, 이는 김부식이 삼국지 고구려전의 본문을 그대로 떠다가 옮겨 쓴 것으로, 발기 ( 拔奇 ) 는 곧 산상왕 ( 山上王 ) 본기 ( 本紀 ) 가운데의 발기 ( 發奇 ) 요, 이이모 ( 伊夷謨 ) 는 곧 산상왕 연우 ( 延優 ) 이니, 삼국지의 작자가 발기 ( 發奇 ) · 연우 ( 延優 ) 두 사람을 신대왕의 아들로 잘못 전한 것인데, 김부식이 경솔하게 믿고 고국천왕 남무 ( 男武 ) 를 곧 이이모라 하였고, 남무를 곧 발기 ( 技奇 ) 의 아우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첫째 잘못이요, 삼국지 공손도전 ( 公孫度傳 ) 에 의하면, 공손강의 아버지 공손도가 한의 헌제 초평 원년 ( 기원후 190 년 ) 에 요동태수가 되어서 건안 9 년 ( 기원후 204년 ) 에 죽고, 공손강이 뒤를 이었는데, 한의 헌제 초평 원년은 고국천왕 12 년이니, 고국천왕 즉위 초에는 공손강은 고사하고 그 아버지 공손도도 아직 요동태수를 꿈꾸지 못한 때인데, 김부식이 이를 고국천왕 즉위 원년의 일로 기록하였으니, 이것이 두 번째 잘못이다.
번역
고하였다만, 이는 김부식이 삼국지 고구려전의 본문을 그대로 가져와 옮겨 쓴 것이니, 발기는 곧 산상왕 본기 가운데의 발기요, 이이모는 곧 산상왕 연우이니, 삼국지의 작자가 발기와 연우 두 사람을 신대왕의 아들로 잘못 전한 것이다. 김부식이 경솔하게 믿어 고국천왕 남무를 곧 이이모라 하였고, 남무를 곧 발기의 아우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첫째 잘못이다. 삼국지 공손도전에 의하면, 공손강의 아버지 공손도가 한나라 헌제 초평 원년(기원후 190년)에 요동태수가 되어 건안 9년(기원후 204년)에 죽고, 공손강이 뒤를 이었는데, 한나라 헌제 초평 원년은 고국천왕 12년이니, 고국천왕 즉위 초에는 공손강은커녕 그 아버지 공손도도 아직 요동태수를 꿈꾸지 못한 때인데, 김부식이 이를 고국천왕 즉위 원년의 일로 기록하였으니, 이것이 두 번째 잘못이다.
제5편문단 138번역 대기
원문
앞에서 말한 신대왕 5 년에, “공손도를 도와 부산 ( 副山 ) 의 적을 쳤다 ( 助---公孫度 討富山賊 ).”고 한 것과 아울러 보면, 김부식이 곧 공손도를 어느 때의 사람인 줄을 모른 듯하니 또한 기괴한 일이다.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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