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高句麗BC 37 – AD 668문헌 원문 · 번역
조선상고사 제6편 고구려 중쇠
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이것이 제 3 의 환도성이니, 태조왕 ( 太祖王 ) 때에 왕자 수성이 쌓은 제 1 환도는 아직 적국의 땅으로 되어 있고, 동천왕 ( 東川王 ) 이 쌓은 제 2 환도도 너무 적국에 가까이 있으므로, 나아가 싸우기에 편하고 물러나 지키기에 용이한 지방을 가려 서울로 하려고 이 제3의 환도성을 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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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세 번째 환도성인데, 태조왕 때 왕자 수성이 쌓은 첫 번째 환도는 아직 적국의 땅으로 되어 있고, 동천왕이 쌓은 두 번째 환도 역시 너무 적국에 가까우므로, 나아가 싸우기에 편리하고 물러나 지키기 쉬운 곳을 골라 서울로 삼고자 이 세 번째 환도성을 쌓은 것이다.
제6편번역 대기
원문
모용황은 고국원왕이 제3의 환도성에 천도하였다는 말을 듣자, 고구려가 장차 북벌할 것을 알고, 먼저 고구려에 침입하여 타격을 주는 동시에, 겉으로는 고구려를 피하여 멀리 달아날 곳을 가장하여 고구려로 하여금 방비를 소홀히 하게 하려고, 극성 ---모용한 ( 慕容翰 ) 이, “우문씨는 비록 강성하나 실로 지킬 뜻을 가졌을 뿐인데, 고구려는 그렇지 아니하여, 우리가 만일 우문씨를 쳤다가는 고구려가 우리의 뒤를 엄습할 염려가 없지 아니하니 먼저 고구려를 치는 것이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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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고구려를 치자면 두 길이 있으니 , 하나는 북치 ( 北置 ) 로부터 환도성으로 향하는 북도 ( 北道 ) 요, 또 하나는 남협 ( 南협 ) 과 목저 ( 木底 ) 로 하여 환도성으로 향하는 남도 ( 南道 ) 인데, 북도 는 평탄하고 넓으나 남도는 험하고 좁아서 고구려가 남도보다도 북도를 더 엄중히 방비할 것이니, 우리가 먼저 일부 군사를 내어 북도로 침입한다 일컫고, 가만히 대군을 내어서 남도로 공격하면 환도성을 깨뜨리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여, 황은 한의 계교를 채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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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치는 길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북치에서 환도성으로 향하는 북도이고, 또 하나는 남협과 목저로 하여 환도성으로 향하는 남도이다. 북도는 평탄하고 넓으나 남도는 험하고 좁으므로 고구려는 남도보다 북도를 더 삼엄하게 방비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일부 군사를 내어 북도로 침입한다고 하고, 가만히 대군을 내서 남도로 공격하면 환도성을 깨뜨리기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황은 한의 계교를 채용하였다.
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고국원왕은 모용황의 군사가 북도로 침입해온다는 보고를 듣자 저들의 계교를 모르고 아우 무 ( 武 ) 를 보내 5 만의 군사로 북도를 방비 하게하여, 무는 황의 장군 왕부 ( 王富 ) 를 목베고 그 군사 1만5천을 전멸 시켰으나, 왕은 적은 군사로 남도를 방어하다가 황의 대군을 만나 크게 패하여 단기 ( 單騎 ) 로 도망하니, 환도성이 드디어 적병에게 함락되어 왕태후 ( 王太后 ) 주씨 ( 周氏 ), 왕후 모씨 ( 某氏 ) 도 다 적병에게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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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은 모용황의 군사가 북도로 침입해온다는 보고를 듣자 그들의 계교를 모르고 아우 무를 보내 오만 명의 군사로 북도를 방비하게 하였다. 무는 황의 장군 왕부를 베고 그 군사 만오천을 전멸시켰으나, 왕은 적은 군사로 남도를 방어하다가 황의 대군을 만나 크게 패하여 단기로 도망하니, 환도성이 마침내 적병에게 함락되어 왕태후 주씨와 왕후 모씨마저 모두 적병에게 잡혔다.
제6편번역 대기
원문
모용황은 환도성을 얻고 다시 왕을 쫓으려다가, 황의 장군 한수 ( 韓壽 ) 가, “고구려의 왕이 비록 패해서 달아났으나, 여러 성의 구원병이 다 모여들면 넉넉히 우리 대군의 적수가 될 것이고 또 고구려의 국내에는 험한 산이 많아 추격하는 것이 위험하니, 고구려 왕의 아버지의 무덤을 파서 해골을 가지고 그 모후 ( 母后 ) 와 아내를 잡아가면, 그는 죽은 아버지와 살아 있는 어머니와 아내를 되찾기 위해 할 수 없이 항복할 것이니, 그런 다음에 은혜와 믿음으로 무마하여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면 장래 우리의 중원 ( 中原 ) 경영에 아무런 장애가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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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황이 그의 말을 쫓아 국고 ( 國庫 ) 에 들어가 역대의 문헌을 불태우고 모든 진귀한 보물과 재산을 약탈하고, 성곽과 대궐과 민가를 모조리 파괴하고, 미천왕의 능을파 그시체와 왕태후 주씨, 왕후 모씨를 싣고 돌아갔다. 적병은 비록 돌아갔으나 죽은 아버지와 생모가 적국에 잡혀갔으므로, 고국원왕은 부모를 찾아오기 위해 공손한 말과 많은 예물로 모용씨와 교제하고, 하는 수 없이 지나 대륙에 대한 경영을 포기함에 이르러 수십 년 동안 약한 나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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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이 그의 말을 쫓아 국고에 들어가 역대의 문헌을 불태우고 모든 진귀한 보물과 재산을 약탈했으며, 성곽과 궁실과 민가를 모조리 파괴하고, 미천왕의 능을 파 그 시체와 왕태후 주씨, 왕후 모씨를 싣고 돌아갔다. 적병은 비록 돌아갔으나 죽은 아버지와 생모가 적국에 잡혀갔으므로, 고국원왕은 부모를 찾아오기 위해 공손한 말과 많은 예물로 모용씨와 교제하고, 하는 수 없이 지나 대륙에 대한 경영을 포기함에 이르러 수십 년 동안 약한 나라가 되었다.
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환도성의 세 번의 천도는 고구려 상대 ( 上代 ) 의 성쇠의 역사를 충분히 설명해주는 것이니, 태조왕 때에 왕자 수성 ( 遂成 : 뒤의 次大王 ) 이 요동을 점령하고 제1의 환도성을 지금의 개평 부근에 처음으로 쌓던 때가 고구려의 가장 강성한 때이고, 발기가 모반하여 요동을 들어 공손씨에게 항복하므로 산상왕 ( 山上王 ) 이 제2의 환도성을 지금의 환인현 부근에 옮겨 쌓았다가 이것까지 위의 장수 관구검에게 파괴당하려 하던 때가 고구려의 쇠퇴해진 시기이고, 미천왕이 선비를 구축하여 낙랑 · 현도 · 요동 등 군을 차례로 회복하여 중흥의 실적을 올리다가 중도에 죽고, 고국원왕이 왕위를 이어가지고 제3의 환도성을 지금의 집안현 부근에 다시 쌓았다가 또 모용황에게 파괴당하니, 이때는 고구려의 가장 쇠미해진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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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의 세 번의 천도는 고구려 상대(上代)의 성쇠 역사를 충분히 설명해주는데, 태조왕 때 왕자 수성(次大王)이 요동을 점령하고 제1의 환도성을 지금 개평 부근에 처음 쌓던 때가 고구려가 가장 강성했던 시기이고, 발기가 모반하여 요동을 들어 공손씨에게 항복하므로 산상왕이 제2의 환도성을 지금 환인현 부근으로 옮겨 쌓았으나 이것마저 위의 장수 관구검에게 파괴당하려 하던 때가 고구려가 쇠퇴했던 시기이며, 미천왕이 선비를 구축하여 낙랑·현도·요동 등 군을 차례로 회복하며 중흥의 실적을 올리다가 도중에 죽고, 고국원왕이 왕위를 이어받아 제3의 환도성을 지금 집안현 부근에 다시 쌓았으나 또 모용황에게 파괴당하니, 이때는 고구려가 가장 쇠미했던 시기였다.
제6편번역 대기
원문
삼국사기에는 비록 이러한 관계를 자세히 서술하지 못하였으나, 본기 ( 本紀 ) 의 지리를 자세히 고찰해보면 그 대강을 얻을 수 있고 삼국지 ( 三國志 ) 에 이이모 ( 伊夷謨 ) 가 다시 새 나라를 만들었다고 한 것은 곧 제 2 의 환도성 신축을 가리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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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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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기록은 조선사략 ( 朝蘇史略 ) 과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을 뽑아 기록한 것이어니와, 진서 ( 晉書 ) 는 이미 대략 말한 바와 같이 당태종이 고구려를 헐뜯고 욕하기 위해 허다한 사실 아닌 기사를 거짓으로 만든 것이 많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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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기록은 조선사략과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을 뽑아 기록한 것이며, 진서는 이미 대략 말한 바와 같이 당태종이 고구려를 헐뜯고 욕하기 위해 허다한 사실 아닌 기사를 거짓으로 만든 글이다.
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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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위의 기사도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아니 하니, 예를 들면 모용황이 미천왕의 무덤을 파갔다고 하였으나, 미천왕 때의 고구려 서울은 평양이었고, 미천왕이 돌아간지 12 년만에 고국원왕이 환도성에 천도하였으니, 고구려 역대의 왕릉은 다 당시 왕도 ( 王都 ) 부근에 있었으므로, 미천왕은 돌아간 뒤에 반드시 평양에 묻혔을 것이고 환도성에 묻히지 않았을 것인데, 환도성을 침략한 모용황이 어찌 평양에 묻힌 미천왕의 능을 파갈 수 있으랴? 그러므로 미천왕의 능을 파갔다는 말이 극히 의심스러운 동시에, 그 이하에 기록 된 왕태후와 왕후를 잡아갔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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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위의 기사에는 의심할 점이 없지 않으니, 예를 들면 모용황이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쳤다고 하였으나, 미천왕 때의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이었고, 미천왕이 돌아간 지 12년 만에 고국원왕이 환도성에 천도하였으니, 고구려 역대의 왕릉은 모두 당시 왕도 부근에 있었으므로, 미천왕은 돌아가신 뒤 반드시 평양에 묻혔을 것이고 환도성에 묻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모용황이 환도성을 침략했을 때 어찌 평양에 묻힌 미천왕의 능을 파헤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미천왕의 능을 파헤쳤다는 말은 매우 의심스러우며, 그 이하에 기록된 왕태후와 왕후를 잡아갔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제6편번역 대기
원문
다만 이 뒤에 고구려가 30 여 년 동안 곧 모용씨가 멸망하기 이전에는 다시 지나 대륙을 경영하지 못했음을 보면 모용씨에게 크게 패하여 불리한 조건의 조약을 맺은 사실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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