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高句麗BC 37 – AD 668문헌 원문 · 번역
조선상고사 제6편 고구려 중쇠
제6편번역 대기
원문
” 그러나 왕은, “임금은 백성이 우러러보는 것이니 임금이 사는 대궐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백성이 무엇을 우려러보겠소? '신가'는 백성을 위해 명예를 구하지 마오. 죽지 않으려거든 다시 말하지 마오.” 하였다. 창조리는 봉상왕이 잘못을 고치지 않을 줄을 깨닫고, 동지들과 비밀히 의논하여 왕을 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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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봉상왕(烽上王)의 폐위와 미천왕(美川王)의 즉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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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상왕이 폐위되고 미천왕이 즉위하였다.
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봉상왕은 처음에 그 숙부 달가를 죽이고, 또 그 아우 돌고 ( 돌固 ) 를 의심하여 죽였는데, 돌고의 아들 을불 ( 乙弗 ) 이 화가 자기에게 미칠 줄 알고 달아났다. 봉상왕은 그 뒤에 여러번 을불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을불은 도망하여 성명을 갈고 몸을 팔아, 수실촌 ( 水室村 ) 사람 음뢰 ( 陰牢 ) 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데, 음뢰가 일을 매우 고되게 시켜, 낮이면 나무하고 밤이면 쉴 사이 없이 그 집 문앞늪에 돌을 던져 개구리를 울지 못하게 해서, 그 집 식구들이 편안히 자게 하였다. 을불이 견디다 못하여 1년만에 또 도망하여 동촌 ( 東村 ) 사람 재모 ( 再牟 ) 와 함께 소금장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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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상왕은 처음에 숙부 달가를 죽이고, 또 아우 돌고를 의심하여 죽였는데, 돌고의 아들 을불이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알고 도망쳤다. 봉상왕은 그 뒤에 여러 번 을불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을불은 도망하여 성명을 갈고 몸을 팔아, 수실촌 음뢰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데, 음뢰가 일을 매우 고되게 시켜 낮에는 나무하고 밤에는 쉴 사이 없이 그 집 문앞 늪에 돌을 던져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하여, 그 집 식구들이 편안히 자게 하였다. 을불이 견디다 못하여 1년 만에 또 도망하여 동촌 재모와 함께 소금장사를 하였다.
제6편번역 대기
원문
소금을 사서 배편으로 압록강으로 들여와 소금짐을 강동 ( 江東 ) 사수촌 ( 思收村 ) 사람의 집에 부려놓았다. 그 집 노파가 공짜로 소금을 달라고 하므로 1 말쯤이나 주었는데도, 노파는 마음에 차지 않아 더 달라고 보채었다. 을불이 주지 않았더니 노파는 도리어 꽁한 마음을 먹고, 해치려고 소금점 속에다가 몰래 신 한 컬레를 묻어놓았다가, 을불이 그 집을 떠나오자 뒤쫓아와서 소금을 뒤져 신을 찾고, 을불 등 두 사람을 절도로 몰아 압록재 ( 鴨綠宰 ) 에게 고소하여, 을불은 태형 ( 笞刑) 을 맞고, 소금은 빼앗아 노파에게 준다는 판결이 내렸다. 을불은 이에 소금장사도 할 수 없고 머슴살이 할 곳도 얻을 수가 없어서, 숱한 마을 온갖 동네로 돌아다니면서 걸식하여 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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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옷은 너덜너덜 찢어지고 얼굴을 보기에도 무섭게 파리하여 아무도 옛날의 왕손 ( 王孫 ) 인가 하는 의심을 갖지 아니하였다. 이때 '신가' 창조리 ( 倉助利 ) 등이 봉상왕을 폐하면, 임금 될 인재로나 차례로나 모두 을불이 가장 합당하다고 하여, 북부 ( 北部 ) 의 '살이 ' 조불 ( 祖弗 ) 과 동부 ( 東部 ) 의 '살이' 소우 ( 蕭友 ) 등으로 하여금 을볼을 찾게 하였다. 그들은 비류수에 이르러 을불을 만났다. 소우가 을불의 어릴 때 모습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나아가 절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지금 임금이 무도하므로 '신가' 이하 여러 대신들이 외논하여 지금 임금을 폐하고 왕손 ( 王孫 ) 을 세우려고 하여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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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은 너덜너덜 찢기고 얼굴을 보기에도 무섭게 파리하여 아무도 옛날의 왕손인 줄 의심하지 않았다. 이때 '신가' 창조리 등이 봉상왕을 폐하자, 임금이 될 인재로나 차례로나 모두 을불이 가장 합당하다고 하여, 북부의 '살이' 조불과 동부의 '살이' 소우 등으로 하여금 을불을 찾게 하였다. 그들은 비류수에 이르러 을불을 만났다. 소우가 을불의 어릴 때 모습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나아가 절하고 가만히 말했다. "지금 임금이 무도하므로 '신가' 이하 여러 대신들이 외논하여 지금 임금을 폐하고 왕손을 세우려고 찾아왔습니다."
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그리고 다시, “지금 임금이 인심을 잃어 나라가 위태로우므로 여러 신하들이, 왕손이 품행이 단정하시고 성격이 인자하시어 조상의 업을 이을 만하다고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니 왕손은 의심치 마십시오. ” 하고 데리고 돌아와 창조리의 동지 조맥남 ( 鳥陌南 ) 의 집에 숨겨두었다. 가을 9월에 창조리가 봉상왕을 따라 후산 ( 候山 ) 에 가서 사냥을 하다가, 갈대잎을 따서 갓에 꽂고 외쳤다. “나를 좋으려는 이는 나와 같이 갈 대잎을 따서 갓에 꽂으시오.” 하니 모든 사람이 다 창조리의 뜻을 알고 일제히 갈대잎을 갓에 꽂았다. 이에 창조리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봉상왕을 폐하여 딴 방에 가두니, 왕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스스로 깨닫고 그 아들 형제와 함께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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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지금 임금이 백성의 마음을 잃어 나라가 위태로우니 여러 신하들이, 왕손이 품행이 단정하고 성격이 인자하여 조상의 업을 이을 만하다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니 왕손은 의심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며 데리고 돌아와 창조리의 동지인 조맥남의 집에 숨겨두었다. 가을 9월에 창조리가 봉상왕을 따라 후산에 가서 사냥을 하다가, 갈대잎을 따서 갓에 꽂고 외쳤다. "나를 좋게 여기는 이는 나와 같이 갈대잎을 따서 갓에 꽂으시오." 하니 모든 사람이 다 창조리의 뜻을 알고 일제히 갈대잎을 갓에 꽂았다. 이에 창조리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봉상왕을 폐하여 다른 방에 가두니, 왕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스스로 깨닫고 그 아들 형제와 함께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제6편번역 대기
원문
을불이 왕위에 오르니 곧 미천왕 ( 美川王 )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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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미천왕(美川王)의 요동(遼東) 전승과 선비(鮮卑) 몰아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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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왕이 요동 지역을 차지하고 선비를 쫓아냈다.
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기원후 197 년 발기가 반란을 일으키고 부터 기원후 370년경인 고국원왕 ( 故國原王 ) 말년까지는 곧 고구려의 중엽 시대인데, 미천왕의 일대는 이 중쇠 ( 中衰 ) 시대 중에서 가장 왕성한 때이다 . 저자가 일찍이 환인현 ( 桓仁縣 ) 에 머물러 있을 때, 그 지방의 문사 왕자평 ( 王子平 : 본래 만주인 ) 의 말을 들으니, “고구려의 고대에 '우굴로'란 대왕이 있었는데, 그가 아직 왕이 되기 전에 불우하여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걸식을 할 때 가죽으로 신을 만들어 신었으므로, 지금도 만주에서 가죽신은 '우굴로 ( 우굴로는 만주 노동자의 신 ) '라 함은 그 대왕의 이름으로 이름 지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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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197년에 발기가 반란을 일으키고부터 기원후 370년경인 고국원왕 말년까지는 곧 고구려 중엽 시대인데, 미천왕의 일대는 이 중쇠 시대 중에서 가장 왕성한 때이다. 저자가 일찍이 환인현에 머물러 있을 때, 그 지방의 문사 왕자평(본래 만주인)의 말을 들으니, "고구려 고대에 '우굴로'라는 대왕이 있었는데, 그가 아직 왕이 되기 전에 불우하여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걸식을 할 때 가죽으로 신을 만들어 신었으므로, 지금도 만주에서 가죽신은 '우굴로'(우굴로는 만주 노동자의 신)라 함은 그 대왕의 이름으로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제6편번역 대기
원문
그 대왕이 그렇게 걸식하도록 곤궁하였지마는, 늘 요동을 되찾을 생각을 가지고 있어 요동 각지를 돌아다닐 때, 산과 내의 험하고 평탄한 것, 길의 멀고 가까운 것을 알기 위해 풀씨를 가지고 다니면서 길가에 뿌려 그 지나간 길을 기억했으므로, 지금 요동 각지의 길가에 '우굴로'란 풀이 많습니다.”고 하였다. '우굴로'가 을불과 음이 같고 또 고구려 제왕 중에 초년에 걸식한 이가 을불뿐이니 '우굴로'는 아마 미천왕 을불이 한미할 때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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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번역 대기
원문
미천왕은 기원후 300년부터 331년까지 무릇 31년 동안을 왕위에 있은 제왕이고, 그 31년 동안의 역사가 곧 선비 모용씨와 혈전한 역사다. 간략하고 허술한 고구려 본기와 허황하고 과장된 진서 ( 晉書 ) 를 합하여 그 진실에 가까운 것을 뽑아 왕의 역사를 서술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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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l) 현토(玄토)의 회복 ---왕자 수성이 회복한 요동이 연우왕 때에 또 한의 소유가 되었음은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미천왕이 즉위하고는 그 제 2 년에 곧 현도성을 격파하여 8천여 명을 포로로 하여 평양으로 옮기고, 16년에 현도성을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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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토의 회복은 왕자 수성이 회복한 요동이 연우왕 때에 또 한나라의 소유가 되었음은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미천왕이 즉위하고는 그 2년에 곧 현도성을 격파하여 8천여 명을 포로로 하여 평양으로 옮기고, 16년에 현도성을 점령하였다.
제6편번역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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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낙랑(樂浪)의 회복---낙랑도 또한 한나라 무제 ( 武帝 ) 4 군 ( 郡 ) 의 하나 로서 대대로 드리없이 옮겨졌지만, 대개 역시 요동 땅에 가설 ( 假說 ) 한 것이고, 평양의 낙랑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동천왕 ( 東川 王 ) 본기에, 위군 ( 魏軍 ) 이 낙랑으로 불러 갔을 때 동천왕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동천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도 위 · 진 ( 魏晉 ) 의 태수는 여전히 존재하였으니, 만일 지나의 낙랑이 곧 조선의 평양---남낙랑이라 한다면 이는 평양이 고구려의 왕도인 동시에 또 지나 낙랑군의 군치 ( 君治 ) 가 되는 것이니, 천하에 어찌 이같이 모순 당착 ( 撞着 ) 되는 역사적 사실이 있으랴? 미천왕의 낙랑 점령은 그 재위 l4년, 기원후 313 년의 일이니, 진 ( 晉 ) 사람 장통 ( 張統 ) 이 낙랑 · 대방 두 군 ( 대방도 요동의 假設郡이요, 長湍 혹은 鳳山의 帶方國이 아념 ) 에 웅거하고 있었으므로 왕이 이를 공격하니, 장통이 항거할 힘이 없어 모용외의 부하 장수 낙랑왕 모용준 ( 幕容遵 ) 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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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번역 대기
원문
그러나 모용준은 그를 구원하러 갔다가 패하여, 마침내 장통을 꾀어 백성 1 천여 집을 몰아가지고 모용외에게 투항하여, 모용외는 유성 ( 柳城 ) --- 지금의 금주 ( 錦州 ) 등지에 또 낙랑군을 가설하여 장통으로 태수를 삼았으니 이제 요동의 낙랑은 고구려의 차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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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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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요동에서의 전승 ---요동의 군치는 양평 ( 襄平 ), 다시 말하여 지금의 요양 ( 遼陽 ) 이니, 진서 ( 晉書 ) 에 의하면, “미천왕 ( 美川王 ) 이 요동을 공격하다가 자주 패하고 물러나고 도리어 맹약을 청하였다.”고 하였으나 양서 ( 梁書 ) 에는 “을불 ( 乙佛美川王 ) 이 자주 요동을 침범하되 모용외가 제어하지 못하였다 ( 乙佛頻寇遼東 團不能制 ). ”고 하여 모용외가 늘 미천왕에게 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두 책이 서로 모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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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의 군치는 양평(襄平)이며, 다시 말해 지금의 요양이다. 진서에 의하면, "미천왕이 요동을 공격하다가 자주 패하고 물러나 오히려 맹약을 청하였다"고 하였으나, 양서에는 "을불 미천왕이 자주 요동을 침범했으나 모용외가 제어하지 못했다"고 하여, 모용외가 늘 미천왕에게 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두 책이 서로 모순된다.
제6편번역 대기
원문
그러나 진서는 당태종이 지은 것이고, 당태종은 요동이 아무쪼록 지나의 요동임을 거짓 증명하여, 저희 나라 신하와 백성들을 고무해서, 고구려의 요동에 대한 전쟁열을 일으키려 하여, 전대의 역사책인 사기 ( 史記 ), 한서 ( 漢書 ), 후한서 ( 後漢書 ), 삼국지 ( 三國志 ) 등에 기록되어 있는 조선 열국 ( 列國 ), 그 중에서도 특히 고구려에 관계되는 문구를 많이 고쳤으니, 하물며 그 자신이 지은 진서 ( 晉書 ) 에서야 더 말할 나위 있으랴. 그러니 양서 ( 梁書 ) 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도리어 진실하고, 현도와 낙랑이 이미 차례로 정복되었으니 겨우 몇 현 ( 縣 ) 밖에 남지 않은 요동도 고구려에게 되돌아왔을 것이지마는, 아직 충분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만하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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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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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극성(棘城) 전쟁 --- 기원후 320년에 미천왕이 선비의 우문씨 ( 宇文氏 ) 와 단씨 ( 段氏 ) 와 진 ( 晉 ) 의 평주자사 ( 平州刺史 ) 최비 ( 崔毖 ) 와 함께 연합하여서 모용외의 서울 극성으로 쳐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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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성(棘城) 전쟁 --- 기원후 320년에 미천왕이 선비의 우문씨와 단씨, 그리고 진나라의 평주자사 최비와 연합하여 모용외의 서울 극성으로 쳐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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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모용외가 네 나라의 사이를 이간시키므로 미천왕과 단씨는 물러나고, 우문씨와 최비가 모용외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서 최비는 고구려에 투항하고 고구려 장수 여노자가 하성 ( 하城 ) 에 웅거해 있다가 모용외가 장수 장통에게 패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진서 ( 晉書 ) 에 전해진 것으로서 거의 사실인 듯하며, 여노자는 고노자 ( 高奴子 ) 의 잘못인 듯하나, 고노자는 모용외를 여러번 격파한 명장이니 이제 장통에게 붙잡혔다는 말이 자못 의심스럽고, 또한 고노자가 봉상왕 5 년 이후에는 다시 본기 ( 本紀 ) 에 보이지 아니하니 그 동안에 이미 죽었을 것인데, 근 40년만에 갑자기 나타난 것도 매우 의심스럽다. 아마도 거짓 기록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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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외가 네 나라 사이를 이간시키자 미천왕과 단씨는 물러났고, 우문씨와 최비가 모용외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최비는 고구려에 투항했으며, 고구려 장수 여노자가 하성에 머물다가 모용외가 장수 장통에게 패했다고 하는데, 이는 진서에 전해진 것으로 거의 사실인 듯하다. 다만 여노자는 고노자의 잘못인 듯하나, 고노자는 모용외를 여러 번 격파한 명장이니 이제 장통에게 붙잡혔다는 말은 매우 의심스럽고, 또한 고노자가 봉상왕 5년 이후에는 다시 본기에 보이지 않으니 그동안 이미 죽었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근 40년 만에 갑자기 나타난 것도 매우 의심스럽다. 아마도 거짓 기록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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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 환도(丸都) - 지금의 집안현(輯安縣) 홍석정자산(紅石頂子山)의 함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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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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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331년에 미천왕이 죽고 고국원왕 쇠 ( 釗 ) 가 왕위를 이었다. 이 듬해 3년에 모용외도 죽고 그의 세자 황 ( 皇+光 ) 이 왕위를 이었다. 고국원왕은 그 야심은 미천왕보다 더했으나 재략이 그에 미치지 못했고, 모용황은 그 야심과 재략이 아버지 외보다 뛰어난 효웅일 뿐더러, 그의 서형 ( 庶兄 ) 한 ( 翰 ) 과 그의 두 아들 준 ( 儁 ) 과 각 ( 恪 ) 등이 다 절세의 기재 ( 奇才 ) 였다. 고국원왕이 평양의 서울을 서북 ( 西北 ) 경영에 불편하다 하여 지금의 집안현 홍석정자산 ( 紅石頂子山 ) 위에 새로 환도성을 쌓아 서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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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331년에 미천왕이 죽고 고국원왕 쇠(釗)가 왕위를 이었다. 이듬해 3년에 모용외도가 죽고 그의 세자 황(皇+光)이 왕위를 이었다. 고국원왕은 그 야심은 미천왕보다 더했으나 재략이 그에 미치지 못했고, 모용황은 그 야심과 재략이 아버지 외보다 뛰어난 효웅일 뿐더러, 그의 서형 한(翰)과 그의 두 아들 준(儁)과 각(恪) 등이 모두 절세의 기재였다. 고국원왕이 평양의 서울을 서북 경영에 불편하다 하여 지금의 집안현 홍석정자산 위에 새로 환도성을 쌓아 서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