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高句麗BC 37 – AD 668문헌 원문 · 번역
조선상고사 제6편 고구려 중쇠
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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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 장 고구려 대(對) 선비(鮮卑)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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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고구려와 선비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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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비(鮮卑) 모용씨(慕容氏)의 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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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족 모용씨의 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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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가 늘 고구려에 복속하여, 비록 단석괴 ( 檀石槐 ) 의 용맹으로도 오히려 명림답부의 절제를 받다가, 고구려가 발기의 난을 지나 요동을 잃어버리고 나라의 형세가 약해지니, 선비가 드디어 배반하여 한에가 붙었다. 한말에 원소 ( 袁紹 ) 와조조가 서로 맞섰을때 선비와오환이 원소에게 붙었다가 원소가 망하니, 기원 207년에 조조가 7월의 장마를 기회하여 노룡새 ( 盧龍塞 ) 5백 리를 몰래 나와서, 선비와 오환을 불시에 공격하여 그 소굴을 파괴하였다. 오환은 마침내 망하고 선비는 그 뒤에 가비능 ( 軻比能 ) 이라는 이가 있어 다시 강대해져서 자주 한의 유주 ( 幽州 ) 와 병주 ( 幷州 ) 를 침략하였는데 한의 유주 자사 왕웅 ( 王雄 ) 이 자객을 보내 가비능을 암살하였으므로 선비는 다시 쇠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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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250년경에 선비가 우문씨 ( 宇文氏 ) · 모용씨 ( 幕容氏 ) · 단씨 ( 段氏 ) · 척발씨 ( 拓跋氏 ) 의 네 부로 나뉘어 서로 자웅을 다투더니, 모용씨에 모용외 ( 慕容외 ) 란 자가 있어 용감하고 꾀가 뛰어나 부족이 가장 강성해졌는데 창려 ( 昌黎 ) 태극성 ( 太棘城 )---지금의 동몽고 땅 특묵우익 ( 特默右翼 ) 의 부근을 근거지로 삼아서 사방으로 노략질을 하였다. 이때에 지나의 위 · 오 · 촉 세 나라가 다 망하고 진 ( 晉 ) 의 사마씨 ( 司馬氏 ) 가 지나를 통일하였으나 자주 모용외에게 패하여 요서 일대가 소란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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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250년경에 선비가 우문씨, 모용씨, 단씨, 척발씨 네 부족으로 나뉘어 서로 세력을 다투었는데, 모용씨 중에 모용외라는 자가 있어 용감하고 지혜로워져 부족이 가장 강성해졌다. 그는 창려 태극성, 즉 지금의 동몽고 땅 특묵우익 부근을 근거지로 삼아 사방으로 약탈하였다. 이때 지나의 위, 오, 촉 세 나라가 모두 망하고 진의 사마씨가 지나를 통일하였으나 자주 모용외에게 패하여 요서 일대가 평온한 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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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이 왕왕 모용씨가 웅거한 창려를 지금의 난주 부근이라고 하지마는, 진서 ( 晉書 ) 의 무제 ( 武帝 ) 본기에, “모용외가 여창을 침노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위의 창려 지금의 난주가 진 ( 晉 ) 의 창려가 아님이 분명하니, 곧 나중의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 ( 募容황 ) 이 서울한 용성 ( 龍城 ) 과는 멀지 아니한 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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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들이 왕왕 모용씨가 거주했던 창려를 지금의 난주 부근이라고 말하지만, 진서(晉書) 무제 본기에 "모용외가 여창을 침노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위쪽의 창려는 지금의 난주가 아니라 진나라의 창려였음이 분명하니, 곧 나중 모용외의 아들인 모용황이 서울한 용성과 멀지 않은 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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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부여(北扶餘)의 파괴와 의려왕(依慮王)의 자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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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는 제3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 여러 나라의 문화 원천의 나라였다. 그러나 신라 · 고구려 이래로 압록강 이북을 잃고는 드디어 북부여를 조선의 영역 밖의 나라라 하여 그 역사를 정리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해모수왕 이후로 그 치란 ( 治亂 ) 과 성쇠를 알 수 없거니와, 다행히 지나의 역사가들이 저희의 정치적으로 관계된 사실을 몇 마디나마 기록하였으므로, 그 대강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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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는 제3편에서 언급했듯이 여러 나라 문화의 원천이 되는 나라인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와 고구려 이후로 압록강 이북 지역을 잃은 뒤로는 북부여를 조선 영역 밖에 있는 나라로 간주하여 그 역사를 정리하지 않았기에, 해모수왕 이후의 치세와 흥망성쇠를 알 수 없으나, 다행히 지나의 역사학자들이 우리와 정치적으로 관련된 사실을 몇 가지 기록해 두었으므로 대략적인 내용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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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 後漢 ) 안제 ( 安帝 ) 의 영초 ( 永初 ) 5년, 기원후 112년에 부여왕 ( 이름은 모름 ) 이 보병과 기병 7,8천 명을 거느리고 한의 낙랑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역사에 보인 북부여의 외국에 대한 용병의 시초일 것이요, 연광 ( 延光 ) 원년, 기원후 121년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 ( 尉仇台 ) 를 보내 한의 군사와 힘을 합하여 고구려 · 마한〔百濟〕· 예 · 읍루 ( 읍婁 ) 등을 격파하였다고 했으나, 이듬해 한이 차대왕에게 화의를 청하고 배상으로 비단을 바친것을 보면 북부여와 한이 고구려를 격파하였다는 것은 거짓 기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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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안제 영초 5년(기원후 112년)에 부여왕(이름은 모름)이 보병과 기병 7,8천 명을 거느리고 한의 낙랑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역사에 나타난 북부여가 외국에 대한 용병의 시초일 것이며, 연광 원년(기원후 121년)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보내 한의 군사와 힘을 합하여 고구려·마한(백제)·예·읍루 등을 격파하였다고 했으나, 이듬해 한이 차대왕에게 화의를 청하고 배상으로 비단을 바친 것을 보면 북부여와 한이 고구려를 격파했다는 것은 거짓 기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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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136 년에 위구태가 왕이 되어 2만의 기병으로 한의 현도군을 습격하고 그 뒤 공손도가 요동왕이 되어서는 부여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종실 ( 宗室 ) 의 딸로 아내를 삼아서 고구려와 선비에 대한 공수 동맹을 맺었으니, 위구태왕은 마치 고구려의 차대왕처럼 가장 상무 ( 尙武 ) 한 임금이고, 또 그가 왕위에 있던 동안이 해모수 이후 북부여의 유일한 전성시대일 것이다. 위구태왕의 뒤에 간위거왕 ( 簡位居王 )에 이르러서는 적자가 없이 마여 ( 麻餘 ) 가 즉위하였는데, 오가 ( 五加 ) 중의 우가 ( 牛加 : 이름은 모름 ) 가 반역할 마음을 품었으나, 우가의 형의 아들은 왕실에 충성되고 나라 일에 부지런하고 나라 사람들에게 재물을 잘 베풀어주어 인심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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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부자가 모반하니 위거가 이를 잡아 죽이고 그 재산을 압수하고, 마여왕이 죽으니 위거가 마여왕의 아들 의려 ( 依慮 ), 겨우 6살 난 어린아이를 세워 보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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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거가 죽고 의려가 왕위에 오른지 41년만에 국방이 소홀해졌는데, 드디어 선비 모용외가 이를 정탐해 알고 무리를 이끌고 북부여와 서울 아사달에 침입하기에 이르렀다. 모용외가 침입하니 의려왕은 수비가 허약하여 막아내지 못할 줄 알고 칼을 빼어 자살해서 나라를 망친 죄를 국민에게 사과하고, 유서로 태자 의라 ( 依羅 ) 에게 왕위를 전하여 나라의 회복에 힘쓰게 하였다. 의려왕이 국방을 힘쓰지 못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한 죄는 없지 아니하나, 그러나 항복하느니 보다 차라리 죽으리라는 의기 ( 義氣 ) 를 가져 조선의 역사상 처음으로 순국한 왕이 되어 피로써 뒷사람의 기억에 남겼으니, 어찌 성하 ( 城下 ) 의 맹세를 맺어 구차스럽게 생명을 보전하려는 용렬한 임금에 비할 바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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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거가 죽고 의려가 왕위에 오른 지 41년 만에 국방이 소홀해졌는데, 마침내 선비 모용외가 이를 정탐하여 알고 무리를 이끌고 북부여와 서울 아사달에 침입하기에 이르렀다. 모용외가 침입하자 의려왕은 수비가 허약하여 막아내지 못할 것을 알고 칼을 빼어 자살하며 나라를 망친 죄를 국민에게 사과하고, 유서로 태자 의라(依羅)에게 왕위를 전하여 나라의 회복에 힘쓰게 하였다. 의려왕이 국방을 힘쓰지 못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한 죄는 없지 아니하나, 그러나 항복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으리라는 의기를 가져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순국한 왕이 되어 피로써 후대의 기억에 남겼으니, 어찌 성하의 맹세를 맺어 구차하게 생명을 보전하려는 용렬한 임금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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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려왕이 자살하니 의라가 서갈사나 ( 西曷思那 ) ---지금 개원 ( 開原 ) 부근의 숲속으로 달아나 결사대를 모집해 선비의 군사를 쳐 물리치고, 험한 곳을 지켜 새 나라를 세웠다. 아사달은 왕검 이래 수천 년 문황의 고도로써 역대의 진귀한 보물뿐 아니라 문헌도 많아, 신지 ( 神誌 ) 의 역사며, 이두문으로 적은 풍월 등이 있었고 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우를 가르쳤다고 하는 금간옥첩 ( 金簡玉牒 ) 에 쓴 글도 있었는데, 모두 선비의 만병 ( 蠻兵 ) 에 의해 타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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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예란(濊亂) 토평(討平)과 명장 달가(達賈)의 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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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예란을 토벌하고 명장 달가를 참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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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가 북부여에 침입하기 6년 전인 기원후 280년에 고구려는 예 ( 濊 : 本紀의 蕭愼 ) 의 반란이 있었다. 예는 원래 수렵시대의 야만족으로서, 처음에는 북부여에 복속해 있었는데, 북부여가 조세를 과중하게 받자 배반하고 고구려에 가 붙었다가, 고구려가 요동을 잃고 나라의 형세가 쇠약해지자 드디어 반란을 일으켜 국경을 침입하여 수없이 인민을 죽이고 가축을 약탈하였다. 서천왕 ( 西川王 ) 이 크게 걱정하고 장수될 인재를 구하니, 여러 신하들이 왕의 아우 달가 ( 達賈 ) 를 추천하였다. 달가는 기묘한 계교로 예의 소굴을 습격하여 그 추장과 6,7 백 집을 포로로 하여 부여 남쪽의 오천 ( 烏川 ) 으로 옮기고 그 여러 부락의 항복을 받으니, 서천왕이 달가를 안국군 ( 安國君 ) 에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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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가 북부여에 침입하기 6년 전인 기원후 280년에 고구려에는 예(本紀의 소신)의 반란이 있었다. 예는 본래 수렵시대의 야만족으로, 처음에는 북부여에 복속되어 있었으나, 북부여가 세금을 과중하게 받자 배반하고 고구려로 가 붙었다가, 고구려가 요동을 잃고 나라 형세가 쇠약해지자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국경을 침입하여 수없이 인민을 죽이고 가축을 약탈하였다. 서천왕이 크게 걱정하고 장수할 인재를 구하니, 여러 신하들이 왕의 아우 달가를 추천하였다. 달가는 기묘한 계교로 예의 소굴을 습격하여 그 추장과 6,7백 집을 포로로 하여 부여 남쪽의 오천으로 옮기고 그 여러 부락의 항복을 받으니, 서천왕이 달가를 안국군에 봉하였다.
제6편번역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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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왕이 죽고 아들 봉상왕 ( 隆上王 ) 이 즉위하였는데, 왕은 천성이 남을 시기하고 의심하기를 잘하여 달가가 항렬로 숙부요, 위명 ( 威名 ) 이 전국에 떨치므로 죄를 얽어 사형에 처하였다. 국민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안국군이 아니더면 우리가 예맥 ( 濊貊 ) 의 난리에 죽은 지가 오래였을 것이다.” 하고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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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용외(幕容외)의 패퇴와 봉상왕(烽上王)의 교만과 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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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외가 패퇴하고 봉상왕이 교만하며 포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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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외는 일대의 효웅이었다. 진의 정치가 부패하여 지나가 장차 크게 어지러워질 것을 내다보고, 바야흐로 전 지나를 아울러 가질 야심을 가졌다. 그러나 만일 동으로 고구려를 꺾지 못하면 뒷걱정이 적지 아니할 것을 잘 안 그는, 북부여를 격파한 뒤에 그 이긴 형세로 곧 고구려를 침노하려고 했는데, 다만 안국군의 위명을 꺼려 주저하다가 안국군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기원후 292년에 날랜 군사 로 고구려의 신성 ( 新城 ) 을 침범하였다. 이때 봉상왕이 신성에 순행해 있었는데, 모용외는 이를 알고 성을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하여 매우 위급해졌다. 신성 성주 북부소형 ( 北部小兄 ) 고노자 ( 高奴子 ) 가 5백 기병으로 모용외의 군사를 돌격하여 이를 크게 깨뜨리고 왕을 구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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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외는 당대의 효웅이었다. 진나라의 정치가 부패하여 앞으로 크게 어지러워질 것을 내다보고, 이제 전 지역을 아울러 가질 야심을 품었다. 그러나 만일 동쪽의 고구려를 꺾지 못하면 뒤 걱정이 적지 않을 것을 잘 알았던 그는, 북부여를 격파한 후에 그 이긴 기세로 곧 고구려를 침노하려 했으나, 다만 안국군의 위명을 꺼려 주저하다가 안국군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기원후 292년에 날랜 군사로 고구려의 신성을 침범하였다. 이때 봉상왕이 신성에 순행해 있었는데, 모용외는 이를 알고 성을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하여 매우 위급해졌다. 신성 성주 북부소형 고노자가 오백 기병으로 모용외의 군사를 돌격하여 이를 크게 깨뜨리고 왕을 구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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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기뻐하고 고노자의 작위를 높여 북부대형 ( 北部大兄 ) 에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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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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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3년에 모용외가 또 공격해와서 졸본 ( 卒本 ) 에 침입하여 서천왕의 무덤을 파다가 구원병에게 격퇴당했다. 왕이 모용씨가 자주 침노해옴을 걱정하니, '신가' 창조리 ( 倉助利 ) 가 아뢰었다. “북부대형 신생의 성주 고노자는 지혜와 용맹이 다 완전한 장수인데, 대왕께서는 고노자를 두고 어찌 선비를 근심하십니까? ” 하고 왕에게 권하여 고노자로 신성의 태수를 삼았다. 고노자가 백성을 사랑하고 군사를 단련하여 여러번 모용외의 침략군을 격퇴하여 국경이 안정되고 모용외의 군사가 다시 침노하지 못하니, 봉상왕은 그만 교만하고 방자해 져서 여러해 흉년으로 국민이 굶주리고 피로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라 안의 인부를 징발하여 대궐을 지으니, 국민이 달아나서 인구가 자꾸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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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 3년에 모용외가 또 공격해와 졸본에 침입하여 서천왕의 무덤을 파다가 구원병에게 격퇴당했다. 왕이 모용씨가 자주 침노해오는 것을 걱정하자, 창조리가 아뢰었다. "북부대형 신생의 성주 고노자는 지혜와 용맹이 모두 완전한 장수인데, 대왕께서는 고노자를 두고 어찌 선비를 근심하십니까?" 하고 왕에게 권하여 고노자로 신성의 태수를 삼았다. 고노자가 백성을 사랑하고 군사를 단련하여 여러 번 모용외의 침략군을 격퇴하여 국경이 안정되고 모용외의 군사가 다시 침노하지 못하자, 봉상왕은 그만 교만해지고 방자해져서 여러 해 흉년으로 국민이 굶주리고 피로한데도 불구하고 나라 안의 인부를 징발하여 대궐을 지으니, 국민이 달아나 인구가 계속 줄어들었다.
제6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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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300년에 이르러서는 왕이 여러 신하들의 간하는 말을 다 물리치고 나라 안의 15살 이상의 남녀를 죄다 징발하여 건축에 부리니 '신가' 창조리가 간했다“천재(天災)가 잦아 농사가 되지 않아서 나라 안의 인민이 장정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약자는 구렁에 빠져 죽는데, 대왕께서는 이를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굶주린 백성을 몰아 토목의 역사를 시키시니, 이는 임금의 할 일이 아닐 뿐더러, 하물며 북쪽에는 강적 모용씨가 있어 날마다 우리의 틈을 엿보고 있으니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임금이 백성을 아끼지 아니하는데 신하가 임금을 간하지 아니하면 충(忠)이 아니므로, 신이 이미 '신가' 의 자리에 있어 말할 것을 숨길 수 없어서 아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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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300년에 이르러서는 왕이 여러 신하들의 간하는 말을 모두 물리치고 나라 안의 열다섯 살 이상의 남녀를 전부 징발하여 건축에 부리니, '신가' 창조리가 간했다. "천재지변이 잦아 농사가 되지 않아 나라 안의 인민들이 장정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약자는 구렁에 빠져 죽는데, 대왕께서는 이를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굶주린 백성을 몰아 토목의 역사를 시키시니, 이는 임금의 할 일이 아닐 뿐더러, 하물며 북쪽에는 강적 모용씨가 있어 날마다 우리의 틈을 엿보고 있으니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임금이 백성을 아끼지 아니하는데 신하가 임금을 간하지 아니하면 충(忠)이 아니므로, 신이 이미 '신가'의 자리에 있어 말할 것을 숨길 수 없어 아<0xEB><0xA3><0x81>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