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高句麗BC 37 – AD 668문헌 원문 · 번역
조선상고사 제9편 고구려 대수전쟁
제9편번역 대기
원문
그러므로 여지승람 ( 與地勝覽 ) 합천 ( 陜川 ) 부자연 ( 父子淵 ) 의 고적에 의하면 신라가 전쟁이 지루하게 오래 가서 민가의 장정들이 전쟁에 가면 몇 번을 돌아올 기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아니했는데 , 어떤 늙은 아버지가 여러 해 만에야 아들이 전장에서 돌아온다는 기별을 듣고 마중나가 이 소 ( 沼 ) 위의 바위 위에서 부자가 서로 껴안고 울며불며 오래 그리던 자애의 정희와 생활의 곤란을 하소연하다 바위 아래로 떨어져서 이 소에 장사지냈으므로 부자연 ( 父子淵 ) 이라 이름하였다고 했고 , 삼국사기 설씨녀전 ( 薛氏女傳 ) 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 설씨녀는 집이 가난하고 일가도 없었으나 얼굴이 아름답고 행실이 정숙하여 보는 사람이 모두 칭찬하고 부러워했지만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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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진평왕 때의 그의 늙은 아버지가 먼 곳에 수자리를 가게 되어 그녀는 크게 걱정하고 이웃집 소년 가실 ( 嘉實 ) 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 가실은 자기가 대신 가기를 자청하였다 . 그녀의 아버지가이 말을 듣고크게 기뻐하며 가설과 딸을 결혼시키려고하니 그녀는 가실에게 전장에 가서 3 년이면 돌아올 것이니 돌아와서 결혼하자고 하므로 가실이 허락하고 자기의 말을 그녀에게 주고 , 훗날의 신표 ( 信表 ) 로 거울을 둘로 나누어 두 사람이 한쪽씩 가졌다 . 가실이 수자리를 나가서는 3 년을 곱하여 6 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녀의 아버지가 딸의 일을 민망하게 여겨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 그녀는 듣지 않았으나 아버지는 억지로 보내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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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 때 그의 늙은 아버지가 먼 곳에 수자리를 가게 되자 그녀는 크게 걱정하여 이웃 소년 가실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가실은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자청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가실과 딸을 결혼시키려 하니, 그녀는 가실에게 전장에 가서 3년이면 돌아올 것이니 돌아와서 결혼하자고 하였다. 이에 가실이 허락하고 자신의 말을 그녀에게 주었으며, 훗날의 신표로 거울을 둘로 나누어 두 사람이 한쪽씩 가지게 되었다. 가실이 수자리를 나간 후 3년을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일을 민망하게 여겨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그녀는 듣지 않았으나 아버지는 억지로 보내려 하였다.
제9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녀가 도망하려고 가실이 준 말을 타고서 막 떠나려고 하는데 이때 가실이 달려왔다 . 의복이 남루하고 형용이 여위어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 가실이 깨어진 거울을 꺼내서 맞추어보고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 이리하여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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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도망치려 가실이 준 말을 타고 막 떠나려 할 때, 이때 가실이 달려왔다. 옷차림은 누더기에 여위어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가실이 깨진 거울을 꺼내어 맞추어 보고 서로 껴안고 울었다. 이로써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하였다.
제9편번역 대기
원문
위의 두 가지 기록이 비록 당시 전국시대의 정황 ( 情況 ) 의 만분의 일에 지나지 아니하나 또한 그때 인민들의 근심과 괴로움을 잘 나타낸 것이라고 하겠다 . 그러나 무사 ( 武士 ) 의 사회는 이와 전혀 다르니 아래 에 그 몇 가지를 기록하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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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1) 귀산 ( 貴山 ) 은 파진간 ( 波珍干 ) 무은 ( 武殷 ) 의 아들이요 , 사량부 ( 沙梁部 ) 사람이었다 . 어릴 때 추항 ( 추項 ) 과 친하게 지내 함께 원광법사 ( 圓光法師 ) 에게 나아가서 가르침을 청하니 , 법사가 말하기를 “불교에 열 가지 계행 ( 戒行 ) 이 있는데 , 너희들은 남은 신하로서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하려니와 화랑 ( 花郞 ) 의 다섯 가지 계행에 있어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며 아버지를 효도로 섬기며 벗을 믿음으로 사귀며 싸움에는 용감하게 나아가며 생물을 살상함에는 가려서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 너희는 이것을 받들어 행하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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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산은 파진간 무은의 아들이요, 사량부 사람이었다. 어릴 때 추항과 친하게 지내 함께 원광법사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청하니, 법사가 말하기를 "불교에 열 가지 계행이 있는데, 너희들은 남은 신하로서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하려니와 화랑의 다섯 가지 계행에 있어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고 아버지를 효도로 섬기며 벗을 믿음으로 사귀고 싸움에는 용감하게 나아가며 생물을 살상함에는 가려서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너희는 이것을 받들어 행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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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하였다·진평대왕 ( 眞平大王 ) 건복 ( 建福 ) 19 년 ( 기원 602 년 ) 에 백제가 침노하여 아모산성 ( 阿母山城 : 지 금의 雲峰 ) 을 포위하고 공격 하므로 왕이 파진간 ( 波珍干 ) 건품 ( 乾品 ) · 무은 ( 武殷 ) 등을 보내서 방어하게 하였는데 귀산과 추항도 따라갔다 . 그런데 백제가 거짓 패하여 천산 ( 泉山 : 지금의 咸陽 ) 으로 퇴각하여 복병으로 신라의 추격하는 군사를 격파하고 쇠갈구리로 무은 ( 武殷 ) 을 얽어매어 사로잡으려 하였다 . 귀산이 “우리 스승이 나에게 가르치시기를 싸움에 용감하게 나아가라고 하셨으니 어찌 감히 물러나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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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대왕 건복 19년(기원 602년)에 백제가 침범하여 아모산성(지금의 운봉)을 포위하고 공격했으므로 왕이 파진간, 건품, 무은 등을 보내 방어하게 하였는데 귀산과 추항도 따라갔다. 그런데 백제가 거짓으로 패하여 천산(지금의 함양)으로 퇴각하여 복병으로 신라가 쫓아오는 군사를 격파하고 쇠갈구리로 무은을 에워싸 사로잡으려 하였다. 귀산이 "우리 스승께서 나에게 싸움에 용감하게 나아가라고 가르치셨으니 어찌 감히 물러날 수 있겠는가."
제9편번역 대기
원문
” 하고 추장과 함께 창을 들어 죽기로 싸워서 적 수십 명을 죽이고 , 아버지 무은을 구원하였는데금창 ( 金瘡 : 갈이나 창에 찔려서 난 상처 ) 이 온몸에 가득하여 중도에서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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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2) 찬덕 ( 讚德 ) 은 모량부 ( 牟梁部 ) 사람이었는데 용기 와 절개가 있 었다 . 진평왕 건복 ( 建福 ) 27 년에 가잠성주 ( 가岑城主 ) 가 되었는데 , 이듬해 10 월에 백제가 공격해와서 포위당한 지 백여 일이 되었다 . 왕이 상주 ( 上州 ) · 하주 ( 下州 ) · 신주 ( 新州 ) 의 군사 5 만 명을 내어 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패하고 돌아갔다 . 찬덕이 분개하여 군사들에게 “세 주(州)의 군사가 적이 강함을 보고 진격하지 못하고 , 성이 위태로움을 보고도 구원하지 못하니 그것은 의 ( 義 ) 가 없는 것이다 . 의가 없이 사는 것은 의가 있게 죽는 것만 못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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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덕은 모량부 사람이었는데 용기와 절개가 있었다. 진평왕 건복 27년에 가잠성주가 되었는데, 이듬해 10월에 백제가 공격해와 포위당한 지 백여 일이 되었다. 왕이 상주·하주·신주의 군사 5만 명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으나 패하고 돌아갔다. 찬덕이 분개하여 군사들에게 “세 주의 군사가 적이 강함을 보고 진격하지 못하고, 성이 위태로움을 보고도 구원하지 못하니 그것은 의가 없는 것이다. 의가 없이 사는 것은 의가 있게 죽는 것만 못하다.”
제9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하고 양식이 떨어지고 물이 없어 시체를 먹고 오줌을 마시면서 힘을 다해 싸우다가 이듬해 정월에 다시 더 버틸 수 없게 되자 드디어 머리로 괴목 ( 塊木 ) 을 들이받아 골이 깨져서 죽었다 . 가잠성은 지금의 괴산 ( 槐山 ) 이니 , 괴산은 찬덕이 머리로 괴목을 받은 까닭으로 하여 생긴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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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것이 떨어지고 물이 없어 시체를 먹고 오줌을 마시며 힘을 다해 싸우다가 다음 해 정월에 다시는 버틸 수 없게 되자, 마침내 머리로 괴목을 들이받아 골이 깨져 죽었다. 가잠성은 지금의 괴산이니, 괴산은 찬덕이 머리로 괴목을 받은 까닭으로 이름이 생겼다.
제9편번역 대기
원문
3) 해론 ( 奚論 ) 은 찬덕 ( 讚德 ) 의 아들이다 . 진평왕 건복 35 년에 금산당주 ( 金山幢主 ) 로서 한산주 ( 漢山州 ) 도독 ( 都督 ) 변품 ( 邊品 ) 과 함께 가잠성 ( 가岑城 ) 을 회복하려고 하였고 , 싸움이 시작되자 해론은 “여기는 우리 아버지가 전사하신 곳이다 .” 하고 단병 ( 短兵 ) 으로 달려나가서 적 몇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시인들이 장가 ( 長歌 ) 를 지어 그를 조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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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4) 눌최 ( 訥催 ) 는 사량부 ( 沙梁部 ) 사람이다.---진평왕 건복 41 년( 기원후 614 년 ) 에 백제의 대군이 침입하여 속함 ( 速含 ) · 앵잠 ( 櫻岑 ) · 기잠 ( 岐岑 ) · 봉잠 ( 峰岑 ) · 기현 ( 旗縣 ) · 용책 ( 冗柵 ) 등 여섯 성을 공격하므로 왕이 상주 · 하주 · 귀당 ( 貴幢 ) · 법당 ( 法幢 ) · 서당 ( 誓幢 ) 의 다섯 군사에 명하여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 다섯 장군은 백제의 진영이 당당함을 보고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는데 그 중의 한 장군이 말했다 . “대왕께서 오군 ( 五軍 ) 을 우리 여러 장군에게 맡기시어 나라의 존망 ( 存亡 ) 이 이 싸움에 달려 있지마는 가하면 나아가고 어려우면 물러나라는 것이 병가 ( 兵家 ) 에서 이르는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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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최는 사량부 사람이다. 진평왕 건복 41년(기원후 614년)에 백제의 대군이 침입하여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용책 등 여섯 성을 공격했으므로 왕이 상주, 하주, 귀당, 법당, 서당의 다섯 군사에 명하여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다섯 장군은 백제의 진영이 당당함을 보고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는데 그중 한 장군이 말했다. "대왕께서 오군을 우리 여러 장군에게 맡기시어 나라의 존망이 이 싸움에 달려 있지마는가 하면 나아가고 어려우면 물러나라는 것이 병가에서 이르는 말입니다."
제9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이제 적의 형세가 저렇듯 강성하니 만일 나아갔다가 패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 까 ? ”모두들 그 말이 옳다하여 돌아가기로하였는데 너무 면목이 없어서 노진성 ( 奴珍城 ) 을 쌓고 돌아갔다 . 이에 백제는 더욱 급히 공격하여 속함·기잠·용책 세 성을 함락시켰다 . 눌최는 앵잠·봉잠·기현 세 성을 굳게 지키다가 다섯 장군이 다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는 분개 하여 군사들을 돌아보고 “봄이 되면 초목이 다 무성해지지마는 겨울이 되면 소나무 잣나무만이 홀로 푸르다 . 이제 구원병은 없고 세 성이 심히 위태로우니 , 이는 지사 ( 志士 ) 와 의부 ( 義夫 ) 가 절개를 세울 때이다 . 너희들은 어찌하려느냐 ? ” 사졸들이 다 눈물을 뿌리며 함께 죽기를 맹세하였다 .
번역
이제 적의 형세가 저렇듯 강성하니 만일 나아갔다가 패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모두들 그 말이 옳다 하여 돌아가기로 하였는데 너무 면목이 없어서 노진성을 쌓고 돌아갔다. 이에 백제는 더욱 급히 공격하여 속함, 기잠, 용책 세 성을 함락시켰다. 눌최는 앵잠, 봉잠, 기현 세 성을 굳게 지키다가 다섯 장군이 다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는 분개하여 군사들을 돌아보고 “봄이 되면 초목이 다 무성해지지마는 겨울이 되면 소나무 잣나무만이 홀로 푸르다. 이제 구원병은 없고 세 성이 심히 위태로우니, 이는 지사와 의부가 절개를 세울 때이다. 너희들은 어찌하려느냐?” 사졸들이 다 눈물을 뿌리며 함께 죽기를 맹세하였다.
제9편번역 대기
원문
성이 함락되고 살아남은 사람이 몇 못 되었지만 끝까지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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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이상 네 전쟁은 곧 신라의 파진간이며 도독이며 다섯 장군들이 출동한 동서전쟁에 관한 충신 의사의 약사 ( 略史 ) 이다 . 백제에 있어서는 큰 전쟁이었으므로 역사에 특기한 것이고 , 이 밖에도 자질구레한 싸움은 거의 없는 날이 없었다 . 백제사 ( 百濟史 ) 는 거의 다 없어져서 알 수 없게 되었으나 백제가 신라보다 강하고 사나운 호전국 ( 好戰國 ) 이었으니 그 희생된 충신 의사도 신라보다 많았을 것이다 . 그러나 두 동서 , 곧 두 개인의 이기주의를 성취하기 위하여 수많은 인민을 죽이는 전쟁에 희생된 사람들이니 이 시대의 충신 의사도 또한 가치없는 충신 의사들이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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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네 전쟁은 신라의 파진간이자 도독이며 다섯 장군이 출동한 동서전쟁에 관한 충신 의사의 약사(略史)이다. 백제에게는 큰 전쟁이었으므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고, 이 밖에도 사소한 싸움이 없었던 날이 거의 없었다. 백제사는 거의 다 사라져 알 수 없게 되었으나, 백제가 신라보다 강하고 사나운 호전국이었으니 그 희생된 충신 의사도 신라보다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동서, 즉 두 개인의 이기심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인민을 죽이는 전쟁에 희생된 사람들이니, 이 시대의 충신 의사 또한 가치 없는 충신 의사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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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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