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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高句麗BC 37 – AD 668

문헌 원문 ·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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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제9편 고구려 대수전쟁 朝鮮上古史 第9篇

신채호 · 1931 · 저본 한국어 위키문헌
문단 135개 · 번역 확정 0개
제9편문단 10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만나서 두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선화는 백제의 서동이 사랑스러운 사나이라지만 아마 저 중만은 못할 것이다 하고 그날부터는 서동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중을 그리게 되었으며 , 서동 또한 “내가 네 남편이 되지 못할진대 죽어버리리라 . 너도 내 아내가 되지 않으려거든 죽어버리라 .” 하여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맺어졌다 . 그래서 서동이 선화의 시녀에게 뇌물을 주어 밤을 타 선화의 궁에 들어가 사통하였다 .
번역
만나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선화는 백제의 서동이 사랑스러운 사내라 하지만 아마 저 중만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날부터는 서동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중을 그리게 되었으며, 서동 또한 "내가 네 남편이 되지 못할진대 죽어버리리라. 너도 내 아내가 되지 않으려거든 죽어버리라" 하여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맺어졌다. 그래서 서동이 선화의 시녀에게 뇌물을 주어 밤을 타 선화의 궁에 들어가 사통하였다.
제9편문단 102번역 대기
원문
선화는 서동이 아니고는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지 않으리라고 굳게 맹세를 하였지만 , 주위의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 데야 어찌하랴 ? 서동과 선화는 의논한 끝에 차라리 이 일을 드러내서 세상에 널리 알려 세상에서 허락하면 결혼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함께 죽기로 작정하고 , 서동이 가끔 엿이며 밤이며 그 밖의 여러 가지 과일을 많이 사가지고 거리로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꾀어 “선화 아가씨는 염통이 반쪽이라네 . 본래는 온통이었지만 반쪽은 떼어 서동에게 주고 반쪽은 남겨 가지고 있으나 상사병에 병들어 있다네 . 서동이여 , 어서 오소서 . 어서 와서 염통을 도로 주시어 선화 아가씨를 살리소서 ” 하고 노래부르게 하여 그 노래가 하루 아침에 신라 서울 동경 ( 東京 ) 에 쫙 퍼져서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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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문단 103번역 대기
원문
그리고 선화는 아버지 진평왕에게 고백하고 , 서동은 귀국하여 증조부 위덕왕에게 바른대로 고하며 , 다른 사람과 결혼하라 하면 죽기로 반대하였다 . 진평왕과 위덕왕은 처음에는 부모나 조부모 몰래 남녀가 사통한 것은 가정의 큰 변이라 하여 당장 사형에 처할 듯 했지마는 그러나 사랑하는 딸 사랑하는 손자를 어찌하랴 ? 진평왕은 박·석·김 세 성의 결혼 습관을 깨뜨리고 , 위덕왕은 아버지의 원수를 잊고 서동과 선화의 결혼을 허락하여 두 나라 왕실이 다시 새 사돈 사이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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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문단 104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결혼 후 10년 동안의 두 나라 동맹 ===
번역
결혼한 후 10년간 두 나라가 동맹을 이루었다.
제9편문단 105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두 사람이 결혼한 뒤에는 두 나라는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 삼국사기에는 그러한 말이 없으니 , 그것은 신라가 나중에 고타소랑 ( 古陀炤 娘 ) 의 참혹한 죽음 ( 다음 절 참조 ) 으로 인하여 백제를 몹시 원망하여 백제를 토벌한 다음에 그러한 기록을 모두 태워버려서 신라 왕가의 여자로서 백제에 시집간 자취를 숨겨버린 때문이다 .
번역
두 사람이 결혼한 후에는 두 나라는 매우 가깝게 지냈다. 삼국사기에는 그런 말이 없는데, 이는 신라가 후에 고타소랑의 참혹한 죽음(다음 절 참조)으로 인해 백제를 몹시 원망하여 백제를 토벌한 뒤에 그러한 기록을 모두 태워버려서 신라 왕가의 여성이 백제에 시집간 자취를 숨겼기 때문이다.
제9편문단 106번역 대기
원문
그러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동이 선화공주의 아름다움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 서울에 가서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했다고 하였다 , 여지승람 ( 輿地勝覽 ) 에는 무강왕 ( 武康王 ) 이 진평왕의 딸 선화 공주에 장가들어 용화산 ( 龍華山 ) 에 미륵사 ( 彌勒寺 ) 를 짓는데 진평왕이 여러 공인 ( 工人 ) 을 보내 도왔다고 하였으며 , 고려사 지리지에는 후조선 ( 後朝鮮 ) 무강왕 기준 ( 箕準 ) 의 능을 세상 사람들이 말통대왕 ( 末通大王 ) 의 능이라 한다고 하고 , 그 주 ( 註 ) 에 백제 무왕 ( 武王 ) 은 소명 ( 小名 ) 을 서동 ( 薯童 ) 이라 한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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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문단 107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서동이 백제의 왕위를 물려받아 42 년 만에 돌아가서 시호를 무왕이라 하였으니 , 무강왕은 후조선의 기준이 아니 ' 라 무왕의 잘못이요 , 서동과 말통 ( 末通 ) 은 이두로 읽으면 서동의 서 ( 薯 ) 는 뜻을 취하고 동 ( 童 ) 은 음을 취하여 '마동'으로 읽을 것이요 말통 ( 末通 ) 두 글자가 다음으로 '마동'으로 읽을 것이므로 , 말통대왕 릉은 곧 무왕 서동과 선화공주를 합장 ( 合葬 ) 한 능이다 . 그런데 말통대왕이 왕이 된 뒤에 곧 신라와 혈전을 벌이게 되었으니 신라가 그 적국에 대해 백공을 보내서 절 짓는 것을 도왔을 리가 만무하다 .
번역
서동이 백제의 왕위를 물려받아 사십이 년 만에 돌아가서 시호를 무왕이라 하였으니, 무강왕은 후조선의 기준이 아니요. '말통'은 이두로 읽으면 서동의 서(薯)는 뜻을 취하고 동(童)은 음을 취하여 '마동'으로 읽을 것이며, 말통 두 글자가 다음으로 '마동'으로 읽을 것이므로, 말통대왕릉은 곧 무왕과 서동, 그리고 선화공주를 함께 묻은 능이다. 그런데 말통대왕이 왕이 된 뒤에 곧 신라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으니, 신라가 그 적국에 대해 백공을 보내서 절 짓는 것을 도왔을 리가 만무하다.
제9편문단 108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미륙사의 건축은 대개 서동이 왕손 ( 王孫 ) 으로 있어 원당 ( 願堂 ) 으로 지은 것이 고 , 그 원당을 지을 때에는 신라 · 백제 두 사돈의 나라가 서로 환호하여 고구려에 대한 동맹국이 되었으므로 진평왕 원년 내지 24 년까지 , 곧 백제의 위덕왕 26 년 내지 45 년을 지나 혜왕 ( 惠王 ) 2 년과 법왕 ( 法王 ) 2 년을 거쳐 무왕 2 년까지는 신라와 백제 사이에 한 번도 전쟁이 없었고 , 또 두 나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수 ( 隨 ) 에 사선을 보내서 고구려를 치기를 청하여 수의 문제 ( 文帝 ) · 양제 ( 煬帝 ) 두 대의 침입 ( 제10 편 참고 ) 을 일으키게 하였다 .
번역
미륙사의 건축은 대개 서동이 왕손으로 있어 원당으로 지었으며, 그 원당을 지을 때에는 신라와 백제 두 사돈의 나라가 서로 환호하여 고구려에 대한 동맹국이 되었다. 그리하여 진평왕 원년부터 24년까지, 곧 백제의 위덕왕 26년부터 45년을 지나 혜왕 2년과 법왕 2년을 거쳐 무왕 2년까지는 신라와 백제 사이에 전쟁이 한 번도 없었으며, 또 두 나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수에 사선을 보내 고구려를 치기를 청하여 수의 문제와 양제 두 대의 침입을 일으키게 하였다.
제9편문단 109번역 대기
원문
=== 동서전쟁(同婚戰爭)---김용춘의 총애 다툼과 무왕(武王)의 항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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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문단 110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백제가 위덕왕 ( 威德王 ) 말년이거나 혜왕 ( 惠王 ) 법왕 ( 法王 ) 연간 , 곧 서동 ( 薯童 ) 이 왕증손 ( 王曾孫 ) 이었던 때이거나 왕손 ( 王孫 ) 또는 태자 ( 太子 ) 였을 때에는 늘 신라와 좋게 지내다가 무왕 ( 武王 ) 3 년 곧 서동이 왕이 된 뒤 3 년 ( 기원후 602 년 ) 에 신라와 전쟁이 벌어져서 백제는 신라의 아모산성 ( 阿母山城 : 지금의 雲峰 ) 을 치고 , 신라는 소타이(小陀 ) · 외석 ( 畏石 ) · 천산 ( 泉山 ) · 옹잠 ( 甕岑 : 지금의 德給山 ) 에 성책을 쌓아 백제를 막았다 .
번역
백제가 위덕왕 말년이나 혜왕, 법왕 연간에 서동이 왕증손이었거나 왕손 또는 태자였을 때에는 늘 신라와 사이가 좋았으나, 무왕 3년 곧 서동이 왕이 된 뒤 3년(기원후 602년)에 신라와 전쟁이 벌어지자 백제는 신라의 아모산성을 치고, 신라는 소타이·외석·천산·옹잠에 성을 쌓아 백제를 막았다.
제9편문단 11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백제는 좌평 ( 佐平 ) 해수 ( 解수 ) 로 하여금 네 성을 공격 하여 신라의 장군 건품 ( 乾品 ) · 무은 ( 武殷 ) 과 격전을 벌여 이 뒤부터는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 ( 忠州 ) · 괴산 ( 槐山 ) · 연풍 ( 延豊 ) · 보은 ( 報恩 ) 등지와 지금의 지 리산 좌우의 무주 ( 茂朱 ) · 용담 ( 龍澹 ) · 금산 ( 金山 ) · 지레 ( 知禮 ) 등지와 지금의 덕유산 동쪽 함양 ( 咸陽 ) · 운봉 ( 雲峰 ) · 안의 ( 安義 ) 등지에서 수없이 많은 생명과 재산을 버려 쇠가 쇠를 먹고 살이 살을 먹는 차극을 연출함에 이르렀다 .
번역
백제는 좌평 해수로 하여금 네 성을 공격하여 신라의 장군 건품·무은과 격전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괴산·연풍·보은 등지와 지금의 지리산 좌우의 무주·용담·금산·지례 등지, 그리고 지금의 덕유산 동쪽 함양·운봉·안의 등지에서 수많은 생명과 재산을 버리고 쇠가 쇠를 먹고 살이 살을 먹는 참극을 연출하게 되었다.
제9편문단 112번역 대기
원문
진평왕은 무왕이 사랑하는 아내의 아버지니 속담에 아내에게 엎어지면 처가의 밭 말뚝에도 절을 한다고 하였는데 , 무왕이 어찌하여 자기가 왕이 되어 정치의 세력을 잡자 도리어 그 유일한 애처의 아버지의 나라를 말뚝만큼도 여기지 아니하여 날마다 군사로써 유린하려 하였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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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문단 113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신라에서 왕위를 박 · 석 · 김 세 성 이 서로 전하는 것은 그 시조 박혁거세 ( 朴赫居世 ) 때부터 확정된 명문 ( 明文 ) 의 헌법이 아니라 , 처음 에는박·석 두성이 서로 혼인하여 두성의 아들이나 사위만 왕이 될 권리를 가지다가 건국 3백 년쯤 후에 미추이사금 ( 味鄒尼師今 ) 이 김씨 로서 점해왕 ( 점解王 ) 의 사위가 돼서 두 성에 끼어들어 세 성이 서로 전하는 판국이 되었으니 , 6백 년 후에 부여씨 ( 扶餘氏) 가 세 성에 끼어 네 성이 서로 전하는 판국이 되는 것이 무엇이 안 될 것인가 ? 백제의 무왕이 신라의 왕위를 물려받을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 신라는 원래 아들이나 사위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전왕의 뒤를 이었는데 , 하물며 진평왕은 딸만 있고 아들이 없었으며 , 비록 맏딸 선덕 ( 善德 ) 이 있었지마는 그는 출가해서 여승 ( 女增 ) 이 되어 정치에 관여 하지 아니하니 , 선화가 둘째딸이지만 선화의 남편 무왕이 맏사위이므로 무왕이 신라의 왕위를 이어받을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번역
신라에서 왕위를 박씨, 석씨, 김씨 세 성이 서로 전하는 것은 그 시조 박혁거세 때부터 확정된 명문(名門)의 헌법이 아니라, 처음에는 박씨와 석씨 두 성이 서로 혼인하여 두 성의 아들이나 사위만 왕이 될 권리를 가지다가 건국 3백 년쯤 후에 미추이사금이 김씨로서 점해왕의 사위가 되어 두 성에 끼어들어 세 성이 서로 전하는 판국이 되었으니, 6백 년 후에 부여씨가 세 성에 끼어 네 성이 서로 전하는 판국이 되는 것이 무엇이 안 될까? 백제의 무왕이 신라의 왕위를 물려받을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고, 신라는 원래 아들이나 사위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전왕의 뒤를 이었는데, 하물며 진평왕은 딸만 있고 아들이 없었으며, 비록 맏딸 선덕이 있었지만 그는 출가하여 여승이 되어 정치에 관여하지 아니하니, 선화가 둘째딸이지만 선화의 남편 무왕이 맏사위이므로 무왕이 신라의 왕위를 이어받을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제9편문단 114번역 대기
원문
이 두 가지 조건으로 무왕은 신라의 왕이 될 희망을 가졌었을 것이고 , 진평도 또한 왕위를 무왕에게 전해줄 생각을 가졌었을 것이다 .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박·석 · 김 ·부여 네 성이 서로 전해주는 판국이 되어 신라와 백제가 합쳐져서 한 나라가 되어 두 나라 인민의 뜻없는 혈전을 면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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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문단 115번역 대기
원문
백제에는 부여씨 아래 진 ( 眞 ) · 국 ( 國 ) · 해 ( 海 ) · 연 ( 燕 ) · 목 ( 木 ) · 백 ( 백 ) · 협 (협) 의 여덟 대가 ( 大家 ) 가 있었으나 , 실상은 부여씨가 정권을 독차지하여 고구려의 벌족공화 ( 關族共和 ) 와 다르고 , 신라는 원래 박 · 석 · 김 세 성의 공화 ( 共和 ) 의 나라였으나 , 이때는 김씨 한 집안이 거의 그 왕위 상속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때였으므로 두 나라의 왕만 마음이 맞으면 양국의 결혼적 연합이 용이하였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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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문단 116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나 천하의 일이 어찌 그렇게 평순하게 진행되랴 ? 두 나라 여러 신하들은 거의 다 이를 반대했겠지마는 그 중에 가장 반대의 의견을 품은 이는 김용춘 ( 金龍春 ) 이었을 것이다 . 김용춘은 누구인가 ? 곧 진평왕의 셋째딸 문명 ( 文明 ) 의 남편이다 . 선화가 멀리 백제로 시집가서 떨어져 있으니 진평왕의 애정이 자연 이 문명에게 쏠리고 , 따라서 첫 째사위 선화의 남편 서동보다 둘째사위 용춘을 더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 용춘은 만일 신라의 왕위가 서동에게 가지 않으면 곧 자기에게 돌아올 필연성을 가졌으니 , 왕위가 서동에게 돌아가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을 가지고 이를 저지하였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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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천하의 일이 어찌 그리 순탄하게 진행되겠는가? 두 나라 여러 신하들은 거의 다 이를 반대했겠지만, 그중 가장 반대의 의견을 품은 이는 김용춘이었을 것이다. 김용춘은 누구인가? 곧 진평왕의 셋째 딸 문명의 남편이다. 선화가 멀리 백제로 시집가 떨어져 있으니 진평왕의 애정이 자연히 문명에게로 쏠리고, 따라서 첫째 사위 선화의 남편 서동보다 둘째 사위 용춘을 더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용춘은 만일 신라의 왕위가 서동에게 가지 않으면 곧 자기에게 돌아올 필연성을 가졌으니, 왕위가 서동에게 돌아가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을 가지고 이를 저지하였을 것이다.
제9편문단 117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 반대가 성공하여 진평왕은 드디어 서동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끊고 , 그리고 출가해서 중이 된 맏딸 덕만 ( 德曼 ), 곧 선덕여대왕 ( 善德女大王 ) 을 불러다가 왕태녀 ( 王太女 ) 를 삼았다 . 그리고 왕은 용춘을 중히 써서 장래 명색은 선덕여왕이라도 실권은 용춘에게 있게 하였을 것이다 . 용춘에게 왕위 계승권을 주지 않고 덕만에게 준 것은 물론 서동의 감정을 융화시키려 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 그러나 서동도 총명한 인물이라 어찌 그런 수단에 속으랴 ? 그러므로 그는 즉위 후에 용춘을 죽이려고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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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대가 성공하여 진평왕은 드디어 서동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끊고, 출가하여 중이 된 맏딸 덕만, 곧 선덕여대왕을 불러다가 왕태녀로 삼았다. 그리고 왕은 용춘을 중히 써서 장래 명색은 선덕여왕이라도 실권은 용춘에게 있게 하였을 것이다. 용춘에게 왕위 계승권을 주지 않고 덕만에게 준 것은 물론 서동의 감정을 융화시키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동도 총명한 인물이라 어찌 그런 수단에 속으랴? 그러므로 그는 즉위 후에 용춘을 죽이려고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제9편문단 118번역 대기
원문
용춘이 처음에는 뒤에 숨어 진평왕의 참모가 되어 있다가 나중에는 내성사신 ( 內省私臣 ) 으로 대장군을 겸하여 직접 전선에 나타나서 악전고투가 해마다 계속되었으니 , 이것이 이른바 동서전쟁 ( 同壻戰爭 )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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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편문단 119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동서전쟁(同壻戰爭)의 희생자 ===
번역
동서전쟁의 희생자
제9편문단 120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이 전쟁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두 동서 사이의 신라 왕위의 쟁탈전이었으니 , 두 사람의 비열한 이기주의의 충돌에 지나지 않는 것이 지마는 명의는 국가와 민족의 흥망을 내걸어 피차 그 나라 안의 인심 을 고동 ( 鼓動 ) 하고 명예 와 벼슬로 결사의 군사를 동원하니 , 한편에 비애에 우는 인민이 있음에 불구하고 한편에는 공명에 춤추는 장수와 군사가 적지 아니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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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두 동서 사이의 신라 왕위 다툼이었으니, 두 사람의 비열한 이기심 충돌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명분은 국가와 민족의 흥망을 걸고 서로 그 나라 안의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고 명예와 벼슬로 결사하는 군사를 동원하니, 한편에는 슬픔에 우는 인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에는 공명에 춤추는 장수와 군사가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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