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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야

新羅·加耶BC 57 – AD 935

문헌 원문 ·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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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권2 三國遺事 卷第二

일연 · 1281 · 저본 중국어 위키문헌
문단 44개 · 번역 확정 0개
기이 제2문단 2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朱蒙自北扶餘逃難。至卒本扶餘。州之王無子。只有三女。見朱蒙知非常人。以第二女妻之。未幾。扶餘州王薨。朱蒙嗣位。生二子。長曰沸流。次曰溫祚。恐後太子所不容。遂與烏干馬黎等臣南行。百姓從之者多。遂至漢山。登負兒岳。望可居之地。沸流欲居於海濱。十臣諫曰。惟此河南之地。北帶漢水。東據高岳。南望沃澤。西阻大海。其天險地利。難得之勢。作都於斯。不亦宜乎。沸流不聽。分其民歸彌雛忽居之。溫祚都河南慰禮城。以十臣為輔翼。國號十濟。是漢成帝鴻佳三年也。沸流以彌雛忽士濕水鹹。不得安居歸。見慰禮都邑鼎定。人民安泰。遂慚悔而死。其臣民皆歸於慰禮城。後以來時百姓樂悅。改號百濟。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故以解為氏。後至聖王。移都於泗泚。今扶餘郡(彌雛忽。仁州。慰禮。今稷山)按古典記云。東明王第三子溫祚。以前漢鴻佳三年癸酉。自卒本扶餘。至慰禮城。立都稱王。十四年丙辰。移都漢山(今廣州)歷三百八十九年。至十三世近肖古王。
번역
주몽이 북부여에서 도망치다 졸본부여에 이르렀는데, 그 나라의 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오직 세 딸만 있었다. 주몽은 비범한 사람임을 알고 둘째 딸을 그와 결혼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의 왕이 죽자 주몽이 그 자리를 이었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큰아들은 비류라 하고 차남은 온조라 했다. 나중에 태자가 받아주지 못할까 염려하여 오간마리 등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이동했다. 백성들이 많이 따랐다. 마침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악에 올라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처를 정하고 싶어 했으나, 열 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이곳은 하남 지역으로 한강을 끼고 동쪽으로는 고악까지 하고 남쪽으로는 넓은 평야를 바라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어 그 지형과 이치가 얻기 힘든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비류는 듣지 않았다.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노곳에 머물게 하고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나라 이름을 촉제라 했다. 이는 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노곳의 사습수(濕水)와 염분 때문에 편안히 살 곳을 얻지 못했다. 위례성이 도읍으로 확고하게 정해지고 백성들이 평안하자 부끄러워하여 죽었다. 그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 백성들이 즐거워하며 나라 이름을 백제라 바꾸었다. 그 세계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기에 이를 성씨로 삼았다. 나중에 성왕이 되어 도읍을 사비로 옮겼다. 지금의 부여군(미추노곳, 인주, 위례, 현재의 적산)에 전해지기를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이전 한 홍가 3년 계유년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까지 와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칭했다. 열네 해 병진년에 도읍을 한산(현재의 광주)으로 옮겨 삼백팔십구 년 동안 지냈다. 열세대에 이르러 근초고왕이 되었다.
기이 제2문단 22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咸安元年。取高句麗南平壤。移都北漢城(今楊州)歷一百五年。至二十二世文周王即位。元徽三年乙卯。移都熊川(今公州)歷六十三年。至二十六世聖王。移都所夫里。國號南扶餘。至三十一世義慈王。歷一百二十年。至唐顯慶五年。是義慈王在位二十年。新羅金庾信與蘇定方討平之。百濟國舊有五部。分統三十七郡。二百濟城。七十六萬戶。唐以地分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等五都督府。仍其酋長為都督府刺史。未幾。新羅盡并其地。置熊全武三州及諸郡縣又虎嵒寺有政事嵒。國家將議宰相。則書當選者名。或三四函封置嵒上。須臾取看。名上有印跡者為相。故名之又泗泚河邊有一嵒。蘇定方嘗坐此上。釣魚龍而出。故嵒上有龍跪之跡。因名龍嵒又郡中有三山。曰日山吳山浮山。國家全盛之時。各有神人居其上。飛相往來。朝夕不絕又泗泚崖又有一石。可坐十餘人。百濟王欲幸王興寺禮佛。先於此石望拜佛。其石自煖。因名㷝石又泗泚河兩崖如畫屏。百濟王每遊宴歌舞。
번역
함안 원년. 고구려 남평양을 차지하여 북한성(지금의 양주)으로 도읍을 옮긴 지 15년이 지났다. 스물두 세대 문주왕이 즉위했다. 원휘 3년 을묘년. 웅천(지금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겨 63년을 지냈다. 스물여섯 세대 성왕이 되자 소부리(所夫里)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였다. 서른한 세대 의자왕이 되자 120년을 지냈다. 당나라 현경 5년이 되자 의자왕이 재위한 지 20년이 되었다. 신라의 김유신과 소정방이 평을 정벌하였다. 백제국은 예전에 다섯 부로 나뉘어 통하는 37군과 200개 성이 있었다. 76만 호였다. 당나라는 땅을 나누어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대안 등의 다섯 도독부를 두었다. 그들의 으뜸 족장들을 도독부 사사로 삼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가 그 땅을 모두 병합하였다. 웅전무 삼주와 여러 군현에 또 호거사(虎嵒寺)에 정사(政事)를 두었다. 나라에서 재상을 논의하자, 서당에 선출된 사람의 이름이 있었다. 혹은 삼사(三四)의 편지로 거사 위에 두었다. 잠시 살펴보니, 이름에 도장이 찍힌 자가 재상이었다. 그래서 그곳을 또 사창하(泗泚河) 변에 있는 거사라 이름 붙였다. 소정방이 예전에 이곳에 앉아 물고기를 낚다가 용이 나오게 하였다. 그래서 거사 위에 용이 무릎 꿇은 자취가 있다. 이에 용거(龍嵒)라 이름 붙였고, 또 군에 세 산이 있었다. 일산, 오산, 부산이라 하였다. 나라가 전성할 때마다 각기 신인(神人)이 그 위에 거주하며 날아다니는 모습이 아침저녁으로 끊이지 않았다. 또 사창애(泗泚崖)에는 또 하나의 돌이 있었다. 열댓 명이 앉을 만한 크기였다. 백제왕이 왕흥사(王興寺)에 가서 예불을 드리며 불교를 숭상하고자 하니, 이 돌을 먼저 보고 절을 올렸다. 그 돌이 스스로 따뜻하였다. 이에 릉석(煖石)이라 이름 붙였고, 또 사창하강 양쪽 절벽은 마치 병풍 같았다. 백제왕이 매번 유흥을 즐기며 노래하고 춤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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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武王(古本作武康。非也。百濟無武康)===
번역
무왕(옛 글자로는 무강이나, 이는 아니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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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第三十武王名璋。母寡居。築室於京師南池邊。池龍文通而生。小名薯童。器量難測。常掘薯蕷。賣為活業。國人因以為名。聞新羅真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美豔無雙。剃髮來京師。以薯蕷餉閭里群童。群童親附之。乃作謠。誘群童而唱之云。善化公主主隱他密只嫁良置古薯童房乙夜矣卯乙抱遣去如童謠滿京。達於宮禁。百官極諫。竄流公主於遠方。將行。王后以純金一斗贈行。公主將至竄所。薯童出拜途中。將欲侍衛而行。公主雖不識其從來。偶爾信悅。因此隨行。潛通焉。然後知薯童名。乃信童謠之驗。同至百濟。出母后所贈金。將謀計活。薯童大笑曰。此何物也。主曰。此是黃金。可致百年之富。薯童曰。吾自小掘薯之地。委積如泥土。主聞大驚曰。此是天下至寶。君今知金之所在。則此寶輸送父母宮殿何如。薯童曰可。於是聚金。積如丘陵。詣龍華山師子寺知命法師所。問輸金之計。師曰。吾以神力可輸。將金來矣。主作書。并金置於師子前。師以神力。一夜輸置新羅宮中。
번역
서른 번째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살면서 경성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연못에는 용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태어났다. 작은 이름은 서동이었다. 재능과 기량이 헤아리기 어려웠다. 늘 고구마 뿌리를 파서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인 선화(또는 선화)가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자르고 경성으로 왔다. 고구마 뿌리로 마을 아이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자, 아이들이 그녀에게 친근하게 붙어 지내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 노래에 이끌려 아이들을 모아 노래를 불렀다는데, 선화 공주는 주된 곳을 숨기고 오직 착한 서동의 방에서 을야(乙夜)에 묘(卯)로 떠나 마치 동요처럼 온 경성을 돌았다. 마침내 궁궐 깊숙이까지 이르자 백관들이 극구 간언했다. 그래서 공주를 먼 곳으로 유배 보냈다. 왕후가 순금 한 되를 보내며 길을 배웅했다. 공주가 도착할 유배지에서 서동이 나와 절하는 도중에, 마침 시중을 들기 위해 떠나려 했다. 공주는 그의 출신을 알지 못했지만, 우연히 그에게 마음이 끌려 따라서 가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은밀하게 교류했다. 그때서야 서동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이에 아이들의 노래가 사실임을 알고 백제까지 함께 갔다. 어머니가 보내준 금으로 살길을 모색하려 했다. 서동은 크게 웃으며 "이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공주가 "이것은 황금이니, 백 년의 부를 이룰 수 있단다."라고 말했다. 서동이 "저는 어릴 때 고구마 뿌리를 캐던 곳에 흙처럼 쌓여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공주는 크게 놀라며 "이것은 천하의 보배로구나. 네가 금이 어디 있는지 안다면, 이 보물을 부모님의 궁전으로 옮기는 것은 어떻겠니?"라고 물었다. 서동이 "좋습니다."라고 답하자, 그들은 금을 모아 언덕처럼 쌓았다. 용화산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에 찾아가 금을 운반할 계획을 물었다. 스님이 말했다. "내가 신력으로 옮길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너라." 공주가 글을 쓰고 금을 스님 앞에 두었다. 스님은 신력을 이용해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궐 안에 금을 옮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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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後百濟甄萱===
번역
후 백제 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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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三國史本傳云。甄萱尚州加恩縣人也。咸通八年丁亥生。本姓李。後以甄為氏。父阿慈個。以農自活。光啟中據沙弗城(今尚州)自稱將軍。有四子。皆知名於世。萱號傑出。多智略。李碑家記云。真興大王妃思刀諡曰白𪀚夫人。第三子仇輪公之子波珍干善品之子角干酌珍妻王咬巴里生角干元善。是為阿慈個也。慈之弟妻上院夫人。第二妻南院夫人。生五子一女。其長子是尚父萱。二子將軍能哀。三子將軍龍蓋。四子寶蓋。五子將軍小蓋。一女大主刀金。又古記云。昔一富人居光州北村。有一女子。姿容端正。謂父曰。每有一紫衣男到寢交婚。父謂曰。汝以長絲貫針刺其衣。從之。至明盡絲於北牆下。針刺於大蚯蚓之腰。後因妊生一男。年十五。自稱甄萱。至景福元年壬子稱王。立都於完山郡。理四十三年。以清泰元年甲午。萱之三子纂逆。萱投太祖。子金剛即位。天福元年丙申。與高麗兵會戰於一善郡。百濟敗績。國王云。初萱生孺褓時。父耕于野。母餉之。以兒置于林下。虎來乳之。
번역
삼국사본전에 이르기를, 진선은 상주 가은현 사람이다. 감통 8년 정해년에 태어났으며 본 성은 이씨였으나 후에 진(甄)을 성으로 삼았다. 아버지는 아자개라 하며 농사로 생활했다. 광기 때 사부성(지금의 상주)에 거하며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였다. 네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선은 재능이 뛰어나고 지혜와 계략이 많았다. 이비가집에는 진흥 대왕의 비(妃)인 사도(思刀)를 본관으로 삼아 백장 부인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셋째 아들는 구륜공의 아들 포진간, 선품의 아들 각건작진, 처가 왕요바리에서 태어난 각건원선이 바로 아자개이다. 어머니는 자의 동생의 아내로 상원 부인이었고, 두 번째 아내는 남원 부인이다. 다섯 아들과 한 딸을 낳았다. 그 장남이 상부 선이고, 둘째 아들이 장군 능애이며, 셋째 아들이 장군 용개, 넷째 아들이 보개, 다섯째 아들이 장군 소개이다. 그리고 딸로 대주도금이 있다. 또 고기에는 옛날에 한 부자가 광주 북촌에 살았는데, 여자 하나가 있었다. 자태가 단정하여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늘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와서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한다. 아버지가 이르기를, 네가 긴 머리카락으로 바늘을 꿰어 그 옷을 찌르고 따라가라 하니, 명(明)에 이르러 실을 다하여 북쪽 담장 아래에서 바늘로 큰 지렁이의 허리를 찔렀다. 나중에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열다섯 살에 스스로 진선이라 칭하였다. 경복 원년에 임자년 왕이라 칭하며 완산군에 도읍을 정하였다. 사십삼 년에 청태 원년 갑오년에 선의 셋째 아들이 반역을 일으켰다. 선은 태조에게 투신하였고, 자금강이 즉위하였다. 천복 원년 병신년에 고려와 군대를 이끌고 일선군에서 싸워 백제가 패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국왕에 이르기를, 처음 선이 어릴 적에는 아버지가 들에서 농사짓고 어머니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아이를 숲 아래에 두고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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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鄉黨聞者異焉。及壯體貌雄奇。志氣倜儻不凡。從軍入王京。赴西南海防戌。枕戈待敵。其氣恒為士卒先。以勞為裨將。唐昭宗景福元年。是新羅真聖王在位六年。嬖豎在側。竊弄國權。綱紀紊㢮。加之以飢饉。百姓流移。群盜蜂起。於是萱竊有叛心。嘯聚徒侶。行擊京西南州縣。所至響應。旬月之間。眾至五千。遂襲武珍州自王。猶不敢公然稱王。自署為新羅西南都統行全州刺史兼御史中承上柱國漢南國開國公。龍化元年己酉也。一云景福元年壬子。是時北原賊良吉雄強。弓裔自投為麾下。萱聞之。遙授良吉職為裨將。萱西巡至完山州。州民迎勞。喜得人心。謂左右曰。百濟開國六百餘年。唐高宗以新羅之請。遣將軍蘇定方。以舡兵十三萬越海。新羅金庾信卷土歷黃山。與唐兵合。攻百濟滅之。予今敢不立都以雪宿憤乎。遂自稱後百濟王。設官分職。是唐光化三年。新羅孝恭王四年也。貞明四年戊寅。鐵原京眾心忽變。推戴我太祖即位。萱聞之遣使稱賀。遂獻孔雀扇地理山竹箭等。
번역
향당 사람들은 그를 이상하게 여겼다. 게다가 건장한 체격에 기이하고, 뜻과 기개가 뛰어나 평범하지 않았다. 군대에 들어가 왕의 도읍으로 갔고, 서남쪽 해방을 지키며 적을 기다렸다. 그의 기세는 항상 사병들보다 앞섰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부장(裨將)이 되었다. 당 소종 경복 원년에는 신라 진성왕이 재위한 지 6년째였다. 측근들이 곁에서 나라의 권력을 몰래 휘두르며 국가 기강을 문란하게 했다. 게다가 흉년까지 겹치자 백성들이 이주하고 도적떼가 창궐했다. 이에 선(萱)은 몰래 반역심을 품고 무리를 모았다. 수도 서남쪽 주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도착하는 곳마다 응답이 있었다. 열흘 남짓한 사이에 군대가 오천 명에 이르렀다. 마침내 무진주에서 스스로 왕이라 칭할 배짱은 없었으나, 자신을 신라 서남의 도통행 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국 개국공으로 임명했다. 이는 용화 원년 기유년에 해당한다. 또 하나는 경복 원년 임자년이었다. 이때 북방의 도적 양길과 웅강은 이미 그를 따르기로 했다. 선(萱)이 이를 듣고 멀리서 양길에게 부장 직책을 내렸다. 선(萱)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렀다. 주민들이 그를 맞이하며 기뻐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좌우들에게 말하기를, 백제는 건국된 지 600년이 되었다고 했다. 당 고종이 신라의 청을 받아 장군 소정방을 보내 병사 삼십만 명을 타고 바다를 건너왔다. 신라는 김유신이 직접 황산을 거쳐 돌아와 당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백제를 공격하고 멸망시켰다고 했다. 이제 감히 도읍을 세우지 않고 분노를 풀 수 있겠느냐며, 스스로 후백제왕이라 칭하고 관직과 직책을 나누어 정비했다. 이는 당 광화 3년, 신라 효공왕 4년에 해당한다. 정명 4년 무인년에 철원경의 백성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여 나를 태조로 추대하였다. 선(萱)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축하했다. 이에 공작 부채와 지리산, 죽창 등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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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萱與我太祖。陽和陰剋。獻驄馬於太祖。三年冬十月。萱率三千騎至曹物城(今未詳)太祖亦以精兵來與之角。萱兵銳。未決勝負。太祖欲權和以老其師移書乞和。以堂弟王信為質。萱亦以外甥真虎交質。十二月攻取居西(今未詳)等二十餘城。遣使入後唐稱藩。唐策授檢校太尉兼侍中判百濟軍事。依前都督行全州刺史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判置等事百濟王食邑二千五百戶。四年真虎暴卒。疑故殺。即囚王信。使人請還前年所送驄馬。太祖笑還之。天成二年丁亥九月。萱攻取近品城(今山陽縣)燒之。新羅王求救於太祖。太祖將出帥。萱襲取高鬱府(今蔚州非也)進軍族始林(一云雞林西郊)卒入新羅王都。新羅王與夫人出遊鮑石亭時。由是甚敗。萱強引夫人亂之。以王之族弟金傅嗣位。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又取國珍寶。兵仗子女。百工之巧者。自隨以歸。太祖以精騎五千。要萱於公山下大戰。太祖之將金樂崇謙死之。諸軍敗北。太祖僅以身免。而不與相抵。使盈其貫。
번역
선은 나 태조와 같았다. 양과 음이 서로 극했다. 태조에게 번총마를 바쳤다. 3년 겨울 10월. 선이 무리 삼천 기를 이끌고 조물성(지금 미상)에 이르자, 태조 역시 정예병을 이끌고 그와 맞섰다. 선의 군대는 날카로웠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태조는 힘을 빼어 적을 지치게 하려 하니, 서신을 빌어 화친을 청했다. 당숙인 왕신을 담보로 잡혔고, 선 역시 외조카 진호를 담보로 잡혔다. 12월에 거서(지금 미상) 등 스무여 개 성을 공격하여 차지했다. 사신을 보내 후당에 나라를 받아들여 봉신으로 삼게 했다. 당책은 그에게 검교태위 겸 시중판백제군사로 직위를 주었다. 이전의 도독으로서 전주지사, 해동 사면 도통지휘병마판치 등의 일을 맡기고 백제 왕에게 식읍 이천오백 호를 주었다. 4년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원한을 품고 죽인 것이라 의심했다. 곧바로 왕신을 가두었다. 사람을 보내 전년에 보낸 번총마를 돌려달라고 청했다. 태조가 비웃으며 돌려주었다. 천성 2년 정해 9월. 선이 근품성(지금 산양현)을 공격하여 불태웠다. 신라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태조가 군대를 이끌고 나가려 하자, 선이 고울부(지금 의주가 아니다)를 습격하여 진군하여 작지림(한 이는 계림 서교)을 거쳐 신라 왕도에 들어갔다. 신라 왕과 부인이 바석정에서 유람할 때, 이로 인해 크게 패배했다. 선이 억지로 부인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왕의 사촌 금부사에게 자리를 주었다. 그 후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을 빼앗았고, 나라의 진귀한 보물과 병장, 자녀들, 백공의 재주까지 모두 빼앗아 돌아갔다. 태조는 정예 기병 오천을 이끌고 선을 공산 아래에서 크게 싸우게 했다. 태조의 장수 금락과 숭겸이 죽임을 당했다. 여러 군대가 패배했고, 태조는 몸만 피할 뿐 상대와 맞서지 못했다. 그 틈을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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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萱乘勝轉掠大木城(今若木)京山府康州攻缶谷城。又義成府之守洪述。拒戰而死。太祖聞之曰。吾失右手矣四十二年庚寅。萱欲攻古昌郡(今安東)大舉。而石山營寨。太祖隔百步而郡北瓶山營寨。累戰萱敗。獲侍郎金渥。翌日萱收卒襲破順城。城主元逢不能禦。棄城宵遁。太祖赫怒。貶為下枝縣(今豊山縣。元逢本順城人故也)新羅君臣以衰季。難以復興。謀引我太祖。結好為援。萱聞之又欲入王都作惡。恐太祖先之。寄書于太祖曰。昨者國相金雄廉等將召足下入京。有同鱉應黿聲。是欲鷃披準翼。必使生靈塗炭宗社丘墟。僕是以先著祖鞭。獨揮韓鉞。誓百寮如皎日。諭六部以義風。不意姦臣遁逃。邦君薨變。遂奉景明王表弟獻康王之外孫。勸即尊位。再造危邦。喪君有君於是乎在。足下勿詳忠告。徒聽流言。百計窺覦。多方侵擾。尚不能見僕馬首。拔僕牛毛。冬初都頭索湘束手星山陣下。月內左將金樂曝骸美利寺前。殺獲居多。追禽不小。強羸若此。勝敗可知。所期者。掛弓於平壤之樓。
번역
선(萱)이 승리하여 낙목성(今 若木)과 경산부 강주에 있는 감곡성을 공격하였다. 또 의성부의 수비수 홍술을 꺾었다. 싸우기를 거부하다 죽었다. 태조가 이를 듣고 말하기를, 내가 오른손을 잃은 지 사십이 년 경인년이었다. 선(萱)은 고창군(今 安東)을 크게 공격하려 했고, 석산에 진을 쳤다. 태조는 백 보 거리에 있는 군 북병산의 진을 쳤다. 계속 싸우다가 선(萱)은 패배하고 시랑 김악을 얻었다. 다음 날 선(萱)이 병사들을 이끌고 순성을 습격하여 무너뜨렸다. 성주 원봉은 막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밤에 도망쳤다. 태조는 크게 노하여 하지현(今 豊山縣, 원봉 본래 순성 사람이었기 때문)으로 좌천시켰고 신라의 군신들을 쇠퇴하게 하여 다시 일으키기 어려웠다. 나를 이끌어 오도록 계획하고 좋은 관계를 맺어 도움을 받으려 했다. 선(萱)은 이를 듣고 또 왕도에 들어가서 악행을 저지르려 하자, 태조가 먼저 나서서 막을까 두려워했다. 태조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지난날 국상 김웅렴 등이 당신을 조정으로 부르려 한다. 전번에 별응지성(鱉應<0xE9><0xBB><0xBF>)과 같은 소리가 들렸다. 이는 마치 새들이 날개를 펼치려는 것 같으니, 반드시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을 흙먼지로 만들고 종묘와 사당을 폐허로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조부의 채찍을 들고 홀로 한월(韓鉞)을 휘두르며 백성들에게 밝은 달빛처럼 빛나도록 맹세했다. 여섯 부서에 의로운 기풍을 전파하였다. 뜻하지 않게 간신들이 도망치고 나라의 군주가 죽어 변하여, 마침내 경명왕의 사촌 동생인 헌강왕의 외손자에게 존귀한 자리에 오르도록 권유받았다.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만들려 하니, 임금이 있고 군주가 있는 것이 어찌 여기에 있겠는가. 당신은 충성스러운 말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그저 떠도는 소문만 듣고 백 가지 계략으로 탐내며 여러 방면에서 침범할 뿐인데도 아직 나의 말과 짐승의 털을 뽑아낼 수 없다. 겨울 초에 도두 소상(索湘)이 손을 묶어 성산 진 아래에 머물렀다. 달 안에 좌장 김악은 해골을 드러내고 미리사 앞에 있었다. 살생하고 얻는 것이 많았으며, 사냥하는 것도 적지 않았다. 강건하여 이렇다면 승패를 알 수 있다. 바라는 것은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거는 것이다.
기이 제2문단 30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飲馬於浿江之水。然以前月七日。吳越國使班尚書至。傳王詔旨。知卿與高麗。久通和好。共契鄰盟。比因質子之兩亡。家失和親之舊好。互侵疆境。不戢干戈。今專發使臣。赴卿本道。又移文高麗。宜各相親比。永孚于休。僕義篤尊王。情深事大。及聞詔諭。即欲祗承。但虜足下欲罷不能困而猶鬥。今錄詔書寄呈。請留心詳悉。且免獹迭憊。終必貽譏。蚌𪃬相持。亦為所笑。宜迷復之為誡。無後悔之自貽。□□二年正月。太祖答曰。伏奉吳越國通使班尚書所傳詔旨書一道。兼蒙足下辱示長書敘事者。伏以華軺膚使。爰到制書。尺素好音。兼蒙教誨。捧芝檢而雖增感激。闢華牋而難遣嫌疑。今拖迴軒。輒敷危衽僕仰承天假。俯迫人推。過叨將帥之權。獲赴經綸之會。頃以三韓厄會。九土凶荒。黔黎多屬於黃巾。田野無非其赤土。庶幾弭風塵之警。有以救邦國之災。爰自善鄰。於為結好果見數千里農桑樂業。七八年士卒閑眠。及至癸酉年。維時陽月。忽焉生事。至乃交兵足下始輕敵以直前。
번역
패강의 물을 마셨다. 그러나 지난달 칠일에 오월나라 사신 반상서가 와서 왕의 조서를 전했다. 경과 고라와 오래도록 화친하고 함께 이웃으로서의 맹약을 맺었으나, 두 나라에 사람이 잡혀가면서 집안의 화목했던 옛 정이 사라졌다. 서로 국경을 침범하며 무기를 들지 않았다. 이제는 특별히 사신을 보내 경의 본도로 갔고, 또 문서를 옮겨 고라에게 보냈다. 각자 서로 친하게 지내며 영원한 믿음을 쌓아야 한다. 부하들이 의리를 깊이 여기고 왕을 존중하는 마음은 크다. 조서를 듣고 즉시 받들고자 하였으나, 포로가 아래에 있어 그만두지 못하고 여전히 다투었다. 이제 조서와 글을 보내드리니 마음에 새겨 자세히 살피기를 청한다. 부디 헛된 걱정으로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끝내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조개껍데기처럼 서로 붙잡는 것도 사람들의 웃음거리일 뿐이다. 부디 이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후회하지 않도록 하라. □□년 정월에 태조가 답하기를, 오월나라 통사 반상서가 전한 조서와 더불어 아래에서 모욕적으로 보여준 긴 글로 사연을 엮은 것을 받들었다. 이에 화려한 수레를 타고 보내어 마침내 이 글을 지었다. 비단과 좋은 소리가 좋고, 가르침을 받아 감격스러움을 느끼며, 화려하게 꾸미었으나 보내기 어려워 의심이 생겼다. 이제 돌아와 거실에 머물면서 위태로운 옷차림으로 하늘의 임시 휴가를 누리며 사람들의 추대를 받았다. 지나치게 장수로서의 권한을 얻어 경륜을 펼칠 기회를 얻었다. 근래 삼한이 어려움을 겪고 아홉 땅이 황폐하며, 백성들이 대부분 황건적에 속해 있어 들판에는 그저 붉은 흙뿐이었다. 그리하여 바람과 먼지의 재앙을 막을 힘이 있었다. 이에 스스로 이웃 나라로 가서 좋은 결실을 이루어 수천 리 동안 농사짓는 즐거움을 보았다. 칠팔 년 동안 사졸들이 한가롭게 잠들어 있다가, 마침내 계유년에 지지양월에 갑자기 일이 생겼다. 이르러서야 비로소 병사를 보내 아래가 적을 만하다고 여겨 곧장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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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馬利(疑伊山郡)城戮隨晤於纛下。拔任存(今大興郡)之日。刑積等數百人捐軀。破清川縣(尚州領內縣名)之時。□□等四五輩授首。桐藪(今桐華寺)望旗而潰散。京山銜璧以投降。康州則自南而來羅府則自西移屬。侵攻若此。收復寧遙必期泜水營中。靈張耳千般之恨。烏江岸上成漢王一揵之心竟息風波。永清寰海。天之所助。命欲何歸。況承吳越王殿下。德洽包荒。仁深字小。特出綸於舟禁。諭戢難於青丘。既奉訓謀。敢不尊奉。若足下祗承睿旨。悉戢凶機。不唯副上國之仁恩。抑可紹東海之絕緒。若不過而能改。其如悔不可追(書乃崔致遠作也)。長興三年。甄萱臣龔直勇而有智略。來降太祖。萱捉龔直二子一女。烙斷股筯。秋九月。萱遣一吉。以舡兵入高麗禮城江。留三日。取鹽白真三州船一百艘。焚之而去(云云)清泰元年甲午。萱聞太祖屯運州(未詳)遂簡甲士。蓐食而至。未及營壘。將軍黔弼以勁騎擊之。斬獲三千餘級。熊津以北三十餘城。聞風自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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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의심 이산군)성이 멸하고 수오가 묘에 이르렀다. 임존(지금 대흥군)의 날에 형적 등 수백 명이 목숨을 바쳤다. 청천현(상주령 내 현명)을 깨뜨릴 때 □□ 등 사오 배가 목을 바쳤다. 동수(지금 동화사)에서 깃발을 바라보다가 흩어졌다. 경산에서 옥을 물어 바치며 항복했다. 강주는 남쪽에서, 나부(羅府)는 서쪽에서 이끌려 왔다. 침공이 이와 같으니, 고향을 되찾는 것은 반드시 횡수영에서 기약할 것이다. 영장(靈張)은 천 가지 한을 품었다. 오강(烏江) 언변에 한나라 왕의 한 가닥 마음이 마침내 바람과 물결을 멎게 했다. 영청한 해에 하늘의 도움을 받아 무슨 뜻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하물며 오월왕 전하를 받들어 덕이 널리 퍼지고 어짊이 깊은 자소(字小)라. 특별히 배에 깃발을 내리며 금지했다. 억지로 청구에 이르기 어려우니, 이미 가르침을 받들었으니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귀하께서 어루나의 지엄한 뜻을 받들어 모두 흉한 기운을 억누르지 못한다면, 다만 상국의 인은을 잇는 것뿐만 아니라 동해의 끊어진 맥을 이어갈 수도 있다. 만약 지나치지 않고 고칠 수 있다면, 그 후회는 되돌릴 수 없다(글은 최치원이 지었다). 장흥 3년. 진선(甄萱)의 신하 공직(龔直)은 용맹하고 지략이 있어 태조에게 와서 항복했다. 선은이 공직의 두 아들과 한 딸을 붙잡아 가죽을 태웠다. 가을 아홉 번째 달. 선은이 한 기를 보내 배를 타고 고려 예성강으로 들어갔다. 사흘을 머물며 소금과 백진 삼주에서 배 백 척을 가져가 불태우고 떠났다(등등). 청태 원년 갑오. 선은이 태조가 둔운주(미상)에 진을 치자 간갑사(甲士)를 보내 식량으로 도착했다. 진지(陣地)에 이르기도 전에 장군 검필이 기병으로 공격했다. 삼천여 명을 베어 죽였다. 웅진(熊津)에서 북쪽으로 서른여 개 성이 바람을 타고 스스로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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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萱麾下術士宗訓醫者之謙勇將尚逢雀弼等降於太祖。丙申正月。萱謂子曰。老夫新羅之季。立後百濟名有年于今矣。兵倍於北軍。尚爾不利。殆天假手為高麗。蓋歸順於北王。保首領矣。其子神劍龍劍良劍等三人皆不應。李磾家記云。萱有九子。長曰神劍(一云甄成)二子太師謙腦。三子佐承龍述。四子大師聰智。五子大阿干宗祐。六子闕。七子佐承位興。八子大師青丘。一女國大夫人。皆上院夫人所生也。萱多妻妾。有子十餘人。第四子金剛。身長而多智。萱特愛之。意欲傳位。其兄神劍良劍龍劍知之憂㦖。時良劍為康州都督。龍劍為武州都督。獨神劍在側。伊飱能奐使人往康武二州。與良劍等謀。至清泰二年乙未春三月。與英順等勸神劍。幽萱於金山佛宇。遣人殺金剛。神劍自稱大王。赦境內(云云)初萱寢未起。遙聞宮庭呼㖤聲。問是何聲歟。告父曰。玉年老暗於軍國政要。長子神劍攝父王位。而諸將歡賀聲也。俄移父於金山佛宇。以巴達等壯士三十人守之。童謠曰。可憐完山兒。
번역
선(萱)의 휘하 술사 종훈과 의자 겸용장 상봉, 작필 등이 태조에게 항복했다. 병신년 정월이었다. 선이 아들에게 말하였다. 늙은 내가 신라의 마지막이다. 뒤를 이어 백제에 이름을 떨칠 만한 세월이 지금에 이르렀다. 군대가 북방군보다 배가 많으니, 상(尚) 너는 형세가 좋지 않다. 아마 하늘이 손을 빌려 고려로 만들려는 것이다. 마침 북왕에게 순응하여 우두머리 자리를 지키게 될 것이다. 그 아들 신검, 용검, 양검 등 세 사람은 모두 어울리지 않는다. 이렴의 가기(家記)에 이르기를, 선에게는 아홉 아들이 있었다. 맏아들은 신검(일부는 진성이라 함), 둘째 아들은 태사 겸뇌, 셋째 아들은 좌승 용술, 넷째 아들은 대사 총지, 다섯째 아들은 대아간 종우, 여섯째 아들은 궐, 일곱째 아들은 좌승 위흥, 여덟째 아들은 대사 청구, 그리고 딸 한 명의 국대부인이었다. 모두 상원 부인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다. 선은 많은 아내와 첩을 두어 열댓 명의 아들이 있었다. 넷째 아들은 금강으로,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 선이 특별히 사랑했다.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였다. 그의 형 신검과 양검, 용검은 이로 인해 근심하였다. 이때 양검은 강주도독이었고, 용검은 무주도독이었다. 오직 신검만이 곁에 있었다. 이부 능환이 사람을 보내 강주와 무 두 주에 가도록 하였다. 양검 등과 모의하였다. 청태 2년 을미년 봄 삼월에 영순 등과 함께 신검을 권유하여 유선(幽萱)을 금산 불사로 피신시켰다. 사람을 보내 금강을 죽이게 하였다. 신검은 스스로 대왕이라 칭했다. 경내에서 (말줄임) 처음 선이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을 때, 멀리 궁궐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가 물으니,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예년(玉年)이 군국 정사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하니, 맏아들 신검이 아버지의 왕위를 차지하였고, 여러 장수들이 축하하는 소리였다. 곧 아버지를 금산 불사로 옮겨 바달 등 장사 서른 명을 지키게 하였다. 동요에 이르기를, 가련한 완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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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失父涕連洒。萱與後宮年少男女二人侍婢古比女內人能又男等囚繫。至四月。釀酒而飲醉守卒三十人。而與小元甫香文吳琰忠質等以海路迎之。既至。以萱為十年之長。尊號為尚父。安置于南宮。賜楊州食邑田莊。奴婢四十口。馬九匹。以其國先來降者信康為衙前。甄萱婿將軍英規密語其妻曰。大王勤勞四十餘年。功業垂成。一旦以家人之禍失地。從於高麗。夫貞女不可二夫。忠臣不事二主。若捨已君。以事逆子耶。何顏以見天下之義士乎。況聞高麗王公仁厚懃儉。以得民心。殆天啟也。必為三韓之主。盍致書以安慰我王。兼慇懃於王公。以圖後來之福乎。妻曰。子之言是吾意也。於是天福元年丙申二月。遣人致意於太祖曰。君舉義旗。請為內應以迎王師。太祖喜。厚賜其使者遣之。謝英規曰。若蒙恩一合。無道路之梗。即先致謁於將軍。然後升堂拜夫人。兄事而姊尊之。必終有以厚報之。天下鬼神皆聞此語。六月。萱告太祖。老臣所以投身於殿下者。願仗殿下威稜。以誅逆子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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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잃고 눈물을 흘리며 뿌렸다. 현과 후궁의 젊은 남녀 두 명과 시비, 여자 노비, 안인, 그리고 남자 등 포로들이 있었다. 사월이 되자 술을 빚어 마시고 취한 수졸 삼십 명이 있었다. 그들과 소원보, 향문, 오염충질 등이 바닷길로 맞이했다. 도착하자 현은 열 살의 장성으로 대접받아 상부라는 존호를 받았고 남궁에 자리 잡았다. 양주에 식읍과 전장을 하사받았으며 노비 사십 구와 말 아홉 필을 받았다. 그 나라에서 먼저 와서 항복한 신강을 아전으로 삼았다. 현의 사위 장군 영규가 그의 아내에게 비밀히 말했다. 대왕께서 마흔여 년 동안 힘써 일하셨고 공업이 거의 완성되었다. 한순간에 집안의 화를 입어 땅을 잃었고 고구려로 피신했다. 진실한 여인은 두 남편을 가질 수 없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만약 이미 돌아가신 군주를 버리고 역모를 꾸미는 아들을 섬긴다면, 세상의 의로운 사람들에게 얼굴을 들고 보일 수 있겠는가. 하물며 고구려 왕공께서 어질고 너그럽고 부지런하며 검소하여 백성의 마음을 얻으셨으니, 이는 하늘이 내린 계시이다. 반드시 삼한의 주인이 될 것이다. 현은 글을 써서 우리 왕께 위로를 전했다. 또한 왕공께 공손하게 하여 나중에 복록을 이루고자 했다. 아내가 말했다. 자네 말이 나의 뜻과 같다. 이에 천복 원년 병신 2월에 사람을 보내 태조에게 뜻을 전하며, 의기(義旗)를 들고 내응하여 왕사를 맞이해 줄 것을 청했다. 태조가 기뻐하며 그 사자를 후하게 보내주었다. 영규는 감사하며 말했다. 만약 은혜를 한 번 입게 된다면 길이 막힐 곳이 없을 것이다. 먼저 장군께 문안을 드린 후에 높은 자리에 올라 부인으로 배례하겠다. 형님은 일을 하고 누이는 존경하니, 반드시 두터운 보답이 있을 것이다. 천하의 귀신과 신들까지 이 말을 들었다. 육월에 현이 태조에게 고했다. 늙은 신이 전하께 몸을 의탁한 것은 오직 전하의 위엄으로 역모를 꾸미는 아들을 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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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伏望大王借以神兵。殲其賊亂。臣雖死無憾。太祖曰。非不欲討之。待其時也。先遣太子及正將軍述希領步騎十萬。趣天安府。秋九月。太祖率三軍至天安。合兵進次一善。神劍以兵逆之甲午。隔一利川相對。王師背艮向坤而陳。太祖與萱觀兵。忽白雲狀如劍戟起。我師向彼行焉。乃鼓行而進。百濟將軍孝奉德述哀述明吉等。望兵勢大而整。棄甲降於陣前。太祖勞慰之。問將帥所在。孝奉等曰。元帥神劍在中軍。太祖命將軍公萱等。三軍齊進挾擊。百濟軍潰北至黃山炭峴。神劍與二弟將軍富達能奐等四十餘人生降。太祖受降。餘皆勞之。許令與妻子上京。問能奐曰。始與良劍等密謀囚大王立其子者。汝之謀也。為臣之義。當如是乎。能奐俛首不能言。遂命誅之。以神劍僭位為人所脅。非其本心。又且歸命乞罪。特原其死。甄萱憂懣發疽。數日卒於黃山佛舍。九月八日也。壽七十。太祖軍令嚴明。士卒不犯秋毫。州縣安堵。老幼皆呼萬歲。謂英規曰。前王失國後。其臣子無一人慰之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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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망대왕이 신병을 빌려 그들의 난을 섬멸하게 하였다. 신은 비록 죽어도 한탄할 것이 없다. 태조가 말하였다. 싸우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먼저 태자와 정장군 술희에게서 보병과 기병 열만 명을 이끌고 천안부로 향하게 하였다. 가을 아홉째 달에 태조가 삼군을 이끌고 천안에 이르러 합병하여 일선으로 진격하였다. 신검이 병력으로 역습하여 갑오에 이르렀다.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왕사(王師)는 艮을 등지고 坤을 향하여 진을 쳤다. 태조와 현관이 병력을 살폈다. 갑자기 흰 구름이 검과 창처럼 일어나더니, 우리 군대가 그쪽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북을 치며 진격하였다. 백제 장군 효봉덕, 술애, 술명길 등이 있었다. 바라보는 병세가 크고 정비되어 있었다. 갑옷을 버리고 진전에서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을 위로하였다. 장수들의 소재를 물었다. 효봉 등이 말하였다. 원수인 신검이 중군에 있다. 태조가 장군 공현 등에게 명하여 삼군이 함께 진격하여 공격하게 하였다. 백제군은 무너져 북쪽 황산탄현까지 도망쳤다. 신검과 이제 장군 부달능환 등 사십여 명이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을 받아들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그들을 위로하였다. 허령에게와 아내들에게 상경하도록 명하였다. 능환에게 물었다. 처음부터 양검 등과 비밀리에 모의하여 대왕을 가두고 그의 아들을 세우려 한 것이 너의 계책이었느냐. 이것이 신의 의리였느냐. 능환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를 죽이라고 명하였다. 신검이 간신히 자리를 차지하려 한 것이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었고, 본심이 아니었다. 게다가 돌아와 목숨을 구걸하였다. 특별히 그의 죽음을 용서하였다. 진현관은 근심으로 인해 종기가 나서 며칠 동안 황산 불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홉째 달 여덟째 날이었다. 나이 일흔 살이었다. 태조 군대의 명령은 엄명하여 사졸들은 조금도 범하지 않았다. 주현은 평안하였다. 노약자 모두 만세를 부르짖었다. 이를 영규라 칭하였다. 이전 왕이 나라를 잃은 후, 그의 신하 중 위로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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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獨卿夫妻千里嗣音。以致誠意。兼歸美於寡人。其義不可忘。許職左承。賜田一千頃。許借驛馬三十五匹以迎家人。賜其二子以官。甄萱起唐景福元年。至晉天福元年。共四十五年。丙申滅史論曰。新羅數窮道喪。天無所助。民無所歸。於是群盜投隙而作。若猬毛然。其劇者弓裔甄萱二人而已。弓裔本新羅王子而反。以家國為讎至斬先祖之畫像。其為不仁甚矣。甄萱起自新羅之民。至新羅之祿。包藏禍心。幸國之危。侵軼都邑。虔劉君臣若禽獸。實天下之元惡。故弓裔見棄於其臣。甄萱產禍於其子。皆自取之也。又誰咎也。雖項羽李密之雄才。不能敵漢唐之興。而況裔萱之凶人。豈可與我太祖相抗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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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공경의 부부가 천 리를 따라 소식을 전했다. 성의를 다하여 나에게 돌아와 아름다움을 베풀었으니, 그 은혜는 잊을 수 없다. 좌승직을 내리고 땅 일천 경을 하사하였다. 또한 가족을 맞이할 역마 삼십오 필을 빌려주었다. 두 아들에게 관직을 주었다. 진선은 당경복 원년에 일어나 진천복 원년까지, 총 사십오 년 동안 있었다. 병신년에 역사서에 기록하기를, 신라의 도가 다하고 하늘의 도움도 없으며 백성이 돌아갈 곳이 없다 하니, 이에 무리들이 틈을 타서 일어났다. 마치 가시털 같았다. 그 중 극심한 자는 궁예와 진선 두 사람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 왕자였으나 반역하여 나라를 원수로 삼아 선조의 그림까지 베었다 하니, 이는 어짊이 지극히 부족하다. 진선은 신라 백성 출신으로 신라의 녹을 얻어, 깊숙한 화근을 품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 도읍지를 침범하여 경류 군신들을 새와 짐승처럼 대하였다. 실로 천하의 가장 큰 악이다. 그러므로 궁예는 그 신하들에게 버림받았고, 진선은 자신의 아들로 화를 일으켰으니,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또 누가 책망할 수 있겠는가. 비록 항우나 이밀 같은 영웅의 재주라도 한 당나라의 흥성함에 대적할 수 없거늘, 하물며 예와 선 같은 흉악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에게 맞설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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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駕洛國記(文廟朝。大康年間。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今略而載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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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기(문묘조. 대강 연간. 금관지주 사문인 소찬함. 지금 간략히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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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容貌甚偉。仍坐於床。眾庶拜賀。盡恭敬止。日日而大。踰十餘晨昏。身長九尺則殷之天乙。顏如龍焉則漢之高祖。眉之八彩則有唐之高。眼之重瞳則有虞之舜。其於月望日即位也。始現故諱首露。或云首陵(首陵是崩後諡也)。國稱大駕洛。又稱伽耶國。即六伽耶之一也。餘五人各歸為五伽耶主。東以黃山江。西南以濸海。西北以地理山。東北以伽耶山南而為國尾。俾創假宮而入御。但要質儉。茅茨不剪。土階三尺。二年癸卯春正月。王若曰。朕欲定置京都。仍駕幸假宮之南新沓坪(是古來閑田。新耕作故云也。畓乃俗文也)四望山嶽。顧左右曰此地狹小如蓼葉然而秀異。可為十六羅漢住地。何況自一成三。自三成七。七聖住地。固合于是。托土開疆。終然允臧歟。築置一千五百步周迴羅城。宮禁殿宇。及諸有司屋宇。虎庫倉廩之地。事訖還宮。遍徵國內丁壯人夫工匠。以其月二十日資始金陽。暨三月十日役畢。其宮闕屋舍。候農隙而作之。經始于厥年十月。逮甲辰二月而成。涓吉辰御新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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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이 매우 위대하였다. 여전히 침상에 앉아 있었고, 백성들이 절하며 축하하였다. 모두 공경심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날마다 커져서 열흘이 넘는 아침저녁을 거쳤다. 키가 아홉 자가 되자 하늘의 아들 같았고, 얼굴이 용과 같았다. 눈썹이 여덟 가지 색을 띠자 당나라의 고조 같았으며, 눈동자가 깊은 구슬 같자 우나라의 순임금 같았다. 그가 달이 차는 날에 즉위하였으니, 비로소 옛 이름인 수로가 드러났다. 혹은 수릉(首陵은 붕후의 시호임)이라 하였다. 나라 이름은 대가낙(大駕洛)이라 하고, 또 가야국이라 하였다. 즉 여섯 가야 중 하나였다.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각 다섯 가야의 주인이 되었다. 동쪽으로는 황산강을, 남서쪽으로는 훼해(濸海)를, 북서쪽으로는 지리산을, 북동쪽으로는 가야산남을 국가의 끝으로 삼았다. 임시 궁궐을 짓고 들어가기를 원하였으나, 다만 소박하고 검소하기를 원하였다. 짚으로 엮은 초가에 자르지 않은 풀을 깔고, 흙으로 만든 계단은 세 자 길이였다. 2년 계묘년 봄 정월에 왕이 말하였다. 짐이 수도를 정하고자 한다. 이에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이는 예로부터 한가한 밭이었으며, 새로 경작하여 그리 이른 것이다. 밭은 속된 글이다) 사방의 산악을 바라보며 좌우를 돌아보며 이 땅이 고사리 잎처럼 좁지만, 실로 빼어나다. 열여섯 로한이 머무를 곳이 될 수 있다. 하물며 일성삼(一成三)부터 삼성칠(三成七)까지, 일곱 성인이 머무를 곳이 되니, 마땅히 여기에 합당하다. 흙으로 개척하여 끝내 허락받았는가. 일천오백 보를 돌아 둘러 로성을 쌓고, 궁궐과 전각, 그리고 여러 관청의 건물과 호랑이 창고, 창고의 땅을 마련하였다. 일이 끝나자 궁으로 돌아와 국내의 건장한 남자와 기술자들을 두루 거느렸다. 그 달 스무일에 금양을 시작하여, 삼월 열일에 역사가 끝났다. 그 궁궐과 집들은 농사 틈을 이용하여 지었다. 시작은 그 해 10월에 이르러, 갑진년 2월에 완성되었다. 건길진에 새 궁궐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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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理萬機而懃庶務。忽有琓夏國含達王之夫人妊娠。彌月生卵。卵化為人。名曰脫解。從海而來。身長三尺。頭圓一尺。悅焉詣闕。語於王云。我欲奪王之位。故來耳。王答曰。天命我俾即于位。將令安中國而綏下民。不敢違天之命。以與之位。又不敢以吾國吾民。付囑於汝。解云。若爾可爭其術。王曰可也。俄頃之間。解化為鷹。王化為鷲。又解化為雀。王化為鸇。于此際也。寸陰未移。解还本身。王亦復然。解乃伏膺曰。僕也適於角術之場。鷹之鷲。雀之於鸇。獲免焉。此蓋聖人惡殺之仁而然乎。僕之與王。爭位良難。便拜辭而出。到麟郊外渡頭。將中朝來泊之木道而行。王竊恐滯留謀亂。急發舟師五百艘而追之。解奔入雞林地界。舟師盡還。事記所載多異與新羅。屬建㱏二十四年戊申七月二十七日。九干等朝謁之次獻言曰。大王降靈已來。好仇未得。請臣等所有處女絕好者。選入宮闈。俾為伉儷王曰。朕降于茲天命也。配朕而作后。亦天之命。卿等無慮。遂命留天干押輕舟。持駿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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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가지 기계를 다스리며 여러 잡무를 처리하였다. 문득 하나라 달아국 함달왕의 부인이 임신한 것이 있었다. 한 달 만에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이 사람으로 변하여 탈해라 불렸다. 바다에서 와서 키가 세 자나 되고 머리가 한 자 정도 되었다. 기뻐하며 궁궐로 나아가 왕에게 말하기를, "제가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하늘의 명으로 내가 이 자리에 있게 되었으니, 중국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이다. 하늘의 명을 거스를 수 없다. 너에게 나의 나라와 백성을 맡길 수도 없다." 하자 해가 말하기를, "만약 당신이 그 재주로 나를 이길 수 있다면요." 왕이 말하기를, "그럴 수 있다." 잠시 후에 해는 독수리로 변하고, 왕은 봉황으로 변했다. 또 해는 참새로 변하고, 왕은 꿩으로 변하였다. 이때에까지도 거리가 옮겨지지 않았다. 해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 또한 그러하였다. 해가 엎드려 말하기를, "제가 적절한 기술을 익히는 장소에 머물렀습니다. 독수리나 참새 같은 것이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혹 성인께서 살생하는 것을 싫어하시는 인심 때문입니까?" 해가 왕에게 말하기를, "자리를 다투는 것은 어려우니,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신라 근교에 이르러 배로 멈추는 나무 길을 따라 가려 하였다. 왕이 혹여 머물며 난을 꾸밀까 두려워 급히 배 군사 오백 척을 보내 추격하였다. 해가 계림 지역으로 도망치자, 배 군사는 모두 돌아갔다. 이 일은 기록에 많이 다르며 신라와 관련 있다. 건탑 24년 무신년 7월 27일, 구간 등이 임금께 아뢰기를, "대왕께서 내려오실 때가 왔습니다. 원수(仇)를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신하들 중 처녀로 절세미인인 이들을 뽑아 궁궐에 들여와 부부로 삼게 해 주십시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다. 나를 아내로 맞아 후궁으로 삼는 것 또한 하늘의 명이니, 너희들은 염려하지 마라." 그리하여 천간에게 남아 가벼운 배를 타고 준마를 지니게 하였다.
기이 제2문단 39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妾是阿踰陀國公主也。姓許名黃玉。年二八矣。在本國時。今年五月中。父王與皇后顧妾而語曰。爺孃一昨夢中。同見皇天上帝。謂曰。駕洛國元君首露者。天所降而俾御大寶。乃神乃聖。惟其人乎。且以新花家邦。未定匹偶。卿等須遣公主而配之。言訖升天。形開之後。上帝之言。其猶在耳。儞於此而忽辭親向彼乎。往矣。妾也浮海遐尋於蒸𭫘。移天敻赴於蟠桃。螓首敢叨龍顏是近。王答曰。朕生而頗聖。先知公主自遠而屆。下臣有納妃之請。不敢從焉。今也淑質自臻。眇躬多幸。遂以合歡。兩過清宵。一經白晝。於是遂還來船。篙工楫師共十有五人。各賜糧粳米十碩。布三十疋。令歸本國。八月一日迴鑾。與后同輦。媵臣夫妻齊鏕並駕。其漢肆雜物。感使乘載。徐徐入闕。時銅壺欲午。王后爰處中宮。敕賜媵臣夫妻。私屬。空閑二室分入。餘外從者以賓館。一坐二十餘間。酌定人數。區別安置。日給豐羨。其所載珍物。藏於內庫。以為王后四時之費。一日上語臣下曰。九干等俱為庶僚之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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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유타국 공주이다. 성은 허,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스물여덟 살이다. 본국에 있을 때 올해 오월 중이었다. 아버지와 왕후가 나를 부르며 말하기를, "부모님께서 어젯밤 꿈에 하늘의 임금님을 함께 보았다. 말씀하시기를, 낙나라의 원군(元君)이 머리를 드러낸 자는 하늘이 내려 큰 보물을 맡기도록 하셨으니, 이는 신성하고 성스러운 일이다. 오직 그 사람에게만 그러하다. 게다가 새롭게 꽃피운 나라가 아직 짝을 정하지 못했으니, 너희들은 공주를 보내 짝지어 주어야 한다." 하고 말씀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형체가 사라진 후에 임금님의 말씀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이곳에 머물며 갑자기 친정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가거라. 나는 바다를 떠돌아 증원(蒸<0xF0><0xAD><0xAB><0x98>)에서 멀리 찾아 헤매고, 하늘의 수레를 타고 반도(蟠桃)로 갔다. 옥 같은 머리가 감히 용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왕께서 답하시기를, "짐은 태어날 때부터 매우 성스러웠다. 먼저 공주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것을 아셨다. 신하들이 폐하를 모시겠다고 청했으나, 감히 따르지 못했다. 이제는 숙질(淑質)이 스스로 이루어졌고, 몸가짐도 여러 번 복을 누렸다. 마침내 합환(合歡)과 밤새도록 함께하며, 낮이 밝아올 때까지 지냈다." 하고 말씀하시더니 다시 배를 타고 돌아왔다. 노 젓는 사람과 뱃사공을 포함하여 열다섯 사람이 각자 곡식 쌀 열 되와 비단 삼십 필씩을 하사받고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팔월 1일에 돌아오면서 왕후와 함께 가마를 타고, 친척 부부들이 나란히 가마를 끌었고, 그 나라의 잡다한 물건들을 실어 운반하게 하였다. 천천히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동궁이 점심시간 무렵이었다. 왕후께서 중궁에 계셨고, 사사로이 친척 부부에게 빈 공간 두 개를 나누어 주었고, 나머지 수행원들은 손님관에 스무여 칸을 마련하여 배치하였다. 인원을 정하고 구별하여 안치하였으며, 나날의 생활은 풍족했다. 그곳에 실린 진귀한 물건들은 내고에 보관되었는데, 이는 왕후께서 사계절 동안 쓸 비용이었다. 어느 날 위대하신 분이 신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구간(九干) 등 모두 서리 관료의 으뜸이다."
기이 제2문단 40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元君乃每歌鰥枕。悲嘆良多。隔二五歲。以獻帝立安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而殂落。壽一百五十八歲矣。國中之人若亡天。只悲慟甚於后崩之日。遂於闕之艮方平地。造立殯宮。高一丈。周三百步而葬之。號首陵王廟也。自嗣子居登王洎九代孫仇衝之享是廟。須以每歲孟春三之日。七之日。仲夏重五之日。仲秋初五之日。十五之日。豐潔之奠。相繼不絕。洎新羅第三十王法敏龍朔元年辛酉三月日。有制曰。朕是伽耶國元君九代孫仇衝王之降于當國也。所率來子世宗之子率友公之子庶云匝干之女文明皇后寔生我者。茲故元君於幼沖人。乃為十五代始祖也。所御國者已曾敗。所葬廟者今尚存。合于宗祧。續乃祀事。仍遣使於黍離之趾。□近廟上上田三十頃。為供營之資。號稱王位田。付屬本土。王之十七代孫賡世級干祇稟朝旨。主掌厥田。每歲時釀醪醴。設以餅飯茶果庶羞等奠。年年不墜。其祭日不失居登王之所定年內五日也。芬苾孝祀。於是乎在於我。自居登王即位己卯年置便房。降及仇衝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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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군께서는 늘 상복을 입고 노래하며 슬픔을 많이 애도하셨다. 25년이 지나, 현제(獻帝)가 안평 4년(기원전 197년) 기묘년 3월 23일에 돌아가셨다. 상을 백오십팔 세에 이르셨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하늘이 무너진 것만 같았다. 후붕(后崩)의 날보다 더 슬퍼하며, 궐의 근방 평지에 빈궁을 지으셨다. 높이 한 장에, 주위를 삼백 보로 하여 장사 지내셨다. 그곳을 수릉왕묘라 칭하셨다. 이후 사제(嗣子)인 거등왕부터 아홉 대손인 구충(仇衝)이 이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매년 춘삼월 3일, 칠일, 하중(仲夏)의 열엿샛날, 추초(仲秋)의 오일, 십오일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 신라의 서른 번째 왕 법민(法敏)이 용락 원년 신유년 3월에 다음과 같이 제도를 세웠다. "짐은 가야국의 원군 아홉 대손 구충왕이 이 나라에 내려온 것이다. 그가 이끌고 온 자는 세종의 아들, 유공의 아들, 서운(庶雲)의 딸 문명황후가 실로 나를 낳은 분이다. 이로써 원군은 어릴 때부터 충인(沖人)이었으며, 열다섯 대의 시조이다. 그가 다스리던 나라는 이미 패망했고, 그가 장사 지낸 사당은 지금도 남아있다. 이에 종묘에 합하여 제사를 이어간다. 또한 여전히 사서(黍離)의 자리에 사당 근처에 삼십 경의 밭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낼 자원으로 삼고, 왕위의 밭이라 칭하여 본토에 속하게 하였다. 왕의 열일곱 대손인 삭(賡) 세급간(世級干)이 조정의 명을 받아 그 밭을 주관하였다. 매년 때에 술과 떡, 밥, 차, 과일 등의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는 것이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 그 제사일은 거등왕이 정한 해 안의 다섯 날이었다. 효도 깊은 제사가 이러하니, 이에 나도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별궁을 마련하고, 구충이 조정에 나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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