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야
新羅·加耶BC 57 – AD 935문헌 원문 · 번역
조선상고사 제11편 백제 멸망
제11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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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 거짓 기록의 근거가 된 것은 고려고기이니, 고려고기 는 어찌하여 이같은 거짓 기록을 썼는가? 고려고기는 대개 신라말의 불교승이 지은 것인데 지나 위(魏)의 세조(世祖)와 당의 무종(武宗)이 도교를 위해 나라 안의 모든 불교의 절을 파괴하고 모든 불교승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당시 어느 나라의 불교승이나 다 도교에 대하여 이를 갈며 분하게 여겼고, 연개소문은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한 인물이므로 신라 당시의 사회가 연개소문을 극구 헐뜯고 욕하는 판이라 고려고기의 작자가 고기를 지을 때 당시의 “영류왕이 도교를 수입하였다.”고 한 것과 “장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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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 거짓 기록의 근거가 된 것은 『고려사기』이니, 『고려사기』는 어찌하여 이같은 거짓 기록을 썼는가? 『고려사기』는 대개 신라 말의 불교 승려가 지은 것인데 지나 위(魏)의 세조와 당의 무종이 도교를 위해 나라 안의 모든 불교 절을 파괴하고 모든 불교 승려를 살해하였기 때문에 당시 어느 나라의 불교 승려나 다 도교에 대하여 이를 갈며 분하게 여겼고, 연개소문은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한 인물이므로 신라 당시의 사회가 연개소문을 극구 헐뜯고 욕하는 판이라 『고려사기』의 작자가 고기를 지을 때 당시의 “원류왕이 도교를 수입하였다.”고 한 것과 “장성을 쌓았다.
제11편번역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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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 것을 보고, 이에 그 도교를 몹시 원망하는 마음으로 당서에 부회(附會)하여 방편(方便)의 법라(法螺 : 소라고둥, 허풍떤다는 뜻)를 크게 붙어 대고 “도교를 믿지 말아라. 도교를 믿다가는 고구려처럼 나라가 망할 것이다. 도교를 들여와서 우리의 정신상 생명을 없애려고 하고, 장성 쌓는 역사를 일으켜서 우리의 육체상 생명을 없애려 한 자는 곧 연개소문이다. ” 하여 연개소문을 미워하는 사회의 심리를 이용해서 도교를 배척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연대와 사리(事理)가 맞지 아니하니 거짓 기록임이 스스로 밝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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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에 전해지고 있는 연개소문은 모든 명사(名詞)와 사실을 거의 다 바꾸어 전한 《갓쉰동전》 이외에는 모두 이러한 거짓말뿐인가? 내 가 20년 전 서울 명동(明洞)에서 노상운(盧象雲) 선생이란 노인을 만났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자(字)가 김해(金海)이고, 병법 이 고금에 뛰어났었다. 그의 저서 김해병서(金海兵書)가 있어 송도 (松都) 때(고려 때)에도 늘 각 방면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부임 할 때에 한 벌씩을 하사하였는데 지금은 그 병서가 아주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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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에 전해지는 연개소문은 모든 명사와 사실을 거의 다 바꾸어 전한 《갓쉰동전》 이외에는 모두 이러한 거짓말뿐인가? 내게 20년 전 서울 명동에서 노상운 선생이라는 노인을 만났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자는 김해이고, 병법이 고금에 뛰어났다. 그의 저서 《김해병서》가 있어 송도(고려) 때에도 늘 각 방면의 병마절도사가 부임할 때마다 한 벌씩 하사하였는데 지금은 그 병서가 아주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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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이 그 병법으로 당의 이정(李靖)을 가르쳐 이정이 당의 가장 뛰어난 명장이 되고, 그 이정이 지은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로 치는 것인데 그 원본에는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를 자세히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개소문을 숭상한 문구가 많았으므로, 당(唐) · 송(宋) 사람들이 연개소문과 같이 외국인을 스승으로 하여 병법을 배워서 명장이 된 것은 실로 중국의 큰 수치라 하여 드디어 그 병법을 없애버렸고, 지금 유행하는 이위공병서는 후세 사람이 위조한 것이기 때문에 그 첫머리에서부터 막리지는 스스로 병법을 안다고 하였다는 연개소문을 헐뜯는 말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원본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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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이 자신의 병법으로 당나라의 이정에게 가르쳐서 이정이 당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명장이 되었고, 그 이정이 지은 이위공병법은 무경칠서 중 하나로 꼽히는데, 그 원본에는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연개소문을 숭상하는 글이 많았기 때문에, 당나라와 송나라 사람들이 연개소문처럼 외국인을 스승으로 하여 병법을 배워 명장이 된 것은 실로 중국의 큰 수치라며 마침내 그 병법을 없애버렸고, 지금 유행하는 이위공병서는 후세 사람이 위조한 것이기 때문에 그 첫머리부터 막리지는 스스로 병법을 안다고 말하며 연개소문을 헐뜯는 말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원본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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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이런 말을 어디에 근거하여 한 것인지 내가 당시 사학에 어두워서 자세히 물어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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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遼陽) · 금주(金州) · 복주(復州) 등지에 연개소문의 고적과 전설이 많고, 연해주(沿海州)의 개소산(盖蘇山)에는 연개소문의 기념비가 서있어서 해삼위(海參威 : 우라디보스톡)에서 배를 타고 블라고베시첸스크로 가려면 바다 가운데서 그 산을 바라보게 된다고 하니, 후 일에 혹 그 비석을 발견하여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을 변증(辨證)하고 떨어져나간 기록을 보충할 날이 있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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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 금주, 복주 등지에 연개소문의 고적과 전설이 많고, 연해주 개소산에는 연개소문의 기념비가 서 있어 해삼위에서 배를 타고 블라고베시첸스크로 가려면 바다 한가운데서 그 산을 바라보게 된다 하니, 후일 혹 그 비석을 발견하여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을 밝히고 떨어져 나간 기록을 보충할 날이 있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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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에 관한 착오 l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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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이 죽은 해에 대한 오해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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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의 연개소문의 사적은 신구 당서(新舊唐書) ·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서 뽑아 쓴 것임은 이마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신구당서와 자치통감 등에 다 연개소문의 죽은 해를 당의 고종(高宗) 건봉(乾封) 원년이라고 하였는데 건봉 원년은 보장왕 25년(기원후 666년)에 해당하므로 삼국사기에도 보장왕 25년에 연개소문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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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만일 연개소문이 보장왕 25년인 기원후 666년에 죽었다면 연개소문이 죽기 전에 고구려의 동맹국 백제가 이미 멸망하였고, 고구려의 서울인 평양도 소정방(蘇定方)에게 포위를 당했을 것이니 무엇 때문에 당태종 · 이정 등이 연개소문을 두려워하고 꺼렸으며, 소동파(蘇東坡 : 蘇軾) · 왕안석(王安石) 등이 연개소문을 영웅으로 허락하였을 것인가? 그래서 나는 연개소문을 적어도 백제가 멸망하기 몇 해 전에 죽었다고 가정하였다. 이 가정을 가지고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찾은지 오래였으나 확증을 얻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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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만약 연개소문이 보장왕 25년인 기원후 666년에 죽었다면, 연개소문이 죽기 전에 고구려의 동맹국 백제는 이미 멸망했고,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 역시 소정방에게 포위당했을 것이니, 무엇 때문에 당태종이나 이정 등이 연개소문을 두려워하고 꺼렸으며, 소동파나 왕안석 등이 연개소문을 영웅으로 여겼을까? 그래서 나는 연개소문이 적어도 백제가 멸망하기 몇 해 전에 죽었다고 가정하였다. 이 가정을 가지고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찾은 지 오래였으나 확증을 얻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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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근일에 이른바 천남생 (泉男生)의 묘지 (墓志) 란 것이 하남(河南) 낙양(洛陽)의 땅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묘지에 의하면 남생 형제의 다툼이 건봉(乾封) 원년 곧 기원후 666년 이전임이 분명함을 알았다. 그 묘지에는 연개소문이 어느 해에 죽었다는 말은 없으나 남생이 “24살에 막리지에 임명되고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을 겸하였으며, 32살에 태막리지 총록군국 아형원도(太莫離支總錄軍國阿衡元道)의 벼슬이 더해졌다. (二十四 任莫離支 兼授三軍大將軍 三十二 加太莫離支 總錄軍國 阿衡元道)”고 하였으며 “의봉(儀鳳) 4년 정윌 19일에 병이 들어 안동부(安東府)의 관사(官舍)에서 죽으니 나이 46이었다. (以儀鳳四年正月十九日 遭疾 遷於安東府之官舍 春秋四十有六)”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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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근일에 이른바 천남생의 묘지라는 것이 하남 낙양 땅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묘지에 의하면 남생 형제의 다툼이 건봉 원년 곧 기원후 666년 이전임이 분명하다. 그 묘지에는 연개소문이 어느 해에 죽었다는 말은 없으나 남생이 "스물네 살에 막리지에 임명되고 삼군대장군을 겸하였으며, 서른두 살에 태막리지 총록군국 아형원도의 벼슬이 더해졌다"고 하였으며 "의봉 4년 정월 19일에 병이 들어 안동부의 관사에서 죽으니 나이 마흔여섯이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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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고종 의봉 4년은 기원후 679년이요 기원후 679년에는 남생이 46살이고, 그의 24살 때는 기원후 657년이다. 기원후 657년 24살 때 막리지 겸 삼군대장이 되어 병권을 잡았으니 기원후 654년에 연개소문이 이미 죽어서 그 직위를 남생이 대신 하였음이 확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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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남생이 32살 대막리지가 되던 해 기원후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어서 그 직위를 남생이 대신한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마는 삼국사기 본기나 연개소문전에는 다 연개소문이 막리지가 되었다고 했고, 삼국사기 김유신전이나 천남생의 묘지에는 다 연개소문을 태대대로(太大對盧)라 하였으며, 개소문전에는 아버지 서부대인(西部大人) 대대로가 죽어 연개소문이 그 직위를 이어 받았다고 하고, 천남생의 묘지에는 증조부 자유(子遊 :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조부 태조(太祚 : 연개소문의 아버지)가 다 막리지에 임명되었다고 하여 어느 책의 막리지를 다른 책에는 태대대로 혹은 대대로라 하였고, 또 다른 책에는 태대대로 혹은 대대로를 막리지라 하였는데, 대로의 대(對)는 뜻이 '마주'이니 대개 이두문으로 대(對)는 뜻으론 읽으면 ‘마’가 되고 막리지의 막(莫)은 음으로 읽어 ‘마’가 되며, 막리지의 리(離)와 대로의 로(盧)는 다 음으로 읽어 ‘ㄹ’이 되어 막리나 대로는 다 ‘말’로 읽을 것이다· 고구려 말년의 관제(官制)에 ‘말치’가 장상(將相)의 임무를 겸하여 마치 그 초대의 ‘신가’와 같았으니, ‘말치’를 이두문으로 대로(對盧) 혹은 막리지(莫離支)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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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남생이 서른둘 살에 대막리지가 되던 해 기원후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어 그 직위를 남생이가 대신한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삼국사기 본기나 연개소문전에는 모두 연개소문이 막리지가 되었다고 했으며, 삼국사기 김유신전이나 천남생의 묘지에는 모두 연개소문을 태대대로라 하였고, 개소문전에는 아버지 서부대인 대대로가 죽어 연개소문이 그 직위를 이어받았다고 하고, 천남생의 묘지에는 증조부 자유와 조부 태조가 모두 막리지에 임명되었다고 하여 어느 책에서는 막리지를 다른 책에서는 태대대로 혹은 대대로라 하였고, 또 다른 책에서는 태대대로 혹은 대대로를 막리지라 하였는데, 여기서 대로의 대는 '마주'라는 뜻이므로 대개 이두문으로 대(對)는 뜻으로는 읽으면 '마'가 되고 막리지의 막은 음으로 읽어 '마'가 되며, 막리지의 리와 대로의 로는 모두 음으로 읽어 'ㄹ'이 되어 막리나 대로는 모두 '말'로 읽을 것이다. 고구려 말년의 관제에 '말치'가 장상의 임무를 겸하여 마치 그 초대의 신가와 같았으니, '말치'를 이두문으로 대로 혹은 막리지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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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지 (對盧支)라 쓰지 않고 대로(對盧)라고만 쓴 것은 생략한 것이고, ‘말치’에 임명된 지 몇 해가 되면 태대(太大)의 호를 더하여 태대대로지 (太大對盧之) 혹은 태막리지(太莫離支)라 썼다· 태대막리지 (太大莫離 之)라 쓰지 않고 대막리지라고만 쓴 것은 역시 생략한 것이다· ‘말치’---대로지 혹은 태대막리지가 그 직위는 같으나 ‘신크’---‘태대 (太大)’는 곧 공훈과 덕을 상주는 품질(品秩)이니 삼국사기 직관(職官)에 각간(角干) 김유신의 큰 공로를 상주어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 하여 태대(太大) 두 자를 각간 위에 더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남생이 24살 때 곧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이 된 해, 기원후 657년이 남생이 정권과 병권을 다 잡은 확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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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지라고만 쓴 것은 생략한 것이고, '말치'에 임명된 지 몇 해가 되면 태대의 호를 더하여 태대대로지 혹은 태막리지라 썼다. 태대막리지라고 쓰지 않고 대막리지라고만 쓴 것은 역시 생략한 것이다. '말치'는 대로지 혹은 태대막리지가 그 직위는 같으나, '신크'의 '태대(太大)'는 곧 공훈과 덕을 상주는 품계이니 삼국사기 직관에 각간 김유신의 큰 공로를 상주어 태대각간이라 하여 태대 두 글자를 각간 위에 더한 것과 같다. 그러니 남생이 스물네 살 때 곧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이 된 해, 기원후 657년이 남생이 정권과 병권을 다 잡은 확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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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그것은 같은 해에 연개소문이 죽은 확증이 된다. 만일 대로와 막리지가 같은 ‘말치’의 이두자라면 어찌하여 남생의 묘지에 “증조부 자유, 조부 태조, 아버지 개금이 다 막리지에 임명되었다· (曾祖子遊 祖太祚 父盖金 竝任莫離支)”고 하거나 아니면 “증조부 자유, 조부 태조, 아버지 개금이 다 태대대로에 임명되었다· (曾祖子遊 祖太祚 父盖金 竝任太大對盧)”고 하지 않고 , “증조부 자유, 조부 태조가 다 막리지에 임명되고, 아버지개금은 태대대로에 임명되었다 (曾祖子遊 祖太祚 竝任莫離支 父盖金竝任太大對盧)”고 하여 막리지와 대대로를 구별하여 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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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의 윗부분에는 남생의 직책을 중리위진대형(中裡位鎭大兄)이라 태막리지(太莫離支)라 쓰고, 아랫부분에는 남생이 당에 항복한 뒤에도 여전히 태대형(跆大兄)이란 옛작위에 임명되었다고 하였으니, 태대형은 중리위(中裡位)의 진대형(鎭大兄)을 가리킨 것이거나 태막리지를 가라킨 것일 터인데 이같이 다른 글자로 썼으니 묘지에 쓰인 벼슬 이름은 거의 구별할 수 없을 뿐더러 또한 “다 막리지에 임명되고 ----태대대로에 임명되었다.”고 한 아랫 구절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양야(良治) · 양궁(良弓)으로 다 병권을 잡고 나라의 정치를 오로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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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의 윗부분에는 남생의 직책을 중리위진대형이라 태막리지라 쓰고, 아랫부분에는 남생이 당에 항복한 뒤에도 여전히 태대형이라는 옛 작위에 임명되었다고 하였으니, 태대형은 중리위의 진대형을 가리킨 것이거나 태막리지를 가리킨 것일 터인데 이같이 다른 글자로 썼으니 묘지에 쓰인 벼슬 이름은 거의 구별할 수 없을 뿐더러 또한 “다 막리지에 임명되고 ----태대대로에 임명되었다.”고 한 아랫 구절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양야·양궁으로 다 병권을 잡고 나라의 정치를 오로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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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乃祖乃父 良治良弓 竝執兵금 咸專國柄)”고 한 것 이니, 막리지와 태대대로가 다같이 병권과 정권을 독차지한 유일한 수석 대신임을 볼 것이고, 당서 고려전에는 “대대로는 모든 국사를 맡아 처리하였다. (大對盧 總知國事)”고 하였고, 동 개소문전에도 “막리지는 당의 중서령(中書令) 병부상서(兵部尙書)의 직위와 같다.(莫離支 獪唐中書令兵部尙書職)”고 하였으니 , 더 욱 그 두 가지가 똑같이 장상 (將相)의 직책을 겸한 유일한 대관임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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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좋은 정치와 좋은 활을 함께 잡으시며 병권과 나라의 권세를 독차지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막리지와 태대대로가 모두 병권과 정권을 차지한 유일한 최고 대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서 고려전에는 "태대대로는 모든 국사를 맡아 처리하였다"고 하였고, 동 개소문전에도 "막리지는 당의 중서령이자 병부상서 직위와 같다"고 하였으니, 더욱이 이 두 가지가 똑같이 장상의 직책을 겸한 유일한 대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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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기원후 657년에 ‘신크말치’ 연개소문이 죽고 맏아들 남생(男 生)이 ‘말치’가 되어 아버지 연개소문의 직위를 상속하였다가 9년 후에 ‘신크’의 호를 더하여 ‘신크말치 ’라 일컬었음이 의심없으니, 구사 (舊史)에 의거하여 기원후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었다고 함은 물론 큰 착오이거니와 묘지에 남생이 대막리지가 되었다는 해를 의거하여 기원후 665년에 개소문이 죽었다고 하는 것도 큰 잘못이다. 연개소문이 죽은 해는 분명히 기원후 657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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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신 · 구당서에 다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늘려 기원후 666년이라 하였고, 천남생의 묘지에 또한 아버지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쓰지 아니하였음이 다 무슨 까닭인가?” 했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당태종이 눈알이 빠져 죽은 것이 곧 연개소문 때문이고, 당의 땅 일부도 연개소문에게 빼앗겼으니 춘추의 의 (春秋之義)로 말하면 당의 여러 신하들이 마땅히 시각을 지체하지 않고 복수를 강구함이 옳겠는데, 이제 세월을 천연(遷延)하여 연개소문의 생전에는 다만 고구려의 침략만 당하고 고구려에는 한 발자국도 침입하지 못했음은 곧 연개소문을 두려워하고 꺼리어 군부(君父)의 원수를 잊었으니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냐? 이 수치를 가리기 위해 연개소문의 생전에도 당의 군사가 평양을 포위한 일이 있었다는 표시를 하기위해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10년이나 늘려 역사에 올린 것이니, 곧 다음 편에서 말 하고자 하는 부여복신(扶餘副信)이 죽은 달을 늘린 것과 같은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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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신 · 구당서에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기원후 666년으로 늘여 기록했고, 천남생의 묘지에도 아버지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쓰지 않은 것이 다 무슨 까닭인가?"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당태종이 눈알이 빠져 죽은 것이 곧 연개소문 때문이고, 당의 땅 일부도 연개소문에게 빼앗겼으니, 춘추의 의로 말하면 당의 여러 신하들이 마땅히 시각을 지체하지 않고 복수를 강구하는 것이 옳거늘, 이제 세월을 늘여서 연개소문이 살아있을 때는 다만 고구려의 침략만 당하고 고구려에는 한 발자국도 침입하지 못했던 것은 곧 연개소문을 두려워하고 꺼려서 군부의 원수를 잊었으니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냐? 이 수치를 가리기 위해 연개소문이 살아있을 때에도 당의 군사가 평양을 포위한 일이 있었다는 표시를 하기 위하여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10년이나 늘여 역사에 올린 것이니, 곧 다음 편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여복신이 죽은 달을 늘린 것과 같은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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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는 교통이 불편하고 역사적 서류가 많지 못하여 이웃나라 이름난 이의 생사를 민간에서는 거의 관청의 선포에 의해 서로 전할 뿐이므로 이같이 연개소문의 죽은 해에 대한 거짓 기록이 드디어 지나 안에서는 실록(實錄)으로 유행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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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는 교통이 불편하고 역사적 서류가 많지 못하여 이웃 나라 이름난 이의 생사를 민간에서는 거의 관청의 선포에 의해 서로 전할 뿐이었으므로, 이같이 연개소문의 죽은 해에 대한 거짓 기록이 드디어 지나 안에서는 실록으로 유행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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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개소문의 공적(功績)에 대한 간략한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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