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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야

新羅·加耶BC 57 – AD 935

문헌 원문 ·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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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제11편 백제 멸망 朝鮮上古史 第11篇

신채호 · 1931 · 저본 한국어 위키문헌
문단 165개 · 번역 확정 0개
제11편문단 8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1) 수의 양제가 패한 첫째 원인은 정병(情兵)을 가리지 않고 군사를 취하여 숫자상의 군사는 비록 4백만에 이르렀으나 전투를 감당할 만 한 자는 수십만에도 차지 못한 때문이라 하여, 10년 양성한 군사 중에서 특별히 정예한 군사 20만을 골라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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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양제가 패한 첫 번째 원인은 정병을 가리지 않고 군사를 취하여 숫자상의 군사는 비록 사백만에 이르렀으나 전투를 감당할 만한 자는 수십만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0년간 양성한 군사 중에서 특별히 정예한 군사 이십만을 골라내고,
제11편문단 82번역 대기
원문
2) 수의 양제가 패한 둘째 원인은 고구려의 변경(邊境)부터 잠식(蠶食)해 들어가지 아니하고 대뜸 대군으로 평양에 침하였다가 양식길이 끊어지고 후원군이 없었던 때문이라 하여 평양에 침입하지 않고 먼저 요동의 각 고을을 정복하려 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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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편문단 83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3) 수의 양제가 패한 셋째 원인은 수백만 육군이 제각기 먹을 양식을 스스로 지고 가 도중의 군량을 삼고 따로 수군으로 하여금 배로 각지 창고에 있는 양식을 물로 운반해서 목적지에 가져다가 머물러 있는 군사의 양식으로 삼게 하였다가 양식 실은 배가 고구려의 수군에게 모 두 격침된 때문이라 하여 배로 운반하는 양식의 위험을 보충하기 위해 국내에 소 · 말 · 양 등의 목축을 장려해서, 전사(戰土) 한 사람에 대해 타는 말과 양식 실은 소 각 한 마리와 양 몇 마리씩을 분배해주어 양식을 군사가 직접 지고 가지 않고 소로 운반하게 하여, 도착한 뒤에는 배로 운반해오는 양식을 기다릴 것 없이 양식이 충족하게 하고 또 소 · 양 · 말 등의 고기를 먹게 하려 하였다.
번역
수의 양제가 패한 셋째 원인은 수백만 육군이 각자 먹을 양식을 스스로 지고 가다가 도중에 군량을 삼가고 따로 수군으로 하여금 배로 각지 창고에 있는 양식을 물로 운반하여 목적지에 가져와 머무는 군사의 양식으로 삼게 하였으나, 양식이 실은 배가 고구려의 수군에게 모두 격침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배로 운반하는 양식의 위험을 보충하기 위해 국내에 소·말·양 등의 목축을 장려하여, 전사 한 사람당 타는 말과 양식 실은 소 각 한 마리와 양 몇 마리씩을 분배해 주어 양식을 군사가 직접 지고 가지 않고 소로 운반하게 하여, 도착한 뒤에는 배로 운반해오는 양식을 기다릴 것 없이 양식이 충족하게 하고 또 소·양·말 등의 고기를 먹게 하려 하였다.
제11편문단 84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4) 수의 양제가 패한 넷째 원인은 다른 여러 나라의 원조가 없이 오직 혼자의 힘으로 고구려와 싸운 때문이라 하여 , 신라 김춘추가 구원 을 청하자 공수동맹의 의를 맺어 고구려의 뒤쪽을 교란시키게 하려 하였다.
번역
수의 양제가 패한 네 번째 원인은 다른 여러 나라의 도움 없이 오직 혼자 힘으로 고구려와 싸웠기 때문이라 하여, 신라 김춘추가 구원을 청하자 공수동맹의 의리를 맺어 고구려의 뒤쪽을 교란시키려고 하였다.
제11편문단 85번역 대기
원문
이상과 같은 방략을 주도면밀하게 작성한 뒤 기원후 644년 7월에 각 군대를 낙양(洛陽)에 집결시키고, 군량은 영주(營州)의 대인성(大人城 : 지금의 秦皇島)에 모으게 하고,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 에게 명하여 유(幽) · 영(營) 두 주(州)의 군사를 인솔하고 요동 부근을 유격(遊擊)하여 고구려의 형세를 더듬어 알아보게 하고, 장작대장 (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에게 명하여 군량을 대인성으로 운반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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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편문단 86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 해 10월에 형부상서(刑部尙書) 장량(張亮)으로 평안도 행군대총관(平壞道行軍大總管)을 삼고, 상하(常何) · 좌난당(左難當)으로 부총 관(副總管)을 삼고, 방효태(龐孝泰) · 정명진(程名振) · 염인덕(염仁德) · 유영행 (劉英行) · 장문간(張文幹)으로 총관(總管)을 삼아서 강 (江) · 회(淮) · 영(嶺) · 협(峽)의 정병 4만 명과 장안(長安) · 낙양(洛陽)의 용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떠나 말로는 평양으로 향한다 고 하고 실은 요하(遼河)로 향하였다.
번역
그 해 10월에 형부상서 장량을 평안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상하와 좌난당을 부총관으로 삼았으며, 방효태, 정명진, 염인덕, 유영행, 장문간을 총관으로 삼아 강, 회, 영, 협의 정병 4만 명과 장안, 낙양의 용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떠나 말로는 평양으로 향한다고 하였으나 실은 요하로 향하였다.
제11편문단 87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또 이적(李勣)으로 요동도행군대총관(遺東道行軍大總管)을 삼고 강하왕(江夏王) 왕도종(王道宗)으 로 부총관을 삼고, 장사귀(張士貴) · 장검(張儉) · 집실사력(執失思力) · 계필하력(契苾何力) · 아사나미사(阿史那彌射) · 강덕본(姜德本) · 오흑달(吳黑달)로 총관을 삼아서 육로로 요동으로 향하여 두 군사가 요동에서 합세하게 하고 당태종은 친히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뒤따르기로 하였다.
번역
또 이적(李<0xE5><0x8B><0xA3>)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강하왕의 왕도종을 부총관으로 삼았으며, 장사귀, 장검, 집실사력, 계필하력, 아사나미사, 강덕본, 오흑달로 총관을 삼아 육로로 요동으로 향하게 하여 두 군사가 요동에서 합세하게 하고 당태종은 친히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뒤따르기로 하였다.
제11편문단 88번역 대기
원문
=== 연개소문의 방어 및 진공(進攻) 전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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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편문단 89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당의 군사가 침입해온다는 기별이 이르니 연개소문은 여러 장수들을 모아 대항할 계책을 강구하는데, 혹은 평원왕(平原王) 때에 온달 (溫達)이 주(周)와 싸웠을 때와 같이 기병으로 마구 무찔러서 요동 평야에서 격전을 벌여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 옳다고 하고, 혹은 영양왕 (영陽王) 때에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隋)와 싸웠을 때와 같이 마을과 들의 백성과 곡식을 죄다 성으로 옮겨 지키게 한 뒤에 평양으로 꾀어들여 양식길을 끊어서 굶주려 피곤해졌을 때를 타서 쳐 깨뜨리는 것이 옳다고 하여 여러 사람의 의론이 분분하였다. 연개소문이 말하였다. “전략은 형세에 따라 정하는 것이오. 오늘날의 형세가 평원왕 때나 영양왕 때와 다른데 어찌 그때의 형세와 같이 여겨 전략을 정한단 말이오.
번역
당나라 군사가 침입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연개소문은 여러 장수들을 모아 대항할 계책을 강구하였다. 어떤 이는 평원왕 때 온달이 주와 싸웠을 때처럼 기병으로 마구 쳐서 요동 평야에서 격전을 벌여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 옳다고 하였고, 또 어떤 이는 영양왕 때 을지문덕이 수와 싸웠을 때처럼 마을과 들의 백성과 곡식을 모두 성 안으로 옮겨 지키게 한 뒤에 평양으로 꾀어들여 양식길을 끊어 굶주리고 지치게 되었을 때를 노려 공격하는 것이 옳다고 하여 여러 사람의 의견이 분분하였다. 연개소문이 말하기를, "전략은 형세에 따라 정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형세는 평원왕 때나 영양왕 때와 다르니 어찌 그때의 형세와 같이 여겨 전략을 정할 수 있겠습니까."
제11편문단 90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오늘에 있어서는 위치를 골라 방어하고 기회를 따라 진공 해야 할 것이니 옛날 사람의 규정한 것을 그대로 지켜서는 아니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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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위치를 골라 방어하고 기회에 따라 진격해야 하므로, 예로부터 정한 바를 그대로 지킬 수는 없다.
제11편문단 91번역 대기
원문
” 그리고 그는 명령을 내려 건안(建安) · 안시(安市) · 가시(加尸) · 횡악 (橫岳) 등 몇몇 성읍(城邑)만 굳게 지키게 하고, 그 나머지는 곡식과 말먹이를 혹은 옮겨놓고 혹은 태워버려 적으로 하여금 노략질할 것이 없게 하고, 오골성(烏骨城)---지금의 연산관(連山關)으로 방어선을 삼아 용감한 장수와 군사를 배치해놓고, 따로 안시성주(安市城王) 양만춘(楊萬春)과 오골성주(烏骨城主) 추정국(鄒定國)에게 비밀히 일러 “지금 당나라 사람들이 수나라의 패전한 것을 징계삼아 양식에 특별히 유의해서 장래 군량이 모자랄 때 보충하려고 군중에 소 · 말 · 양을 수없이 가져왔는데,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어 풀들이 다 마르고 강물도 얼어버리면 그 가축들을 무엇으로 먹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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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편문단 92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저들도 이것을 알기 때문에 빨리 싸워 결판을 내려고 할 것이오. 그러나 저네가 수나라의 패전을 징계삼아 평양으로 바로 나오지 않고 안시성을 먼저 공격할 것 이니, 양공(楊公 : 萬春)은 나가 싸우지 말고 성을 굳게 지키다가 저네가 굶주리고 피곤해지기를 기다려 양공은 안에서 나와 공격하고, 추공(鄒公 : 定國)은 밖에서 진격하오. 나는 뒤에서 당의 군사의 뒤를 습격하여 아주 돌아갈 길이 없게 해서 이세민(李世民 : 唐太宗)을 사로 잡으려 하오. ” 하였다.
번역
저들도 이것을 알기 때문에 빨리 싸워 결판을 내리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수나라의 패전을 징계 삼아 평양으로 바로 나오지 않고 안시성을 먼저 공격할 것이니, 양공(만춘)은 나가 싸우지 말고 성을 굳게 지키다가 저들이 굶주리고 피곤해지기를 기다려 양공은 안에서 나와 공격하고, 추공(정국)은 밖에서 진격한다. 나는 뒤에서 당의 군사 뒤를 습격하여 아주 돌아갈 길이 없게 하여 이세민(당태종)을 사로잡으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제11편문단 93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상곡(上谷)의 횃불과 당 태종의 패주(敗走) ===
번역
상곡의 횃불과 당 태종의 패주
제11편문단 94번역 대기
원문
해상잡록(海上雜錄)에 이런 기록이 있다. “당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일찍이 당의 첫째가는 명장 이정(李靖)으로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을 삼으려고 하니까 이정이 사양하며 “임금의 은혜도 무겁거니와 스승의 은혜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태원(太原)에 있을 때에 개소문을 만나 병법을 배웠는데 그 뒤에 폐하를 도와 천하를 평정한 것이 다 그의 병법에 힘입은 것이니, 오늘에 와서 신이 어찌 감히 전일에 스승으로 섬기던 개소문을 치겠습니까?” 하였다. 태 종이 다시 “개소문의 병법이 과연 옛사람 중의 누구와 견줄 만하오?” 하고 물으니, 이정은 “옛날 사람은 알 수 없거니와 오늘날 폐하의 여러 장수들 가운데는 그의 적수가 없고, 비록 천자의 위엄으로 임하시더라도 이기시기 어려울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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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편문단 95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하고 대답하였다. 태종은 못마땅해 하면서 “중국과 넓은 땅과 많은 백성과 강한 병력으로 어찌 한낱 개소문을 두려워 한단 말이오?” 하였다. 이정이 다시 말했다. “개소문이 비록 한 사람이지마는 그의 재주와 지혜가 만 사람에 뛰어납니다. 그러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겠습니까?”이 기록이 사실이라 하면 당태종은 이때 일찍이 누이동생 때문에 연개소문을 죽이지 못하였음을 후회했을 것이다.
번역
"하고 대답하였다. 태종은 마음에 들지 않아 "중국과 넓은 땅과 많은 백성과 강한 병력으로 어찌 한낱 개소문을 두려워할 수 있단 말이냐?"라고 하였다. 이정이 다시 말했다. "개소문이 비록 한 사람일지라도 그의 재주와 지혜가 만 사람에 뛰어납니다. 그러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당태종은 이때 일찍이 누이동생 때문에 연개소문을 죽이지 못했음을 후회했을 것이다.
제11편문단 96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기원후 645년 2월에 당태종이 낙양(洛陽)에 이르러 수(隋)의 우무후장군(右武候將軍)으로 양제 (煬帝)를 따라 살수(薩水)의 싸움에 참가하 고, 수가 망한 뒤에 벼슬하여 선주자사(宣州刺史)가 되었다가 이때 나 이가 많아 퇴직한 정원도(鄭元도)를 불러 고구려의 사정을 물어보 았다. 그는 “요동은 길이 멀어 양식의 운반이 곤란하고 고구려가 성을 지키는데 능하여 성을 함락시키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신은 이번 길 을 매우 위태롭게 봅니다.”라고 하였다. 당태종은 좋아하지 않고 “오늘의 우리 국력이 수나라와 비교할 바 아니니 공은 다만 결과나 보오.” 하였다. 그러나 만일을 염려하여 태자와 이정(李靖)에게 후방을 염중히 지키라 명하고 마침내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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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645년 2월에 당태종이 낙양에 이르러 수나라의 우무후장군으로 양제를 따라 살수에서의 싸움에 참가하였고, 수가 망한 뒤에 벼슬하여 선주자사가 되었다가 이때 이가 많아 물러난 정원도를 불러 고구려의 사정을 물어보았다. 그는 “요동은 길이 멀어 양식 운반이 곤란하고 고구려가 성을 지키는 데 능하여 성을 함락시키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신은 이번 길을 매우 위태롭게 봅니다.”라고 하였다. 당태종은 좋아하지 않고 “오늘날 우리 국력이 수나라와 비교할 바 아니니 공은 다만 결과나 보오.” 하였다. 그러나 만일의 사태를 염려하여 태자와 이정에게 후방을 중히 지키라 명하고 마침내 출발하였다.
제11편문단 97번역 대기
원문
요택(遼澤 : 지금의 渤錯水)에 이르니 200리 진구렁에 사람과 말이 지날 수 없어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에게 명하여 나무와 돌을 운반해다가 길을 만드는데 수나라 때 장사들의 해골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당태종이 제문(祭文)을 지어 울며 제사지내고,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며 “오늘날 중국의 젊은이들이 거의 이 해골들의 자손이니 어찌 복수를 하지 않겠소?” 하였다. 당태종은 요택을 지나자 “누 가 개소문더러 병법을 안다고 하느냐? 병법을 안다면 어찌 이 요택을 지키지 않는단 말이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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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편문단 98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요하(遼河)를 건넌 다음에는 싸움이 순조로워서 요동 곧 오열홀(烏列忽) · 백암(白巖) · 개평(蓋平) · 횡악(橫岳) · 은산(銀山) · 후황성 (後黃城) 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다시 이적(李勣)등 여러 장수들을 불러 군사회의를 열고 새로 나아갈 길을 의논하는데, 강하왕(江夏汪) 도종(道宗)은 오골성을 쳐 함락시켰으니 바로 평양을 공격하자고 하였고, 이적과 장손 무기(長孫無忌)는 안시성을 치자고 하였다. 수의 양제가 일찍이 우문술(宇文述) 등으로 하여금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 평양을 공격하다가 전군이 패한 것을 당태종도 경계하는 바였으므로 도종의 의견을 쓰지 않고, 이적의 의견을 따라 안시성을 침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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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를 건넌 후에는 싸움이 순조로워 요동, 오열홀, 백암, 개평, 횡악, 은산, 후황성 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다시 이적 등 여러 장수들을 불러 군사회의를 열어 새로 나아갈 길을 의논하였는데, 강하왕 도종은 오골성을 쳐 함락시켰으니 바로 평양을 공격하자고 하였고, 이적과 장손 무기는 안시성을 치자고 하였다. 수의 양제가 일찍이 우문술 등으로 하여금 삼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 평양을 공격하다가 전군이 패한 것을 당태종도 경계하는 바였으므로 도종의 의견은 따르지 않고, 이적의 의견을 따라 안시성을 침노하였다.
제11편문단 99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연개소문이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에게 요동의 싸움을 위임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안시성은 곧 ‘아리티’ 혹은 환도성(丸都城)이라 혹은 북평양(北平壞)이라 일컬었는데, 태조왕(太祖王)이 일찍이 서부 방면을 경영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발기(發岐)의 난에 이곳을 지나에게 빼앗겼다가 고국양왕(故國壞王)이 이를 회복한 이래로 바다와 육지의 요충이라 하여 성을 더 높이 쌓고 정병을 배치하고, 성 안에 항상 수십만 섬의 양식을 쌓아두었다. 공격하기 어렵고 함락시킬 수 없는 요새로 일컬어 온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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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이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에게 요동의 싸움을 위임한 것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으나, 안시성은 곧 ‘아리티’ 혹은 환도성이라 하거나 북평양이라 일컫는데, 태조왕이 일찍이 서부 방면을 경영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발기(發岐)의 난에 이곳을 지나에게 빼앗겼다가 고국양왕이 이를 회복한 이래로 바다와 육지의 요충지라 하여 성을 더 높이 쌓고 정병을 배치했으며, 성 안에 항상 수십만 섬의 양식을 쌓아두었다. 공격하기 어렵고 함락시킬 수 없는 요새로 일컬어 온 지 오래였다.
제11편문단 100번역 대기
원문
그 해 6월에 당태종이 이적 등과 함께 수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성 안을 향하여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성이 함락되는 날에 모조리 죽일 것이다.” 하고 외치게 하였다. 그러니까 양만춘이 성 위에서 역시 통역자를 시켜 당의 군사에게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성에서 나가는 날에 모조리 죽일 것이다.” 하였다. 당의 군사가 접근하면 성 안의 군사가 이를 쏘아죽이되 헛쏘는 화살이 없으므로 당태종은 성을 겹겹이 엄중 포위하여 성 안을 굶주리게 하려고 했지만, 성 안에는 양식의 저장이 넉넉하고 당의 군사는 비록 가져온 양식이 많았으나 몇 달을 지내니 차차 떨어져가고, 요동의 몇 성을 얻기는 하였으나 아무 저축이 없는 빈성이었으며 수로로 오는 배들은 모두 고구려의 수군에게 격파당해 양식 운반할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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