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야
新羅·加耶BC 57 – AD 935문헌 원문 · 번역
조선상고사 제11편 백제 멸망
제11편번역 대기
원문
당년의 일을 이제 와 무어 라 하랴(無柰當年事), 소 조한 가을 기러기 줄지 었구나(秋聲蕭?行)”라고 하였는데 , 이 시로 보건대 연개소문이 한 때 당의 땅에 드나들며 침략하였을 뿐 아니라 성을 쌓고 백성을 이주시켜서 북소리가 구름 밖에까지 울려퍼지고, 땅은 온통 꽃밭인데 거리가 번화하고 음악 소리 유량하며 비취와 보옥 등이 념쳐나서 새로 점령한 땅의 풍성함을 자랑하던 것을 읊은 실록 (實錄)으로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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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당의 역사책을 보면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도망해 돌아간 뒤에 거의 해마다 달마다 고구려 침략의 군사를 일으켜서 “아무 해 아무 달에 우 진달(牛進達)을 보내서 고구려를 정별하여 어느 성을 깨뜨렸다.” “어느 해 어느 달에 정명진(程名振)을 보내서 고구려를 쳐 아무성을 깨뜨 렸다.” 하는 따위의 기록이 수없이 있지마는 이것은 당태종이 고구려 때문에 눈이 빠지고 그의 백성들의 아들들이 많이 죽거나 상하여 천신 (天神) 같은 제왕의 위염이 땅에 떨어진데다가 고구려에 대한 복수의 군사를 일으키지 않으면 더욱 안팎의 웃음거리가 되겠고, 또한 만일 다시 대거해서 공격하자면 수의 양제의 꼴이 될 것이므로 이제 교활한 술책을 생각해내서 다달이 여러 장수를 시켜 고구려의 어느 곳을 침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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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역사책을 보면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도망쳐 돌아간 뒤에 거의 해마다 달마다 고구려를 침략하는 군사를 일으켜 "어느 해 어느 달에 우진달을 보내서 고구려를 정벌하여 어느 성을 깨뜨렸다." "어느 해 어느 달에 정명진을 보내서 고구려를 쳐 아무성을 깨뜨렸다." 하는 기록이 수없이 있지만, 이것은 당태종이 고구려 때문에 눈이 빠지고 그의 백성들의 아들들이 많이 죽거나 다하여 천신 같은 제왕의 위엄이 땅에 떨어지는데다가 고구려에 대한 복수의 군사를 일으키지 않으면 더욱 안팎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고, 또한 만일 다시 대규모로 공격하자면 수나라 양제의 꼴이 될 것이므로 이제 교활한 술책을 생각해내어 다달이 여러 장수를 시켜 고구려의 어느 곳을 침략하였다.
제11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고구려의 무슨 성을 점령하였다 하는 거짓 보고를 올리게 하여 그 실상 없는 무위(武威)를 국내에 보인 것이다. 당태종이 죽을 때 에 유조(遺詔)로 요동의 싸움을 그만두게 한 것은 한편으로 아들 고종 (高宗)의 아버지의 원수 갚지 못하는 책임을 가볍게 하고 한편으로 백 성을 사랑한다는 명성을 얻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본래 요동의 전쟁이 없었는데 이제 무슨 전쟁을 그만둔단 말인가? 당태종의 일생은 허위뿐이니 역사가나 역사를 읽는 사람은 그 기록을 상세히 규명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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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어떤 성을 점령했다는 거짓 보고를 올리게 하여 실체가 없는 무용을 국내에 보인 것이다. 당태종이 죽을 때 유조로 요동의 싸움을 그만두게 한 것은 한편으로는 아들 고종의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하는 책임을 가볍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을 사랑한다는 명성을 얻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본래 요동의 전쟁이 없었는데 이제 무슨 전쟁을 그만둔단 말인가? 당태종의 일생은 허위뿐이니 역사가나 역사를 읽는 사람은 그 기록을 상세히 규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11편번역 대기
원문
연개소문은 무엇으로써 이와같이 외정(外征)에 성공하였는가? 그 근거는 둘이었다. 발해사(渤海史)에 “대문예(大門藝)가 말하기를 ‘옛날 고구려가 성시(盛時)에는 강병(彈兵) 30만으로 당나라에 대항하였다. ’고 했다. (大門藝曰 昔高句麗全盛之時 强兵三十萬 抗敵居家)” 하였고, 당서(唐書)에도 “고려(고구려)가 신성(新城)과 국내성의 보병 · 기병 4만 명을 일으켰다. (高麗 發新城 · 國內城步騎四萬). ” “신성 (新城)과 건안(建安)에는 군사가 오히려 10만 명이었다.(新城建安 之? 猶十萬)” “고구려와 말갈의 군사가 합하여 15만 명이었다. (高麗 靺鞨之衆十五萬)”이라 하였으니 이상의 말에 의하면 고구려의 정규군이 30만 명이 넘었고, 그 밖의 산병(散兵)도 적지 아니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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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고려사 최영전(崔瑩傳)에 “당태종이 30만의 무리로 고구려를 침노하니 고구려는 승군(僧軍) 3만 명을 내어 이를 격파하였다. (唐太宗 以三十萬衆 侵高句麗 高句麗 發僧軍三萬 擊破之)”고 하였고, 고려 도경(高麗圖經)에는 “재가화상(在家和尙)----조백(皂帛)으로 허리를 동이고----전쟁이 있으면 스스로 단결하여 한 단체를 만들어서 전장에 나아갔다.(在家和尙----以皂帛束?----有戰事 則自結爲一團 以? 戰場)”고 하였으며 해상잡록(海上雜錄)에는 “명림답부(明臨答夫)와 개소문은 다 조의 선인(皂衣仙人)의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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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최영전에 "당태종이 삼십만 무리로 고구려를 침노하니, 고구려는 승군 삼만 명을 내어 이를 격파하였다"라고 하였고, 고려 도경에는 "재가화상은 조백으로 허리를 동이고 전쟁이 있으면 스스로 단결하여 한 단체를 만들어서 전장에 나아갔다"고 하였으며 해상잡록에는 "명림답부와 개소문은 모두 조의 선인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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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明臨答夫 蓋蘇文 此皆皂衣仙人出身)’라고 하였으니 이상의 글에 의하면 승군(僧軍)이란 불교의 중으로 편성된 군사가 아니라 곧 ‘신수두’ 단전(壇前)의 조의 (皂衣) 무사요, 연개소문은 조의의 우두머리[首領]였음을 알수 있다. 그러니 수십만의 군대와 그 중심인 3만의 조의군(皂衣軍)은 연개소문의 외정(外征)을 성공시킨 첫째 근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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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임답부, 가소문, 이는 모두 검은 옷을 입은 신선 출신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상의 글에 의하면 승군은 불교의 중으로 편성된 군사가 아니라 곧 '신수두' 단전의 검은 옷 무사이며, 연개소문은 검은 옷 무리[首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수십만의 군대와 그 중심인 3만 명의 검은 옷 군대는 연개소문의 외정을 성공시킨 첫째 근거였다.
제11편번역 대기
원문
미수(眉수) 허목(許穆)은 “싸움을 좋아하는 나라로 백제만한 나라가 없다.(好戰之國 莫如百濟)”고 하고,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은 “세 나라(신라 · 백제 · 고구려) 중에서 백제가 가장 전쟁을 좋아한다고 일컬어진다. (三國之中 百濟最以好戰稱)”고 하였으니, 백제는 날래고 사나워서 싸움을 잘하는 나라로서 고구려와 동맹을 하였으니 그것도 연개소문이 외정을 하게 된 근거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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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최치원(崔致遠)이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할 때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 명이라, 북으로 유(幽) · 계(계) · 제(齊) · 노(魯) 등지를 소란하게 하였고, 남으로 오(吳) · 윌(越)을 침략하였다. (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北撓幽계齊魯 南侵吳越)”고 한 것은 연개소문이 백제와 합작한 결과를 말한 것인데 북쪽을 토평했다(北平) 남쪽을 평정했다(南定) 하지 않고 북쪽을 소란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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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할 때에는 군사 백만 명이 북으로는 유·계·제·노 등을 어지럽히고 남으로는 오·월을 침략하였다"라고 한 것은 연개소문이 백제와 합작한 결과를 말한 것인데, 북쪽을 평정하고 남쪽을 안정시키지 않고 북쪽을 소란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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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남쪽을 침략했다고 한 것은 이 글이 당을 존숭하는 최치원이 당의 어느 재상에게 올린 글이기 때문에 이같이 춘추필법적 말을 쓴 것이요, 실은 이때에 유(幽) · 계(계)-지금의 직예성(直匠省)과 제(齊) · 노(魯)---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과 오(吳) · 윌(越)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 절강성(절江省)이 다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 아래 있었던 것이다. 연개소문이 백제와 관계된 사실은 다음 편에서 자세히 서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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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을 침략했다고 한 것은 이 글이 당나라를 존숭하는 최치원이 당의 어느 재상에게 올린 글이기 때문에 이같이 춘추필법적인 말을 쓴 것이며, 실은 이때에 유(幽) · 계(계)-지금의 직장성과 제(齊) · 노(魯)---지금의 산동성과 오(吳) · 월(越)-지금의 강소성과 절강성이 모두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연개소문이 백제와 관계된 사실은 다음 편에서 자세히 서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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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연개소문의 사적(事跡)에 관한 거짓 기록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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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신라 때에는 연개소문을 백제의 원조자라 하여 후에는 그를 유교의 윤리상 임금을 죽인 적신(賊臣)이라 하여 또 사대주의에 위반한 죄인이라 하여 늘 박대해서 그에 관한 전설이나 사적을 아주 없애버리기를 일삼았고, 오직 도교(道敎)의 수입과 천리장성(千里長城) 축조를 그 가 한 일이라 하지마는 실은 당서(唐書)에서 부연(敷寅)해온 거짓 기록이고 사실이 아니다. 이제 삼국유사 본문을 실어 그것이 거짓 기록 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삼국유사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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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시대에는 연개소문을 백제의 원조자라고 하여, 나중에는 그를 유교의 윤리상 임금을 죽인 적신(賊臣)이라 하고 또 사대주의에 위반한 죄인이라 하여 늘 박대하여 그에 관한 전설이나 사적을 아주 없애버리는 일을 일삼았고, 오직 도교의 수입과 천리장성 축조를 그가 한 일이라고 하지만 실은 당서에서 부연해 온 거짓 기록이며 사실이 아니다. 이제 삼국유사 본문을 실어 그것이 거짓 기록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삼국유사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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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살피건대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이보다 앞서 수(隋)의 양제(煬帝) 가 요동을 정벌할 때, 비장(裨將) 양명(羊皿)이 싸움이 불리하여 죽게 되자 맹세하기를, 기어코 총신(寵臣)이 되어 저 나라(고구려)를 멸망 시키겠다고 하였는데, 개씨(盖氏)가 조정을 독단하게 되자 성을 개씨 라 하니, 곧 양명의 말이 이에 들어맞은 것이다. (두 글자를 합쳐 盖가 되니 그가 죽어서 盖蘇文이 되었다는 뜻) 또 살펴건대 고려의 고기(古 記)에 이르기를 수의 양제가 대업(大業) 8년 임신(王申)에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공격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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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니 당서에 이르기를 이보다 앞서 수나라 양제가 요동을 정벌할 때, 비장 양명이 싸움이 불리하여 죽게 되자 맹세하기를, 기어코 총신이 되어 저 나라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하였는데, 개씨가 조정을 독단하게 되자 성을 개씨라 하니, 곧 양명의 말이 이에 들어맞은 것이다. (두 글자를 합쳐 개가 되니 그가 죽어서 개소문이 되었다는 뜻) 또 살펴보건대 고려의 고기에는 수나라 양제가 대업 8년 임신년에 삼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공격해 왔다고 한다.
제11편번역 대기
원문
----10년 갑술(甲戌)에 황제가 퇴군하려고 좌우를 돌아보며,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친히 조그만 나라를 치다가 이롭지 못하였으니 만대에 웃음거리가 되었다하니, 이때 우상(右相) 양명이 아뢰기를, 신이 죽어서 고려의 대신이 되어 기어코 나라를 멸망시켜서 황제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돌아가고 그는 고려에 태어났는데 나이 15살에 총명하고 용감하였으므로 이때의 무양왕(武陽王 : 榮留王)이 그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불러들여 신하를 삼았다. 그는 스스로 성을 개(盖) 이름을 금(金)이라 하였다. 벼슬이 소문(蘇文)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곧 시중(侍中)과 같은 직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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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개금이 왕에게 아뢰기를 솥에는 발이 셋이 있고 나라에는 세 가지 교(敎)가 있어야 하는데, 신이 보건대 나라 안에는 다만 유교와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어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하니, 왕이 옳게 여기고 당에 아뢰어 도교를 청하였으므로 태종이 숙달(叔達) 등 도사(道士) 여덟 사람을 보내주었다. 왕은 기뻐하고 절로 도관(道觀 : 도교의 寺院)을 만들고 도사를 높여 유사(儒士)의 위에 앉혔다.----개금은 또 동북과 서남에 장성을 쌓기를 청하여 남자는 성을 쌓고, 여자는 농사를 짓기 16년 만에 역사를 마치었는데, 보장왕(寶藏王) 때에 당태종이 친히 육군(六軍, 곧 모든 군사)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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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금이 왕에게 아뢰기를 솥에는 다리가 셋 있고 나라에도 세 가지 가르침이 있어야 하는데, 신이 보건대 나라 안에는 유교와 불교만 있을 뿐 도교가 없어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하니, 왕이 옳다고 여기고 당에 아뢰어 도교를 청하였으므로 태종이 숙달 등 도사 여덟 사람을 보내주었다. 왕은 기뻐하여 저절로 도관을 짓고 도사를 높여 유학자의 위에 앉혔다. 개금은 또 동북과 서남에 장성을 쌓기를 청하여 남자는 성을 쌓고, 여자는 농사를 짓기 16년 만에 역사를 마치었는데, 보장왕 때에 당태종이 친히 육군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다.
제11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按唐書云 先時 隋煬帝征遼東 有裨將羊皿 不利於軍 將死有誓曰 必爲寵臣 滅彼國矣 及盖氏檀朝 以盖爲氏 乃以羊皿是之應也 又按高麗古期云 隋l煬帝 以大業八年任申 領三十萬兵 渡海來征 十年甲戌 ----帝 將旋師 謂左右曰 朕爲天下之主 親征小國不利 萬代之所嗤 時右相羊皿秦曰 臣死爲高麗大臣 必滅國 報帝王之讐 帝崩後 生於高麗 十五聰明神武時 武陽王聞其賢 徵入馬臣 自稱姓盖名金 位至蘇文 乃侍中職也 金秦曰 鼎有三足 國有三敎 臣見國中 唯有儒釋 無道敎故國危矣 王然之 秦唐請之 太宗遺叔達等道士八入 王喜 以佛寺爲道觀 尊道士 坐儒士之上----盖金又秦 築長城東北西南時男役女耕 役支十六年乃畢 乃寶藏王之世 唐太宗 親統以六軍來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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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서에 따르면) 전에는 수나라 휘제가 요동을 정벌할 때, 비장이라는 장수가 군대에 부적합하여 죽기 전에 맹세하기를 반드시 총애받는 신하가 되어 그 나라를 멸하겠다고 하였다. 게씨의 단조를 따라 게씨라 하였으니, 이는 비장이 이에 응한 것이다. 또 고구려 옛 기록에 따르면 수나라 휘제가 대업 8년(기원전 612년)에 신을 맡아 삼십만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정벌하였는데, 10년 갑술년에 황제가 원군을 돌리며 좌우에게 말하기를, "짐이 천하의 주인으로서 작은 나라를 친정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만대에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때 우상 양비가 진나라에서 말하기를, "신은 죽어서 고구려 대신이 되어 반드시 나라를 멸하고 임금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황제가 돌아간 후 고구려에 태어나 열다섯 살에 총명하고 신무할 때, 무양왕이 그의 현명함을 듣고 마신으로 삼아 부리니 스스로 성은 게, 이름 금이라 하였으며 지위는 소문(蘇文)에 이르러 시중의 직책이었다. 금진이 말하기를, "솥에는 세 발이 있고 나라는 세 가지 가르침이 있습니다. 신이 보기에 나라 안에는 유교와 석가 외에 도교가 없어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왕연지(王然之)가 진나라의 당나라를 청하여 태종이 남긴 숙달 등의 도사 여덟 명이 들어오자, 왕희는 불사를 도관으로 삼아 도사를 존중하고 유학자를 위에 두었다. 게금과 진은 장성을 북동쪽과 남서쪽에 쌓을 때 남자와 여자에게 부역하게 하여 16년 만에 마쳤다. 이에 보장왕의 시대에 당 태종이 육군을 이끌고 정벌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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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양명의 후신(後身)이 개씨가 되었다는 것은 요망한 말이고, 연개소문을 “성을 개, 이름을 금이라 하였고, 벼슬이 소문에 이르렀다. ”고 한 것도 망령된 말이니 변론할 것도 없거니와 그 밖에 도교를 수입했다느니 장성 쌓기를 청했다느니 한 것도 또한 거짓 기록이다. 수의 양제는 기원 617년에 죽고 영류왕 곧 무양왕이 노자교(老子敎 :道敎) 를 수입한 것은 당서에 분명히 당고조(唐高祖) 무덕 (武德) 7년(기원후 624년)으로 겨우 8살이니, 이제 “나이 15살에-----신하가 되어-----당에 아뢰어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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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고 함이 무슨 말인가? 장성의 축조는 영류왕 14년에 시작하였으니 16년 만에 준공하였으면 곧 보장왕 5년, 당태종이 침략해온 이듬해에 마친 것인데 이제 “16년 만에 역사를 마치고----당태종이 친히 육사(六師)를 거느리고 와 공격하였다. ”고 함은 어떻게 된 것인가? 영류왕은 북수남진(北守南進) 주의를 써서 당과는 화친하고 신라와 백제를 공략하려고 한 사람이고, 연개소문은 남수북진(南守北進) 주의를 써서 백제로 신라를 견제하고 당을 공략하려고 한 사람이니 당의 황제가 성이 이(李)요, 도교의 시조 노자(老子)도 성이 이씨이기 때문 에 당대(唐代)에는 노자를 그 선조라고 위증하여 극진히 높여 받들었으므로 영류왕이 당과 화친하려고 당의 조상 노자의 교와 그 교도인 도사를 맞아온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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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함이 무슨 말인가? 장성의 축조는 영류왕 14년에 시작하여 16년 만에 준공하였으니, 이는 곧 보장왕 5년, 당태종이 침략해 온 이듬해의 일이다. 그런데 이제 '16년 만에 역사를 마치고----당태종이 친히 육사(六師)를 거느리고 와 공격하였다.'고 함은 어떻게 된 것인가? 영류왕은 북쪽을 지키며 남쪽으로 진출하는 주의를 써서 당과는 화친하고 신라와 백제를 공략하려 했던 인물이며, 연개소문은 남쪽을 지키며 북쪽으로 진출하는 주의를 써서 백제로 신라를 견제하고 당을 공략하려 했던 사람이니, 당의 황제가 성이 이(李)이고 도교의 시조 노자(老子)도 성이 이씨이기 때문에 당대에는 노자를 그 선조라고 위증하여 극진히 높여 받들었으므로 영류왕이 당과 화친하려고 당의 조상 노자의 가르침과 그 교도인 도사를 맞아온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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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종교로는 신수두를 신봉하면서 정책으로는 당을 공략하려는 연개소문이 국교(國敎)를 버리고 적국인 당의 조상 노자의 교인 도교를 맞아들였을 리가 있겠는가 ? 장성은 나가서 치기 위해 쌓은 것이 아니라 지켜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북쪽을 막아 지키려는 영류왕이 쌓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날마다 북쪽 공략을 주장한 또 그 주장을 실행한 연개소문이 그같은 국력을 들여 백성의 원한을 살 방어용의 장성을 쌓았을 리가 있겠는가? 이렇게 연조가 맞지 아니하고 이치에도 맞지 아니하니 이 두 가지 사실이 다 거짓 기록임이 의심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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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종교적으로 신수두를 믿으면서 정책으로는 당나라를 공격하려는 연개소문이 국교를 버리고 적국인 당의 조상 노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도교를 받아들였을 리가 있겠는가? 장성은 나가서 치기 위해 쌓은 것이 아니라 지켜 방어하기 위해 쌓았으며, 북쪽을 막아 지키려는 영류왕이 쌓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날마다 북쪽 공략을 주장하고 그 주장을 실행한 연개소문이 그런 국력을 들여 백성의 원한을 살 방어용의 장성을 쌓았을 리가 있겠는가? 이처럼 연조와도 맞지 않고 이치에도 맞지 않으니, 이 두 가지 사실은 모두 거짓 기록임이 의심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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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삼국사기를 보면 연개소문이 유 · 불 · 도 세 교는 솥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왕에게 아뢰어 도교를 당에 구하였다고 한 것이 보장왕 2년의 일이니 삼국유사에 개금(盖金)의 도교 청래(請來) 운운한 것이 다만 그 연대가 틀렸을 뿐 사실은 확실히 있은 것이 아니냐 ? ”고 하지마는 삼국사기에는 이것을 고려고기 (高麗古記)에서 인용하였다고 했으니, 삼국사기도 고려고기에서 인용하였음이 분명하고, 고려고기에는 “개금이 무양왕 곧 영류왕에게 아뢰어 도교를 당에서 들여왔다.”고 하였으니 삼국사기의 저작자 김부식이 그 연조를 옮겨 보장왕 2년의 일로 기록하였음이 또한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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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이 각종 고기와 지나사의 사실을 마구 끌어다가 그 사기를 지었는데 가끔 연조가 모호한 일이면 그 사실의 있고 없었음을 자세히 구명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연월을 고쳐넣은 것이 허다하니, 연개소문이 보장왕에게 도교의 수입을 청했다고 하는 것도 한 예이다. 그러니 연개소문이 도교를 들여오고 장성 쌓기를 청했다는 두 사건은 물을 것 없는 거짓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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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이 각종 고기와 지나사의 사실을 마구 끌어다가 그 사기를 지었는데, 가끔 연도가 모호한 일이면 그 사실의 있고 없었음을 자세히 구명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연월을 고쳐넣은 것이 허다하니, 연개소문이 보장왕에게 도교의 수입을 청했다고 하는 것도 한 예이다. 그러니 연개소문이 도교를 들여오고 장성 쌓기를 청했다는 두 사건은 물을 것 없는 거짓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