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야
新羅·加耶BC 57 – AD 935문헌 원문 · 번역
조선상고사 제12편 삼국 통일
제12편번역 대기
원문
오래지 않아 당이 곰나루를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라 일컫고 당의 장수 유인원(劉仁願)은 당의 군사 1만 명으로 신라 왕자 인태(仁泰)는 신라 군사 7천 명으로 함께 지키게하고 그 밖의 각 중요한 성에다가 다 두 나라의 군사 얼마씩을 배치하였다. 각지의 의병들은 신라 태종 이 토평할 책임을 맡고, 당의 소정방은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9월 3일에 돌아갔다. 이에 자진이 복신과 군사를 합하여 곰나루성을 치자고 하니 복신이 말했다. “우리 군사가 패망한 이제 한 번 큰 승리가 없으면 인심을 진작시킬 수 없는데, 곰나루성은 지세가 험하여 공격해 떨어뜨리기가 지극히 어려우니 차라리 정예한 군사를 뽑아 신라 군사의 돌아가는 길을 끊는 것이 좋겠소.
번역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하였으나 자진은 듣지 않고 곧 군사를 지휘하여 성의 동남쪽 진현성과 왕흥사의 영책 (領柵)을 깨뜨려 많은 물자와 기계를 빼앗고 곰나루성의 사변에 네댓 군데 목책을 세워서 신라의 군량 운반하는 길을 끊으니 일시에 의병의 형세가 크게 떨쳐서 남부의 20여 성이 다 호응하였으나 신라 태종이 태자 법민 · 각간 김유신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여례성(黎禮城 : 지금의 茂朱 南界)을 공격하므로 진무(眞武)가 나가 싸우다가 전사하고, 진현성의 의병도 신라 군사에게 습격당해 1천5백 명이 죽고, 왕흥사 영책의 의병도 7백 명이 전사하였다. 이에 신라 군사가 임존성을 쳤는데, 복신의 방어가 면밀하여 마침내 이기지 못하고 군량이 뒤따르지 못하므로 11월 1일에 군사를 돌이켰다.
번역
하였으나 자진은 듣지 않고 곧 군사를 지휘하여 성의 동남쪽 진현성과 왕흥사의 영책을 깨뜨려 많은 물자와 기계를 빼앗고 곰나루성의 사변에 네댓 곳 목책을 세워서 신라의 군량 운반하는 길을 끊으니 일시에 의병의 형세가 크게 떨쳐서 남부의 스무여 성이 다 호응하였으나 신라 태종이 태자 법민과 각간 김유신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여례성을 공격하므로 진무가 나가 싸우다가 전사하고, 진현성의 의병도 신라 군사에게 습격당해 천오백 명이 죽고, 왕흥사 영책의 의병도 칠백 명이 전사하였다. 이에 신라 군사가 임존성을 쳤는데, 복신의 방어가 면밀하여 마침내 이기지 못하고 군량이 뒤따르지 못하므로 11월 1일에 군사를 돌이켰다.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부여복신(扶餘福信)의 연전연승 ===
번역
부여 복신의 연이은 승리
제12편번역 대기
원문
이듬해 2월에 부여 복신이 강서(江西)의 흩어진 군사를 모아 강을 건너가서 진현성을 회복하니 당의 장수 웅진도독 유인원이 정병 1천을 보냈다. 복신이 중로에서 불의에 습격하여 1천 명을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하니 유인원이 연방 신라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 여 신라 태종이 이찬(伊餐) 품일(品日)로 대당장군(大幢將軍)을, 잡찬(잡餐) 문충(文忠)으로 상주장군(上州將軍)을, 아찬(阿餐) 의복(義服)으로 하주장군(下州將軍)을, 무훌(武훌) · 욱천(旭川) 등으로 남천주대감(南川州大監)을, 문품(文品)으로 서당장군(誓幢將軍)을, 의광(義光)으로 낭당장군(郎幢將軍)을 삼아서 가 구원하게 하니 3월 5일에 그 선봉대가 두량윤성(豆良尹城 : 지금의 定山)에 이르러 진지를 살펴 보았다.
번역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복신이 대오(隊伍)가 정연하지 못함을 보고 갑자기 나가 습격하여 전멸시키고 그 군계(軍械)를 빼앗아서 몽둥이에 대신하고 성으로 들어와 지켰다.
번역
복신이 대열이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보고 갑자기 나가 습격하여 전멸시켰고, 그 무기를 빼앗아 방패로 삼고 성으로 들어와 지켰다.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신라의 대군이 이르러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기를 36일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사상자만 많이 내고 돌아가는지라 복신이 사방의 의병 을 지휘하여 좌충우돌 수많은 장수와 군사를 베고 물자와 기계를 모두 빼앗고, 다시 진격하여 가소천(加召川)에 이르러서는 신라가 구원병으로 보낸 김흠순(金欽鈍)의 군사와 싸워 크게 깨뜨리니 흠순 등이 홀몸으로 달아나 신라의 군사가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
번역
신라의 대군이 와서 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삼십육 일 동안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사상자만 많이 내고 돌아갔다. 이에 복신이 사방의 의병들을 지휘하여 좌충우돌하며 수많은 장수와 군사를 베고 물자와 기계를 모두 빼앗았다. 다시 진격하여 가소천에 이르러서는 신라가 구원병으로 보낸 김흠순의 군사와 싸워 크게 깨뜨렸으니, 흠순 등이 홀로 달아나 신라의 군사는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
제12편번역 대기
원문
이에 복신은 왕자 풍(豊)을 맞아다가 왕을 삼고 곰나루성을 포위하여 신라에서 양식 운반해오는 길을 끊으니, 복신의 명성이 천하에 떨쳐 백제의 여러 성과 고을이 모두 호응해서 신라와 당이 임명한 관리를 죽이고 복신에게 귀부하였으며, 고구려의 남생(男生)은 구원병을 보내서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쳐 멀리 복신을 응원하고, 일본은 화살 10만 개를 바쳐 복신을 도왔다.
번역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제 6 장 고구려의 당군(唐軍) 격퇴와 백제 의병의 전성(全盛) ==
번역
제 6 장 고구려의 당군을 물리치고 백제의 의병이 전성기를 이루다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연개소문 사후(死後) 고구려의 내정(內政) ===
번역
연개소문이 죽은 후 고구려의 내부 정세는
제12편번역 대기
원문
고구려 말년의 역사는 전사(前史)가 모두 당서(唐書)의 거짓 기록을 가져다 수록하여 1) 연개소문의 죽은 해를 연장시켰고, 2) 연개소문이 요수(遼水) 서쪽에서 획득한 땅을 줄여 붙이고, 3) 연개소문의 생전과 사후의 고구려와 당에 대한 관계 사실을 위조하여서 고구려의 멸망한 진상을 잘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와의 관계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번역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연개소문이 기원후 657년에 죽었음은 제11편에서 말한바이거니와 연개소문이 죽은 뒤에 뒤를 이은 자도 그의 아들 남생(男 生)이니, 남생의 묘지(墓誌)에 의하면 “9살 때부터 총명하여 조의선인 (조衣先人)의 한 사람이 되고, 아버지의 선임으로 낭관(郞官)이 되어 중리대형(中裡大兄) · 중리위두대형(中裡位頭大兄)의 요직을 역임하 고 24살에 막리지가 되어 삼군대장군을 겸임하였다.”고 하였으니 연개소문이 죽고 남생이 그 직위를 이어받았음이 분명하다.
번역
연개소문이 기원후 657년에 사망한 것은 제11편에서 말한 바와 같으며, 연개소문 사후 뒤를 이은 사람도 그의 아들 남생이니, 남생의 묘지에는 “아홉 살 때부터 총명하여 조의선인의 한 사람이 되었고, 아버지의 후임으로 낭관이 되어 중리대형과 중리위두대형의 요직을 역임했으며, 스물네 살에 막리지가 되어 삼군대장군을 겸하였다”고 하였으니, 연개소문 사후 남생이 그 직위를 이었음이 분명하다.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연개소문이 죽은 뒤에 고구려와 당의 관계가 어떠하였는가는 역사책의 기록이 분명하지 않으나, 신 · 구당서의 고려전이나 정명진전(程名振專)에는 당의 고종 영휘(永徽) 6년에 “정명진 · 소정방 등이 고구려를 쳐 5월에 요수를 건너가 귀단수(貴端水)에서 고구려의 군사를 격파하여 1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고 하였고, 구당서 유인궤전(劉仁軌傳)에는 당의 고종 현경(顯慶) 2년에 “유인궤가 정명진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고구려를 귀단수에서 격파하여 3천 명을 베었다.
번역
연개소문이 죽은 뒤에 고구려와 당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역사책 기록이 분명하지 않으나, 신·구당서의 고려전이나 정명진전(程名振專)에는 당의 고종 영휘 6년에 "정명진 · 소정방 등이 고구려를 치어 5월에 요수를 건너가 귀단수에서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여 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고 하였고, 구당서 유인궤전(劉仁軌傳)에는 당의 고종 현경 2년에 "유인궤가 정명진을 부장으로 삼아 고구려를 귀단수에서 격파하여 삼천 명을 베었다."
제12편번역 대기
원문
”고 하였는데,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연개소문에게 패하여 돌아갈 때에 화살에 맞은 눈의 상처가 덧나서 죽었으니 그의 친아들인 고종과 그의 신하인 이적(李勣) · 소정방(蘇定方) 등의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였으랴마는 마침내 여러 해 동안 군사를 한 명도 일으키지 못한 것은 연개소문의 위명을 두려워한 때문일 것인데, 이제 갑자기 귀단수의 싸움이 있음은 그럴 만한 기회를 엿본 것일 것이다. 그 기회가 무엇인가 하면 현경 2년은 곧 기원후 657년 연개소문이 죽은 해이니 연개소문이 죽은 기회를 탄 것이다.
번역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면 신 · 구당서의 고려전과 정명진전에는 어찌하여 귀단수 싸움을 영휘 6년 곧 서기 655년, 연개소문이 죽기 3년 전의 일로 기록하였는가? 이는 대개 당시 이 싸움의 동기가 당이 연개소문의 죽은 기회를 타려고 한 것인데, 이제 당의 사관이 연개소문의 죽은 해를 연장해놓고 보니 그 싸움의 동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으므로, 저네가 그 싸움의 동기 곧 '군사를 일으키는 데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師出有名].'는 구실을 만들고자 하여 신라 태종의 원년 곧 신라 사자의 구원 요청이 있은 해이므로 지나간 해를 각 전기에 그대로 거짓 기록하여 싣고, 오직 유인궤전에 만은 우연히 검열을 잘못하여 싸움의 연조를 그대로 적은 것이다.
번역
그렇다면 신 · 구당서의 고려전과 정명진전에는 어찌하여 귀단수 싸움을 영휘 6년 곧 서기 655년, 연개소문이 죽기 3년 전의 일로 기록하였는가? 이는 대개 당시 이 싸움의 동기가 당이 연개소문의 죽은 기회를 타려고 한 것인데, 이제 당의 사관이 연개소문의 죽은 해를 연장해놓고 보니 그 싸움의 동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으므로, 저네가 그 싸움의 동기 곧 '군사를 일으키는 데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구실을 만들고자 하여 신라 태종의 원년 곧 신라 사자의 구원 요청이 있은 해이므로 지나간 해를 각 전기에 그대로 거짓 기록하여 싣고, 오직 유인궤전에만은 우연히 검열을 잘못하여 싸움의 연조를 그대로 적은 것이다.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니까 이 싸움은 연개소문이 죽은 후 당이 고구려에 처음으로 침입한 싸움이다. 그 승패의 상황은 전해지지 않았으나 대개 연개소문이 점령하였던 산해관(山海關) 서쪽 땅 곧 당의 옛 땅을 당이 도로 차지하고 다시 나아가 여러 번 요수 동쪽을 침노하다가 패해 물러나서 그들은 당 한 나라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고구려를 이기지 못할 줄을 알고 신라와 연합하여 양쪽에서 협공할 것을 애타게 바랐었다.
번역
그러니까 이 싸움은 연개소문이 죽은 후 당나라가 고구려에 처음으로 침입한 싸움이다. 그 승패의 상황은 전해지지 않았으나 대개 연개소문이 점령했던 산해관 서쪽 땅, 곧 당나라의 옛 땅을 당나라가 다시 차지하고 나아가 여러 번 요수 동쪽을 침노하다가 패하여 물러나서, 그들은 당나라 한 나라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고구려를 이기지 못할 줄을 알고 신라와 연합하여 양쪽에서 협공하기를 애타게 바랐었다.
제12편번역 대기
원문
그런데 이때에 백제와 고구려는 또한 함께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고 신라의 북쪽 경계에 자주 군사를 내어 공격하므로 신라 태종이 새로 즉위 하자 그 태자 법민을 당에 보내서 구원병을 청하고, 아울러 백제의 어진 신하 성충(成忠)이 이미 죽고 의자왕이 교만하고 횡포하여 겉으로 는 비록 강성한 듯하나 내용은 텅 비어 있어서 두 나라의 군사가 함께 공격하면 이를 멸망시키기 쉬움을 설명하였다. 당의 임금과 신하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13만 대군을 내어 신라와 협력해서 백제를 토멸한 것이다.
번역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백제가 멸망한 사실은 이미 앞장에서 대강 말하였거니와 백제가 망할 때에 고구려의 남생이 백제에 대하여 구원병을 내지 못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 백제가 망한 뒤에도 당의 군사가 이미 돌아가고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나는 때에 고구려가 수만의 군사를 내어 곰나루 · 솝울 등지로 나아가서 복신 · 자진 등과 연합하여 싸웠더라면 백제는 다시 일어났을 것이요, 백제가 다시 일어나면 넉넉히 신라를 견제하여 당의 군사에 대한 양식의 공급을 못하게 하였을 것이고, 신라의 양식이 아니고는 고구려에 연개소문 · 양만춘 같은 영걸이 없더라도 당이 능히 평양까지 침입하지 못했을 것이며 설혹 침입하였다 하더라도 수(隋)의 양제(煬帝)처럼 패해 무너졌을 것이다.
번역
백제가 멸망한 사실은 이미 앞장에서 대강 말하였거니와, 백제가 망할 때에 고구려의 남생이 백제에 대하여 구원병을 내지 못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 백제가 망한 뒤에도 당의 군사가 이미 돌아가고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나는 때에 고구려가 수만의 군사를 내어 곰나루 · 솝울 등지로 나아가서 복신 · 자진 등과 연합하여 싸웠더라면 백제는 다시 일어났을 것이요, 백제가 다시 일어나면 넉넉히 신라를 견제하여 당의 군사에 대한 양식의 공급을 못하게 하였을 것이고, 신라의 양식이 아니고는 고구려에 연개소문 · 양만춘 같은 영걸이 없더라도 당이 능히 평양까지 침입하지 못했을 것이며 설혹 침입하였다 하더라도 수(隋)의 양제처럼 패해 무너졌을 것이다.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므로 당시 고구려의 안전을 도모하려면 먼저 백제의 멸망을 구원했어야 할 것인데 신라와 당 두 나라의 군사가 이미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야 소수의 군사를 보내어 칠중성(七重城 : 지금의 積城)을 함락시키고는 돌아가버렸고, 부여복신이 군사를 일으켜 백제 전군이 거의 회복된 뒤에도 겨우 수천 명을 내어 북한산성의 남녀 합해서 겨우 2천7백여 명의 신라인이 있는 외로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패하여 물러났으며 그 밖에는 백제를 구원하는 움직임이 없었으니, 남생은 훗날 나라 망친 죄를 짓기 전에 나라를 그르친 죄도 적지 않았다. 이같이 용렬한 사나이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죽은 연개소문은 또한 어찌 죄가 없다 할 수 있으랴?
번역
그러므로 당시 고구려의 안녕을 도모하려면 먼저 백제의 멸망을 구원했어야 했으나, 신라와 당 두 나라의 군사가 이미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야 소수의 군사를 보내어 칠중성을 함락시키고 돌아가 버렸으며, 부여복신이 군사를 일으켜 백제 전군이 거의 회복된 뒤에도 겨우 수천 명을 내어 북한산성의 남녀 합해서 겨우 이천칠백여 명의 신라인이 있는 외로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패하여 물러났으며, 그 밖에는 백제를 구원하는 움직임이 없었으니, 남생은 훗날 나라를 망친 죄를 짓기 전에 나라를 그르친 죄도 적지 않았다. 이같이 용렬한 사나이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죽은 연개소문 또한 어찌 죄가 없다 할 수 있으랴?
제12편번역 대기
원문
=== 평양(平壤)의 당군(唐軍)과 웅진(態津) 신라군의 대패 ===
번역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기원후 662년 당이 임아상(任雅相) · 계필하력(契苾何力) · 소정방(蘇定方) · 설인귀(薛仁貴) · 방효태(龐孝泰) 등 여러 장수를 보내서 하남(河南) · 하북(河北) · 회남(淮南) 등 67주(州)의 군사를 징발하여 35길로 나누어 평양에 침입하게 하고, 낭장(郞將) 유덕민(劉德敏)을 함자도(含資道) 총관(總管)에 임명하여 신라로 들어가서 신라 군사와 협력하여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침략하는 동시에 신라의 양식을 평양으 로 운반해 보내게 하였다.
번역
기원후 662년 당나라가 임아상, 계필하력, 소정방, 설인귀, 방효태 등 여러 장수를 보내 하남, 하북, 회남 등 67주의 군사를 징발하여 35길로 나누어 평양에 침입하게 하고, 낭장 유덕민을 함자도 총관으로 임명하여 신라로 들어가 신라 군사와 협력하여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침략하는 동시에 신라의 양식을 평양으로 운반해 보내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