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야
新羅·加耶BC 57 – AD 935문헌 원문 · 번역
조선상고사 제12편 삼국 통일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신라와 당의 연합군 침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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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침입했다.
제12편번역 대기
원문
기원후 654년 진덕여대왕(眞德女大王)이 돌아가고 김춘추(金春秋)가 왕위를 이으니 그가 이른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태종의 아버지 용춘(龍春) 때부터 이미 왕의 실권은 그가 가지고 있었지마는 다만 동서인 백제 무왕(武王)과의 왕위 다툼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고자 왕의 명의는 첫번에는 선덕(仙德), 다음에는 진덕(眞德), 곧 출가하여 여승이 된 두 여인에게 준 것이었는데 이제 와서는 두 나라의 갈라진 상처가 다시 아물 수 없게 깊어졌으므로 태종은 왕의 명의까지도 차지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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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태종이 왕이 되자 더욱 김품석(金品釋) 부부의 보복을 서두르게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백제의 침노가 심하므로 태자 법민(法敏)을 당에 보내서 구원병을 청하였다. 당은 이때 태종이 죽고 고종(高宗)이 즉위하여 고구려에 대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여러번 고구려를 공격 하였다가 다 실패하였으므로, 이에 먼저 신라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쳐 없앤 다음에 다시 고구려를 함께 공격하기로 하고 태종의 청을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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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이 왕이 되자 김품석 부부의 보복을 서두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침노가 심했으므로, 태자 법민을 당에 보내 구원병을 청했다. 당은 이때 태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여러 번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자, 먼저 신라와 힘을 합쳐 백제를 멸한 뒤 다시 고구려를 함께 공격하기로 하고 태종의 청을 허락했다.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계백(皆伯)과 의직(義直)의 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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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과 의직이 전사함
제12편번역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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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660년 3월에 신라 왕자 인문(仁問)이 당의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내주(내州)부터 바다를 건너 6월에 덕물도(德勿島 : 지금 南陽의 德勿島)에 이르렀다. 신라 태종이 금돌성(今突城:지금의 陰城)에 진을치고, 태자 법민과 대각간(大角干) 김유신과 장군 진주(眞珠) · 천존(天尊) 등으로 하여금 병선 1백 척으로 맞이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신라 당 두 나라 군사가 수륙으로 나뒤어 신라 군사는 육지로 쫓고, 당의 군사는 물로 쫓아 7월 10일에 백제 서울 소부리(所夫里)에서 집합합시다.” 하므로, 법민 · 유신 등이 다시 금돌성으로부터 돌아와 김품일(金品日 ) · 김흠순(金欽純) 등 여러 장군들과 함께 정병 5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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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제야 의자왕은 깊은 밤의 연회를 파하고 여러 신하들을 불러 싸우고 지킬 방법을 의논하는데 좌평 의직 (義直)은 “당나라 군사가 물에 익숙지 못한데 멀리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반드시 피곤할 것이니 뭍에 내리자마자 돌격하면 깨뜨리기 쉬울 것이고, 당의 군사를 깨뜨리면 신라는 저절로 겁이 나서 싸우지 않고 무너질 것입니다.” 하였고, 좌평 상영(常永)은 “당의 군사는 멀리 와서 빨리 싸우는 것이 이로울 것이므로 뭍에 내릴 때에는 장수와 군사들이 다 용감하게 싸울 것이니 험한 곳을 막아 지켜서 저네가 양식이 떨어지고 군사가 해이해진 뒤에 싸우는 것이 옳고, 신라는 일찍이 여러 차례 우리 군사에게 패하여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으니 먼저 신라 군사를 쳐 깨뜨리고 다시 형편을보아 당의 군사를 치는 것 이 좋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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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의자왕은 깊은 밤 연회를 마치고 여러 신하들을 불러 싸우고 지킬 방법을 의논하였는데, 좌평 의직은 "당나라 군사는 물에 익숙하지 못한데 멀리 바다를 건너왔으니 반드시 피곤할 것이니, 뭍에 내리자마자 돌격하면 깨뜨리기 쉬울 것이며, 당의 군사를 깨뜨리면 신라는 저절로 겁을 먹고 싸우지 않고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좌평 상영은 "당의 군사는 멀리 와서 빨리 싸우는 것이 이로울 것이므로 뭍에 내릴 때에는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용감하게 싸울 것이니, 험한 곳을 막아 지켜서 저들이 양식이 떨어지고 군사가 해이해진 뒤에 싸우는 것이 옳고, 신라는 일찍이 여러 차례 우리 군사에게 패하여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으니 먼저 신라 군사를 쳐 깨뜨리고 다시 형편을 보아 당의 군사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라고 하여 의론이 분분하였다. 의자왕이 전에는 평시나 전시를 물론하고 용단(勇斷)을 잘 내렸는데, 이때에 와서는 요망한 무당과 여러 소인들에게 둘러싸여서 의외로 흐리멍덩하여 어찌할바를 모르다가 홀연히 지모(智謀)로 이름있던 좌평, 일찍이 성충의 무리로 지목되어 고마미지(古馬彌地 : 지금의 長興)에 귀양간 부여흥수(扶餘興首)를 생각하고 사자를 보내서 그에게 계책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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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의논이 분분하였다. 의자왕은 전에는 평시나 전시를 가리지 않고 용단(勇斷)을 잘 내렸으나, 이때에 와서는 요망한 무당들과 여러 소인들에게 둘러싸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홀연히 지모로 이름난 좌평이 일찍이 성충의 무리로 지목되어 고마미지(지금의 장흥)에 귀양 간 부여흥수를 생각하고 사자를 보내 그에게 계책을 물었다.
제12편번역 대기
원문
흥수는 “탄현(炭峴)과 기벌포(伎伐浦)는 국가의 요충이라 한 사람이 칼을 빼어들고 막으면 만 사람이 덤비지 못할 곳이니, 수륙의 정예를 뽑아서 당의 군사는 기별포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대왕께서는 왕성을 지키다가 저네 두 적이 양식이 떨어지고 군사가 피로해진 다음에 맹렬히 공격하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길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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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사자가 돌아와서 그대로 보고하니 임자 등은 성충의 남은 무리들이 다시 등용될까 두려워서 “흥수가 오래 귀양가 있어서 임금을 원망하 고 성충의 옛 은혜를 생각하여 항상 보복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이제 성충이 남긴 상소의 찌꺼기를 주워서 나라를 그르치려고 하는 것이니 그의 말을 써서는 안 됩니다. 당의 군사는 기벌포를 지나 들어오게 하고 신라 군사는 탄현을 넘어 들어오게 한 다음에 힘써 공격하면 독 안에 든 자라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이리하면 두 적을 다 분해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험한 데를 막고 적병과 대치하여 시일을 허비해서 군사의 용기를 줄게 합니까?” 하였다. 왕은 그의 말이 옳다 하여 다시 궁녀들로 하여금 술을 올리고 노래를 부르게 하여 전쟁이 눈앞에 있음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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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가 돌아와 그대로 보고하니, 임자 등은 성충의 남은 무리들이 다시 등용될까 두려워하여 "흥수가 오래 귀양가 있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성충의 옛 은혜를 생각하여 항상 보복하려고 생각했으므로, 이제 성충이 남긴 상소의 찌꺼기를 주워서 나라를 그르치려고 하는 것이니 그의 말을 써서는 안 됩니다. 당나라 군사는 기벌포를 지나 들어오게 하고 신라 군사는 탄현을 넘어 들어오게 한 다음에 힘써 공격하면 독 안에 든 자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이리하면 두 적을 다 분해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험한 곳에 막고 적병과 대치하여 시일을 허비해서 군사의 용기를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은 그의 말이 옳다 하여 다시 궁녀들로 하여금 술을 올리고 노래를 부르게 하여 전쟁이 눈앞에 있음을 잊었다.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7월 9일에 신라 대장 김유신 · 김품일(金品日 ) 등이 5만 군사를 거느리고 탄현을 지나 황등야군(黃登也郡 : 지금의 論山 · 連山 사이)에 이르니 의자왕이 장군 부여 계백을 보내 신라 군사를 막게 했다. 계백은 출전에 임하여 “탄현의 천험(天險)을 지키지 않고 5천의 군사로 10배나 되는 적을 막으려 하니 내일의 일을 내가 알겠다.” 탄식하고 처자를 불러 “남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내 손에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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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9일에 신라 대장 김유신과 김품일 등이 오만 군사를 거느리고 탄현을 지나 황등야군(지금의 논산과 연산 사이)에 이르렀다. 의자왕은 장군 부여 계백을 보내 신라 군사를 막게 하였다. 계백은 출전하기를 앞두고 “탄현의 천험을 지키지 않고 오천의 군사로 열 배나 되는 적을 막으려 하니 내일의 일을 내가 알겠다.”라고 탄식하며 처자를 불러 “남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내 손에 죽어라.”
제12편번역 대기
원문
” 하고 칼을 빼어 다 죽이고 군중에 나아가 군사들을 모아놓고 “고구려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은 5천의 무리로 당의 군사 70만을 깨뜨렸으니, 우리 5천의 군사 한 사람이 열 사람을 당할 것인데 어찌 신라의 5만 군사를 두려워하겠느냐?” 하고는 군사를 몰아 달려가 황등야군에 이르러 험한 곳에 웅거해서 세 진영에 나뉘어 싸우니 김유신 등이 네 번 공격하였다가 네 번 다 패하여 만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김유신은 싸워서 이길 수는 없고 당의 군사와 약속한 7월 10일이 되어 다급해서 품일과 흠순을 돌아보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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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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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기지 못하면 약속을 어기게 되는데 당의 군사가 홀로 싸우다가 패하면 신라의 수십 년 공들인 일이 헛일로 돌아갈 것이고, 당의 군사가 이기면 비록 남의 힘으로 복수는 하였다 하더라도 신라가 당의 업신여김에 견디지 못할 것이니 어찌 하면 좋겠소?” 품일과 흠순이 “오늘 열 갑절의 많은 군사로 백제를 이기지 못한다면 신라 사람은 다시 낯을 들지 못할 것이오. 먼저 내 아들을 죽여 남의 자제들을 죽도록 격려하여 혈전을 벌이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하고 흠순은 그의 아들 반굴(盤屈)을, 품일은 그의 아들 관창(官昌)을 불러 “신라의 화랑이 충성과 용맹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제 1만의 화랑으로 수천의 백제 군사를 이기지 못한다면, 화랑은 망하고 또 신라도 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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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기지 못하면 약속을 어기게 되는데 당나라 군사가 홀로 싸우다가 패하면 신라가 수십 년 공들인 일이 헛일로 돌아갈 것이고, 당나라 군사가 이기면 비록 남의 힘으로 복수는 하였다 하더라도 신라가 당나라의 업신여김에 견디지 못할 것이니 어찌 하면 좋겠소?" 품일과 흠순이 "오늘 열 배나 많은 군사로 백제를 이기지 못한다면 신라는 다시 낯을 들지 못할 것이오. 먼저 내 아들을 죽여 남의 자제들을 죽도록 격려하여 혈전을 벌이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하고 흠순은 그의 아들 반굴을, 품일은 그의 아들 관창을 불러 "신라의 화랑이 충성과 용맹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제 만 명의 화랑으로 수천의 백제 군사를 이기지 못한다면, 화랑은 망하고 또 신라도 망하는 것이다."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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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화랑의 두목이 되어 화랑을 망치고 말겠느냐?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을 다할 것이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를 다할 것인데, 위급함을 당하여 목숨을 바쳐야만 충과 효를 다했다고 할 것이다. 충효를 다하고 공명을 세우는 것이 오늘 너희들이 할 일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반굴이 “네.” 하고 그 무리와 함께 백제의 진으로 돌격해 다 전사하였다. 관창은 나이 겨우 16 살로 화랑 중에서도 가장 어린 소년이었는데, 반굴의 뒤를 이어 혼자 서 백제의 진중으로 달려들어가 몇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혔다. 계백이 소년의 용감함을 사랑하며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신라에 소년 용사가 많으니 가륵하다. ” 하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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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화랑의 두목이 되어 화랑을 망치겠느냐?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을 다할 것이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를 다할 것인데, 위급함을 당하여 목숨을 바쳐야만 충과 효를 다했다고 할 것이다. 충효를 다하고 공명을 세우는 것이 오늘 너희들이 할 일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반굴이 “네.” 하고 그 무리와 함께 백제의 진으로 돌격해 모두 전사하였다. 관창은 나이가 겨우 16 살로 화랑 중에서도 가장 어린 소년이었는데, 반굴의 뒤를 이어 혼자 서 백제의 진중으로 달려들어가 몇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혔다. 계백이 소년의 용감함을 사랑하며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신라에 소년 용사가 많으니 가륵하다.” 하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제12편번역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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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창은 아버지 품일에게 “오늘 적진에 들어가 적장을 베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하고, 물을 움켜 마셔 목마름을 풀고는 다시 말에 채찍질하여 창을 들고 백제의 진중으로 달려들었다. 계백이 그를 쳐죽여 머리를 말꼬리에 매달아서 돌려보냈다. 품일이 이것을 보고 도리어 기뻐서 뛰며 “내 아들의 면목이 산 사람 같구나. 나라 일에 죽었으니 죽은 것이 아니다. ”라고 외치니 신라 군사들이 모두 감격하여 용기가 났다. 이에 유신이 다시 총공격의 명령을내려 수만명이 일제히 돌진 하였다. 계백이 친히 북을 쳐 응전하매 두 나라 군사가 참으로 용감하였지마는 수효가 너무도 모자라니 어찌하랴. 한갓 성스럽고 깨끗한 희생으로 전장에서 쓰러져 백제 역사의 끝장을 장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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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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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군사는 개가를 부르며 백제의 서울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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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군은 개가를 부르며 백제의 수도로 향했다.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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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당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은 백강(白江) 어귀 기벌포에 이르러 끝없는 진펄에 행군할 수가 없어서 풀과 나무를 베어다가 깔고 간신히 들어오는데, 백제의 왕은 임자의 말대로 독 안에서 자라를 잡으려고 그곳을 지키지 않고, 수군은 백강(白江 : 지금의 白馬江)을 지키고 육군은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당의 군사는 이미 진펄을 지났으므로 용기가 갑절하여 백제의 수군을 깨뜨리고 언덕으로 올라 왔다. 의직은 군사를 호령하여 격전을 하다가 죽었다. 의직은 지략이 계백 만은 못하지 마는 용감하기는 비등하여 한때 당나라 군사들의 담을 서늘케 하였으므로 신라 사람이 의직의 죽은 곳을 조룡대(釣龍臺)라 이름 하였으니, 의직을 용에 비유하고 의직을 죽인 것을 용을 낚아 올린 것에 비유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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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백강 어귀 기벌포에 이르러 끝없는 진펄을 따라 행군할 수 없게 되자 풀과 나무를 베어 깔고 간신히 들어왔다. 백제의 왕은 임자의 말대로 독 안에서 자라를 잡으려 그곳을 지키지 않았고, 수군은 백강(지금의 백마강)을 지켰으며 육군은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었다. 당나라 군사는 이미 진펄을 지나왔기에 용기가 배가 되어 백제의 수군을 깨뜨리고 언덕으로 올라왔다. 의직은 군사를 호령하여 격전을 벌이다 죽었다. 의직의 지략이 계백만 못했으나 용감함은 비등하여 한때 당나라 군사들의 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므로 신라 사람들이 의직이 죽은 곳을 조룡대라 이름 붙였다. 이는 의직을 용에 비유하고, 의직을 죽인 것을 용을 낚아 올린 것에 비유한 것이었다.
제12편번역 대기
원문
여지승람(與地勝覽)에는 “소정방이 백강에 이르자 비바람이 크게 일어서 행군할 수가 없으므로 무당에게 물으니 강의 용이 백제를 수호하는 것이라 하므로 소정방이 흰 말을 미끼로 하여 용을 낚아 잡았으므로, 강은 백마(白馬)라 이름하고 그곳을 조룡대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백마강이란 이름이 이미 소정방이 오기 전에 있었으므로 성충의 유언한 상소에도 백강 어귀를 말하였었다. 백강은 백마강의 준말이고, 일본사에는 백촌강(白村江)이라 일컬었는데 촌(村)은 뜻이 ‘말’이니 백촌강은 곧 백마강의 별역(別譯) 이다. 그 이야기 자체가 허황할 뿐 아니라 또한 역사와도 모순되니 해상잡록에 보인 바와 같이 의직의 죽은 곳이라고 한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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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의자왕(義慈王)의 포로됨과 백제의 두 서울 함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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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이 포로가 되고 백제의 두 수도가 함락되다
제12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김유신 등이 계백의 군사를 격파하고 그 이튿날인 11일에 백마강에 다다르니 소정방이 약속 기일이 지났다고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 (金文穎)을 목베려고 하였다. 유신은 당이 신라를 속국으로 대하려는 것이 분하여 눈에서 불이 떨어지는 듯 어느덧 칼을 빼어들고 여러 장 수들을 돌아보며 백제는 내버려두고 당과 싸우자고 외치니, 당의 장수 중에 이것을 탐지한 자가 있어 소정방에게 말하여 마침내 강문영을 풀어주고 두 나라 군사가 합세하여 ‘솝울’(所夫里)을 공격하였다. 의자왕은 태자 외에 적자가 몇 있고 서자가 40여 명이 있어 왕이 평일에 그들에게 다 좌평(佐平)의 직함을 주어 나라의 큰일에 다 참모하고 심지어 실권도 행사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대략 세 파로 나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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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등이 계백의 군사를 격파하고 그 다음 날인 11일에 백마강에 이르니 소정방이 약속한 기일이 지났다고 신라의 독군 김문영을 죽이려 하였다. 유신은 당나라가 신라를 속국으로 삼으려는 것에 분하여 눈에서 불이 떨어지는 듯 어느덧 칼을 빼들고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며 백제는 그대로 두고 당과 싸우자고 외치니, 당의 장수 중에 이것을 알아챈 자가 있어 소정방에게 말하여 마침내 강문영을 풀어주고 두 나라 군사가 합세하여 소부리를 공격하였다. 의자왕은 태자 외에 적자가 몇 있고 서자가 40여 명이 있어 왕이 평일에 그들에게 모두 좌평의 직함을 주어 나라의 큰일에는 모두 참모하고 심지어 실권까지 행사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대략 세 파로 나뉘었다.
제12편번역 대기
원문
태자 효(孝) 등은 북경 (北京) 곰나루성 [熊津城]으로 가서 웅거하여 전국의 의병을 모으자고 하였고, 둘째 아들 태(泰)는 솝울을 지켜 부자(父子) · 군신(君臣)이 힘써 싸우면서 각지의 의병을 기다리자고 하였으며, 왕자 융(隆) 등은 고기와 술과 폐백을 적군에게 올려 물러가기를 빌자고 하였다. 사오십 명의 적자 서자들이 왕의 앞에서 제각기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여 떠들어대니 왕이 어느 의견을 좇아야 할지 몰라서 왕자의 말을 다 허락하여 융에게는 강화의 권한을 맡기고 태에게는 싸워 지킬 권한을 맡기고, 자기는 태자와 함께 북경 곰나루성으 로 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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