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야
新羅·加耶BC 57 – AD 935문헌 원문 · 번역
조선상고사 제11편 백제 멸망
제11편번역 대기
원문
요수 싸움은 전사(前史)에 몽땅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신당서(新唐書) 고려전(高麗傳)에 신라가 구원을 청하므로 황제(당태종을 가리 킨 것)가 오선(吳船) 4백 척을 내어 양식을 운반하고,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였는데, 이는 분명히 기원후 645년 안시성 (安市城) 싸움 전에 요수에서 큰 싸움이 있어서 당이 완전히 패했으므로, 당의 사관(史官)들이 나라의 수치를 숨기는 춘추(春秋)의 필법을 써서 이같이 모호하고 간략한 몇 구절의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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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편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이는 대개 당태종이 연개소문의 혁명 뒤에 고구려 인심이 위태로이 여기고 의심함을 기회하여 신속히 수군을 내어 침노하다가 고구려 수군에게 패한 것이다. 기록이 넉넉지 못하므로 그 실제를 자세히 적을 수 없으나 이것이 안시성 싸움의 초본(草本)이요, 두 나라 충돌의 첫 째장이므로 이제 그 눈동자만 보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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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대개 당태종이 연개소문의 혁명 뒤에 고구려 인심이 위태롭고 의심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신속히 수군을 내려 침노하다가 고구려 수군에게 패한 것이다. 기록이 넉넉지 못하여 그 실제를 자세히 적을 수는 없으나 이것이 안시성 싸움의 초본이며, 두 나라 충돌의 첫 장이므로 이제 그 눈동자만 보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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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장 안시성(安市城)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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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안시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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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시성 싸움 전 피차간의 교섭과 충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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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수(隋)와 당(唐)과의 두 번 싸움의 사실이 거의 수서(隋書)와 당서(唐書)를 추려 기록한 것이고, 그 두 싸움에 관한 수서 · 당서의 기록이 거의 거짓임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수서는 수가 그 싸움 뒤에 곧 멸망하고, 그 싸움을 기록한 자가 수의 사람이 아니요 당의 사람이므로 거짓이 오히려 적거니와, 당서는 당의 연대가 오래 계속되어 고구려와 싸운 기록은 곧 당 때의 사관 (史官)이 적은 것이기 때문에 시(是)와 비(非)와 이기고 짐을 뒤집어 꾸며서 거짓이 얼마인지를 알 수 없다. 이제 신구 당서 · 자치통감(資 治通鑑) · 책부원귀 (冊府元龜) 등에 보인 두 나라의 교섭 · 충돌의 경과를 대강 기록하여 그 진위(眞僞)를 분별한 다음 당시의 실정을 논술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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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와 싸운 두 번의 사실은 거의 수서와 당서를 모아 기록한 것이며, 그 두 싸움에 관한 수서와 당서의 기록이 거의 거짓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수서는 수가 그 싸움 뒤에 곧 멸망하고, 그 싸움을 기록한 사람이 수나라 사람도 아니고 당나라 사람도 아니므로 거짓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적고, 당서는 당나라의 연대가 오래 계속되어 고구려와 싸운 기록은 곧 당나라 때의 사관이 적은 것이기에 시(是)와 비(非)를 그리고 이기고 짐을 뒤집어 꾸며서 거짓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이제 신구 당서, 자치통감, 책부원귀 등에 나타난 두 나라의 교섭과 충돌의 경과를 대략 기록하여 그 진위(眞僞)를 분별한 다음 당시의 실정을 논술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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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관(貞觀) l7년 6월----태상승(太常丞) 등소(鄧素)가 고려(고구려)에 사신갔다가 돌아와서 회원진(懷遠鎭)에 수비병을 더 두어 고구려를 압박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먼 곳의 사람이 복종하지 아니하면 문덕(文德)을 닦아서 오게 할 것이요 1,2백 명의 수비병으로 능히 멀리 떨어져 있는 자를 위복(威服)시켰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소. (貞觀十七年六月 ----太常丞鄧素 使高麗還 請於懷遠鎭 增置戌兵 以逼高麗 上曰 遠人不服 則修文德以來之 未聞 一二百戌兵 能威絶域者也)” 하였다. 등소가 고구려를 보고 온 결과 고구려의 강석함을 두려워하여 수비병을 증가시키기를 청한 것인데 그 수가 단 몇백을 청한 것이 아닐 것이니 이는 한갓 업신여겨 쓴 것이지 실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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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 17년 6월에 태상승 등소가 고구려에 사신 갔다가 돌아와 회원진에 수비병을 더 두어 고구려를 압박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멀리 있는 사람이 복종하지 않으면 문덕을 닦아 오게 할 것이요, 일 이백 명의 수비병으로 능히 멀리 떨어져 있는 자를 위복시켰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등소가 고구려를 보고 온 결과 고구려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수비병을 늘리기를 청한 것인데 그 수가 단 몇 백을 청한 것이 아닐 것이니 이는 한갓 업신여겨 쓴 것이지 실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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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윤(閏) 6월 양제(煬帝)가 방현령(房玄齡)에게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국정을 독단하니 진정 참을 수 없는 일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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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우리 병력으로 쳐서 빼앗기가 어렵지 아니할 것이나 다만 백성들을 수고롭게 할 수 없어 우선 글안[契丹]과 말갈(靺鞨)로 하여금 치게 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오?(閏六月 煬帝渭房玄齡曰 蓋蘇文 弑其君 而專國政 誠不可以忍 以今日兵力 取之不難 但不欲勞百姓 吾欲且使契丹靺鞨 擾 之 何如)” 하였는데 말갈은 곧 예(濊)이니 고구려에 복속(服屬)한 지가 이미 여러 백 년이요, 글안도 장수태왕(長壽太王) 이후에 고구려에 속하였으니 당태종이 어찌 예와 글안을 시켜 고구려를 침노하게 할 수 있으랴? 당태종이 비록 망령이 들었더라면 이 따위 실제에 맞지 아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것도 대개 사관의 망령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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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병력으로 쳐서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겠으나, 다만 백성들을 수고롭게 할 수 없어 우선 거란과 말갈로 하여금 치게 하고자 하는데 어떠하오?”라고 하였는데, 말갈은 곧 예(<0xE6><0xBF><0x8A>)이니 고구려에 복속한 지가 이미 여러 백 년이요, 거란도 장수태왕 이후에 고구려에 속하였으니 당태종이 어찌 예와 거란을 시켜 고구려를 침노하게 할 수 있으랴? 당태종이 비록 망령이 들었더라면 이 따위 실제에 맞지 아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것도 대개 사관의 망령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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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떤 사람이 황제에게 고려(고구려)를 치기를 권하였으나 황제는 상 중(喪中 : 영류왕의 죽음)이라 하여 치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或勸帝 可隧討高麗 帝不欲因喪伐之)”라고 하였는데, 당태종이 연개소문을 임금을 죽인 적이라하여 이를 치려고 하였다면 춘추의 의리로 보더라도 상 중에 치는 것이 옳을 것인데, 당태종이 도리어 상 중이라 하여 치려 하지 않았다고 함이 무슨 말인가. 대개 당태종이 이때에는 아직 동침(東侵)의 방략을 완전히 정하지 못하여 군사를 일으키지 못한 것이니 사관의 해설은 당치도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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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황제에게 고구려를 치라고 권했으나, 황제는 상 중이라 하여 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혹은 황제가 고구려를 치도록 권유받았으나, 황제가 상중이라서 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당태종이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인 적이 있다 하니 이를 치려고 했다면, 춘추의 의리로 보더라도 상중에 치는 것이 옳을 것인데, 당태종이 오히려 상중이라 하여 치려 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무슨 말인가. 대개 당태종은 이때에는 아직 동쪽으로 침범할 방책을 완전히 정하지 못하여 군사를 일으키지 못한 것이니 사관의 해설은 틀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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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라가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고려가 백제와 동맹하여 장차 신라를 치려고 합니다----하여 당제(唐帝 : 태종)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에게 명하여 국서를 가지고 가서 고구려를 타이르기를, 신라는 우리에게 나라를 맡겼으니 너희와 백제는 각기 군사를 거둘것이다. 만약 다시 공격하면 내년에 군사를 일으켜서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라고 하게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현장이 평양에 이르니 막리지(연개소문)는 이미 군사를 내어 신라를 쳐서 그 두 성을 깨뜨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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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요구로 고구려 왕이 막리지를 불러 돌아오자 현장이 그를 타일러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하니, 막리지가 말하기를 옛날 수(隋)가 우리 나라를 침노하자 신라는 우리의 허를 틈타 우리 땅 5백 리를 빼앗았으니 원래 우리가 땅을 침노하였다고 할 것이 아니다. 군사를 일으키기가 두려워서 아직까지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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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요구로 고구려 왕이 막리지를 불러 돌아오자 현장이 그를 달래어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하니, 막리지가 말하기를 옛날 수나라가 우리 나라를 침노하자 신라는 우리의 허점을 틈타 우리 땅 오백 리를 빼앗았으니 원래 우리가 땅을 침노하였다고 할 것이 아니다. 군사를 일으키기가 두려워서 아직까지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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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遺使言 高麗百濟聯和 將見討- - - -唐帝 命司農承相里玄奬 霽?書 諭高麗曰 新羅委質國家 爾與百濟 各宜즙兵 若更攻之 明年發兵 擊爾國牟 翌年正月 玄奬至平壞 莫離支己發兵 擊新羅 破其兩城 高麗王使召之 乃還 玄奬諭使勿攻新羅莫離支曰 昔隋人入寇 新羅乘虛 奪我地五百里 白非歸我侵地恐兵未能已)”고 하였는데, 상리현장이 이와같이 오만한 국서를 가지고 왔다면 훗날 장엄(蔣儼 : 아래 글에 보임)과 같이 잡혀서 옥에 갇혔을 것인데 어찌 무사히 돌아갔으랴? 또 연개소문이 이때 신라 정벌 중에 있었다면 어찌 당의 사신 현장의 청에 의해 소환될 수 있었으랴? 신라 본기에 의하면 수가 침노해왔을 때 허를 타 5백 리 땅을 빼앗은 일도 없고 또 연개소문이 두 성을 격파한 일도 없었으니, 이것은 대개 당태종이 현장의 사신갔다 돌아온 것으로 인하여 출병의 구실을 만들어 나라 안에 선포하려고 조작한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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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유사가 전하기를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토벌하려 하니 당나라 황제가 사농승상리 현장에게 서신을 보내 고구려에 이르기를 신라는 우리 나라의 질이 그러하니, 너희와 백제는 각기 군사를 갖추어 만약 더 공격한다면 내년에는 병력을 일으켜 너희 나라를 치고, 다음 해 정월에 현장이 평양으로 와서 모려지까지 병력을 일으켜 신라를 쳐 두 성을 함락시켰다. 고구려 왕이 사신을 불러 돌아오게 하니, 현장은 사신에게 신라와 모려지에는 공격하지 말라고 전했다. 옛날 수나라 사람들이 침입해 왔을 때 신라는 허점을 틈타 우리 땅 오백 리를 빼앗았고, 백제는 돌아가지 않고 우리의 땅을 침범하여 군사를 일으키기 어려웠다.)라고 하였는데, 상리현장이 이와 같이 거만한 국서를 가지고 왔다 하더라도 훗날 장엄(蔣儼)과 같이 붙잡혀 옥에 갇혔을 것이니 어찌 무사히 돌아갔겠는가? 또 연개소문이 이때 신라를 정벌하는 도중에 있었다면 어찌 당나라 사신 현장의 청에 의해 소환될 수 있었겠는가? 신라 본기에 의하면 수가 침노해 왔을 때 허를 찔러 오백 리 땅을 빼앗은 일도 없고, 또 연개소문이 두 성을 격파한 일도 없었으니, 이것은 대개 당태종이 현장의 사신을 보내고 돌아온 것으로 인하여 출병의 구실을 만들어 나라 안에 선포하려고 꾸민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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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황제가 고구려를 치고자 고구려를 속일 사자(使者)를 모으는데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니, 장엄(蔣儼)이 분연히 나서서 천자의 위무 (威武)에 사이(四東)가 다 두려워하는데 어느 나라가 감히 명을 받들고 간 사람을 도모하겠느냐 ? 만약 불행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진실로 내가 죽을 곳이다 하고 마침내 자기가 가기를 청하여 갔다가 막려지에게 구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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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將伐高句麗 募僞使者 人皆憚行 蔣儼奪曰 以天子威 武 四夷畏威 최爾國 敢圖王人 如有不幸 固吾死所也 遂請行 僞莫離支 所因”고 하였는데 장엄이 무슨 사명을 띠고 갔는지 역사에 기록되지 아니하였으나 만일 그전에 연개소문에게 잡혀서 죽은당의 사신이 없었다면 어찌하여 모두 가기를 꺼려하기에 이르렀으랴? 이로써 당의 사관(史官)들이 그 나라의 치욕을 숨기기 위하여 교섭의 전말을 많이 빼버렸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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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 장군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자, 위조 사신들을 모집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꺼리며 <0xEC><0xA2><0x90>엄이 말하기를 하늘의 임금의 위세로 인해 사방 오랑캐들이 두려워하여 최이국은 감히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만약 불행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나의 죽을 곳일 뿐이다라며 마침내 가기를 청하였는데, 위조된 모리지 지파가 그 원인이었다고 하였다. 장엄이 무슨 사명을 띠고 갔는지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만약 그전에 연개소문에게 잡혀 죽은 당나라의 사신이 없었다면 어찌하여 모두 가기를 꺼려하게 되었겠는가? 이로써 당나라 사관들이 그 나라의 치욕을 숨기기 위하여 교섭의 전말을 많이 빼버렸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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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당은 서로의 강약을 다투는 양립(兩立)할 수 없는 나라요, 연개소문과 당태종은 너 나의 우열을 내기하는 양립할 수 없는 인물인데, 이같은 두 인물이 두 나라의 정권을 잡았으니 두 나라 전쟁의 폭발은 조만간 필연적으로 일어날 사실이었다. 만일 연개소문의 집권이 몇 해만 더 일렀더라면 당태종이 동침하기 전에 이미 연개소문의 서정 (西征)이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다만 당태종이 지나를 통일 한 지 30년, 또 제왕이 되어 모든 시설을 재지(才智)껏 정비한 지 20 년, 또 돌궐 · 토곡혼 등의 나라를 정복한 지 l0년이 된 뒤에야 연개소문은 겨우 혁명을 성공하고 ‘신크말치’의 자리에 올랐으므로 당태종이 먼저 침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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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당은 서로 강약을 다투어 함께 존재할 수 없는 나라요, 연개소문과 당태종은 너와 나 중 누가 우열을 가릴지 겨루는 함께 존재할 수 없는 인물인데, 이 같은 두 인물이 두 나라의 정권을 잡았으니 두 나라 전쟁의 폭발은 조만간 필연적으로 일어날 사실이었다. 만일 연개소문의 집권이 몇 해만 더 빨랐더라면 당태종이 동침하기 전에 이미 연개소문의 서정(西征)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다만 당태종이 지나를 통일한 지 30년, 또 제왕이 되어 모든 시설을 재지껏 정비한 지 20년, 또 돌궐·토곡혼 등의 나라를 정복한 지 10년이 된 뒤에야 연개소문은 겨우 혁명을 성공하고 ‘신크말치’의 자리에 올랐으므로 당태종이 먼저 침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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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은 자기가 고구려 내정과 외교의 모든 큰 사건을 다 정리한 뒤에 전쟁을 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 같았지마는 이는 사세(事勢)가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둘러서 남으로 백제와 동맹을 맺고 서북으로 설연타(薛延陀) 등을 선동하여 여당(與黨)을 만들 뿐이었다. 당태종은 수의 양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망했음이 징계되었으나 또한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형세에 있음을 자각했으므로 연개소문의 내부세력이 아직 완전히 굳어지기 전에 이를 꺾으려고 서둘러서 군사를 동원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양편의 형세였으니 이 밖의 저네의 역사의 춘추필법적 기재와 우리의 역사의 노예 근성적 편집은 거의 믿을 수 없는 망령된 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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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태종의 전략과 침입(侵入) 노선(路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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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종의 전략과 침입 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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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의 고구려 침입은 일조일석(一朝一夕)의 일이지마는 그 경영의 거의 20년 동안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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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한 것은 하루아침의 일이었으나, 그 계획은 거의 20년간에 걸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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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奏) · 한(漢) 이후에 흉노(匈奴)가 쇠하고, 위(魏) · 진(晋) 이후도 오호(五胡)는 다 지나에 잡거(雜居)하였으며, 그 밖에 돌궐 · 토곡혼이 가끔 지나의 서북에서 일어났으나 다 오래지 않아 잔약해지고, 오직 고구려만이 동남 · 동북에서 지나에 대치하여 척발씨 (招跋氏)의 주(周)와 겨루고 수(隋)에 이르러는 양제 (煬帝)의 수백만 군사를 전멸시켜서 위무(威武)가 일세를 진동하여 놀라게 하는 동시에 지나와 맞서서 ‘신수두’의 교의(敎議)며 이두자 (吏讀字)의 시문(詩文)이며, 그 밖에 음악 · 미술 등이 다 그 고유의 국풍(國風)으로 발달하여 정치상뿐 아니라 엄연한 일대 제국을 형성 하였으므로, 당태종이 지나 이외에 또 고구려가 있음을 시기하여 정관(貞觀)의 치(治) 20년 동안에 겉으로는 편안하고 한가롭게 여러 신하들과 도를 닦고 덕을 닦는 길을 강론하였지마는 그의 머릿속에는 유악(유握)의 모신(謀臣)인 방현령(房玄齡) 등도 알지 못하게 고구려와의 전쟁에 대한 계획이 오락가락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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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구려를 치려면 먼저 수의 양제가 패한 원인을 구명하여 그와 반대되는 전략을 짜야겠다고 하여 이에 다음과 같은 초안을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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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구려를 공격하려면 먼저 수나라의 양제가 패배한 원인을 밝혀내고, 그것과 반대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하여 이에 다음과 같은 초안을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