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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제1편 총론 朝鮮上古史 第1篇

신채호 · 1931 · 저본 한국어 위키문헌
문단 272개 · 번역 확정 0개
제1편문단 8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안정복(安鼎福)이 【동사강목】(東史綱目:箕子朝鮮에서 高麗 까지의 역사)을 짓다가 개연히 내란의 잦음과 외적의 출몰이 동국(東國:우리나라)의 고사(古史)를 흔적도 없게 하였음을 슬퍼하였으나, 나로서 보건대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적의 전쟁에서 보다, 곧 조선사를 저술하던 그 사람들의 손에 의해 더 없어졌다고 본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하면 역사란 머리에 쓴 말과 같이 시간적 공간적 발전으로 되어오는 사회 활동 상태의 기록이므로 때[時],곳[地],사람[人] 세 가지는 역사를 구성하는 세 가지 큰 원소가 되는 것인데 이 원소들이 올바르게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역
안정복이 『동사강목』(기자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을 지으면서, 개연히 내란이 잦고 외적이 출몰하는 것이 동국의 옛 역사를 흔적도 없이 만들었음을 슬퍼하였으나, 나로서는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적의 전쟁보다는, 곧 조선사를 저술하던 사람들의 손에 의해 더 없어졌다고 본다. 어찌하여 그러하냐면, 역사는 머리에 쓴 말과 같이 시간적, 공간적 발전으로 되어오는 사회 활동 상태의 기록이므로 때, 곳, 사람 세 가지가 역사를 구성하는 세 가지 큰 원소가 되는데, 이 원소들이 올바르게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1편문단 82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예를 들자면 신라됨은 박(朴),석(昔),김(金) 세 성과, 동산 고헌촌(突山古墟村) 등 여섯 부(部)의 사람[人]으로써뿐 아니라, 또한 경상도인 그곳[地]과 고구려,백제와 한 시대인 때[時]로써 된 것이니, 만일 그보다 더 올라가 2천 년 전인 왕검(王儉)과 같은 연대이거나 더 내려와서 2천 년 뒤인 오늘과 같은 시국이라면, 비록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성지(聖智)와 육부(六部) 사람들의 질직(質直)과 계림(鷄林:慶州)의 땅을 가졌을지라도 당시와 똑같이 될수 없으며, 또 위치가 유럽에 놓였거나 아프리카에 있었다면 그 또한 다른 면목의 나라는 되었을지언정 당시의 나라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번역
예를 들어 신라가 된 것은 박씨, 석씨, 김씨 세 성과 동산 고헌촌 등 여섯 부의 사람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경상도라는 땅과 고구려, 백제와 같은 시대였기 때문이며, 만약 그보다 더 올라가 2천 년 전 왕검과 같은 연대이거나 더 내려와서 2천 년 뒤 오늘과 같은 시국이라면, 비록 박혁거세의 성지(聖智)와 육부 사람들의 질직과 계림의 땅을 가졌을지라도 당시와 똑같아질 수 없으며, 또 위치가 유럽에 놓였거나 아프리카에 있었다면 그 또한 다른 면모의 나라는 되었을지언정 당시의 나라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제1편문단 83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이것은 지극히 명백한 이치인데 기왕의 조선의 역사가들은 매양 그 짓는 바 역사를 자기 목적의 희생으로 만들어서 도깨비도 떠 옮기지 못한다는 땅을 떠 옮기는 재주를 부려 졸본(卒本:고구려가 처음 개국한 압록강 북쪽)을 떠다가 성천(成川) 혹은 영변(寧邊)에 갖다놓으며, 안시성(安市城:만주 遼東에 있는 고구려의 성)을 떠다가 용강(龍岡)혹은 안주(安州)에 갖다놓으며, 아사산(阿斯山:단군이 國部를 옮긴 곳)을 떠다가 황해도의 구월산(九月山)을 만들며 가슬라(迦瑟羅)를 떠다가 강원도의 강릉군을 만들었다.
번역
이는 지극히 명백한 이치인데, 이전의 조선 역사가들은 매번 자신이 만든 역사를 자기 목적의 희생으로 만들어 도깨비도 옮기지 못할 땅을 옮기는 재주를 부려 졸본(고구려가 처음 개국한 압록강 북쪽)을 떠다가 성천 혹은 영변에 갖다 놓고, 안시성(만주 요동에 있는 고구려의 성)을 떠다가 용강 혹은 안주에 갖다 놓고, 아사산(단군이 국부를 옮긴 곳)을 떠다가 황해도의 구월산을 만들고 가슬라를 떠다가 강원도의 강릉군을 만들었다.
제1편문단 84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이와 같은 허다한 땅의 빙거(憑據)가 없는 역사를 지었다.
번역
이와 같은 수많은 땅의 근거가 없는 역사를 지었다.
제1편문단 85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더 크지도 말고 더 작지도 말라고 한 압록강 이내의 이상적 강역을 획정(劃定)하려 하며(我邦彊域考), 무극(無?) 일연(一然) 등 불자(佛子)가 지은 역사책(三國遺事)에는 불법이 단 한 글자도 들어오지 않은 왕검시대에부터 인도의 범어(梵語)로 만든 지명'인명이 가득하며, 김부식(金富軾) 등 유가(儒家)가 적은 문자(三國史記)에는 공자'맹자의 인의를 무시하는 삼국(三國) 무사의 입에서 경전(經典)의 문구가 관용어처럼 외워지고, 삼국사(三國事:중국 역사책의 하나) 열전에 있는 여러 백년 동안 조선 전역의 인심을 지배하던 영랑(永郞)'술랑(述郞)'안상(安祥)'남석행(南石行) 등 네 대성(大聖)의 논설은 볼 수 없고 지나를 유학한 학생인 최치원(崔致遠)만 세세히 서술하였으며, 여사제강(麗史堤綱)에 원효(元曉)'의상(義湘) 등 여러 철인들의 불학(佛學)에 영향된 고려 일대의 사상의 어떠함은 볼 수 없고, 왕 태조(王太祖) 통일 이전에 죽은 최응(崔凝)이 통일 이후에 그가 올렸다는 간불소(諫佛疎)만 적혀 있다.
번역
더 크지도 작지도 않게 압록강 안쪽의 이상적인 강역을 정하려 하며, 무극 일연 등 불자가 지은 역사책 삼국유사에는 불법이 단 한 글자도 들어오지 않은 왕검시대부터 인도의 범어로 만든 지명인명이 가득하고, 김부식 등 유가가 적은 문자 삼국사기에는 공자나 맹자의 인의를 무시하는 삼국의 입에서 경전의 문구가 관용어처럼 외워지고, 삼국사 열전에 있는 여러 백 년 동안 조선 전역의 인심을 지배하던 영랑, 술랑, 안상, 남석행 등 네 대성의 논설은 볼 수 없고 지나를 유학한 학생인 최치원만이 세세히 서술하였으며, 여사지강에 원효나 의상 등 여러 철인들의 불학의 영향받은 고려 일대의 사상의 어떠함은 볼 수 없고, 왕 태조 통일 이전에 죽은 최응이 통일 이후에 올렸다는 간불소만 적혀 있다.
제1편문단 86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이와 같은 허다한 때[時]의 구속을 받지 않고 역사를 지어 자기의 편벽된 신앙의 주관적 심리에 부합시키려 하며, 심한 경우에는 사람[人]까지 속여 신라의 금왕(金王)을 인도의 찰제리종(刹帝利種:왕족)이라 하며(三國遺事), 고구려의 추모왕(鄒牟王)을 고신씨(高辛氏:五帝의 한 사람)의 후손이라 하며(三國史記),게다가 조선 사상의 근원이 되는 서운관(書雲觀:觀家臺)의 책들을 공자의 도(道)에 어긋난다 하여 불태워버렸다.
번역
이와 같은 수많은 시대적 구속을 받지 않고 역사를 지어 자신의 편협한 신앙의 주관적인 심리에 맞추려 하며, 심한 경우에는 사람까지 속여 신라의 금왕을 인도의 찰제리종이라 하고(삼국유사), 고구려의 추모왕을 고신씨의 후손이라 하며(삼국사기), 게다가 조선 사상의 근원이 되는 서운관의 책들을 공자의 도에 어긋난다 하여 불태워버렸다.
제1편문단 87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이두형(李斗馨:조선 正租때 사람)이 말하기를, “근일의 어느 행장(行狀)과 묘지명(墓誌銘)을 보든지, 그 주인공이 반드시 용모는 단엄(端嚴)하고 덕성은 충후(忠厚)하며, 학문은 정주(程朱:중국의 程子와 朱子 또 그들의 性理學)를 조종으로 삼고 문장은 한유(韓柳:중국의 문장가 韓愈와 柳宗元)를 숭상하여 거의 천편일률(千篇一律)이니, 이는 그 사람을 속일 뿐 아니라, 그 글도 가치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개인 전기(傳記)의 실상을 잃은 데 대한 개탄일 뿐이지마는, 이제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천대하는 춘추(春秋)의 부월(斧鉞)아래에서 자라난 후세 사람들이 그러한 마음과 습속으로 삼국의 풍속을 이야기하며 문약(文弱) 편소(偏小)에 스스로 만족한 이조 당대의 사람들이 그러한 주관으로 상고지리(上古地理)를 그리니, 이에 조선(단군)이나 부여나 삼국이나 동북국(東北國:渤海)이나, 고려나 이조-5천 년 이래의 모든 조선이 거의 한도가니로 부어낸 것같이 땅이 늘고 줄어듦에 따라 민족 활동의 활발하고 약해진 점이나 시대의 고금을 좇아 국민사상이 갈린 금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번역
이두형(조선 정조 때 사람)이 말하기를, "요즘의 행장이나 묘지명을 보아도, 그 주인공이 반드시 용모는 단엄하고 덕성은 충후하며, 학문은 정주(중국의 정자와 주자 그리고 그들의 성리학)를 주조로 삼고 문장은 한유(중국의 문장가 한유와 유종원)를 숭상하여 거의 천편일률이니, 이는 그 사람을 속일 뿐 아니라, 그 글도 가치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개인 전기(傳記)의 실상을 잃은 데 대한 개탄일 뿐이다. 이제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천대하는 춘추의 부월 아래에서 자라난 후세 사람들이 그러한 마음과 습속으로 삼국의 풍속을 이야기하며 문약하고 편소에 스스로 만족한 이조 당대의 사람들이 그러한 주관으로 상고지리를 그리니, 이에 조선(단군)이나 부여나 삼국이나 동북국(발해)이나, 고려나 이조-5천 년 이래의 모든 조선이 거의 한도가니로 부어낸 것같이 땅이 늘고 줄어듦에 따라 민족 활동의 활발하고 약해진 점이나 시대의 고금을 좇아 국민사상이 갈린 금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제1편문단 88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크롬웰이 화가가 자기의 상을 그릴 때 그 왼쪽 눈 위의 혹을 빼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고 나를 그리려면 나의 본 얼굴로 그리라고 하였으니, 이말은 화가의 아첨함을 물리칠 뿐 아니라 곧 자기의 참된 상을 잃을까 함이었다.
번역
크롬웰이 화가에게 자신의 상을 그릴 때 왼쪽 눈 위의 혹을 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나를 그리려면 나의 본래 얼굴로 그리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화가의 아첨함을 물리칠 뿐 아니라 곧 자기의 참된 모습을 잃을까 함이었다.
제1편문단 89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조선사를 지은 기왕의 조선의 사가(史家)들은 매양 조선의 혹을 베어내고 조선사를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네들이 쓴 안경이 너무 볼록하므로, 조선의 눈이나 귀나 코나 머리 같은 것을 혹이라 하여 베어버리고 어디서 수없는 정말 혹을 가져다가 붙여놓았다. 혹 붙인 조선사도 기왕에는 읽는 이가 너무 없다가, 세계가 서로 크게 통하면서 외국인들이 왕왕 조선인을 만나 조선사를 묻는데 어떤 이는 조선인보다 조선사를 더 많이 아는 고로 부끄러운 끝에 돌아와 조선사를 읽는 이도 있다.
번역
조선사를 지은 이전의 사가들은 매번 조선의 혹을 베어내고 조선사를 쓰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쓴 안경이 너무 볼록하여, 조선의 눈이나 귀나 코나 머리 같은 것을 혹이라 하여 잘라내고 어디서 수많은 진짜 혹을 가져다가 붙여 놓았다. 혹을 붙인 조선사도 이전에는 읽는 사람이 너무 적다가, 세계가 서로 크게 통하면서 외국인들이 왕왕 조선인을 만나 조선사를 묻는데 어떤 이는 조선인보다 조선사를 더 많이 알게 되자 부끄러운 끝에 돌아와 조선사를 읽는 사람도 있다.
제1편문단 90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나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나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혹 붙은 조선사요, 옳은 조선사가 아니었다. 기왕에 있는 기록이 그와 같이 다 틀린 것이라면 무엇에 의거하여 바른 조선사를 짓겠는가? 사금(沙金)을 아는 사람이 모래 한 말[一斗]을 일면 좁쌀만한 금을 하나 얻거나 혹은 하나도 얻지 못하기도 하나니, 우리의 문적(文籍)에서 사료를 구하기가 이같이 어려운지라, 혹 어떤 사람은 조선사를 연구하자면 우선 조선과 만주 등지의 땅 속을 파서 많은 발견이 있어야 하고, 금석학(金石學).고전학(古錢學).지리학.미술학.계보 등의 학자가 쏟아져 나와야 한다고 하는 이가 많은데, 그도 그러하거니와 현금에는 우선 급한 대로 있는 사책(史策)을 가지고 득실을 평하며 진위를 비교하여 조선사의 앞길을 개척함이 급무인가 한다
번역
그러나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나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혹 붙은 조선사일 뿐, 바른 조선사가 아니었다. 이미 존재하는 기록이 모두 틀린 것이라면 무엇을 근거로 바른 조선사를 세울 수 있겠는가? 사금을 아는 사람이 모래 한 말[一斗]을 보면 좁쌀만 한 금을 얻거나 혹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기도 하니, 우리의 문헌에서 사료를 구하기가 이같이 어려우므로, 혹 어떤 사람은 조선사를 연구하려면 우선 조선과 만주 등의 땅속을 파서 많은 발견이 있어야 하고, 금석학, 고전학, 지리학, 미술학, 계보 등의 학자들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고 하는 이가 많으나, 그것도 그러하거니와 현금에는 우선 급한 대로 있는 사책을 가지고 득실을 평하며 진위를 비교하여 조선사의 앞길을 개척하는 것이 급한 일이라고 한다.
제1편문단 9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 제3장 구사(舊史)의 종류와 그 득실의 간략한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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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옛 기록의 종류와 그 옳고 그름에 대한 간단한 평가
제1편문단 92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조선의 역사에 관한 서류를 찾는다면 신지(神誌)부터 비롯되겠는데, 신지는 권벽(權擘:선조 때 사람)의 응제시(應製蒔:임금의 명에 의해 지은 시)에서 단군 때 사관(史官)이라고 한 사람이다.
번역
조선의 역사에 관한 문서를 찾으려면 신지부터 시작할 것이나, 신지는 권벽이라는 사람이 임금의 명을 받아 지은 시에 기록된 단군 시대의 사관이다.
제1편문단 93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나 나로소 보건대 단군은 곧 수두[蘇塗] 임금이요, 신지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수두 임금의 수좌(首佐)인 벼슬 이름 신치[臣智]이니 (蘇塗와 臣智의 자세한 것은 思想史에 보임), 역대의 신치 들이 해마다 10월 수두 대제(大祭)에 우주의 창조와 조선의 건설과 산천지리의 명승과 후세 사람의 거울 삼을 일을 들어 노래하였는데, 후세의 문사들이 그 노래를 혹은 이두문(吏讀文)으로 편집하고 혹은 한자의 오언시(五言詩)로 번역하여 왕궁에 비장하였으므로 신지비사(神誌秘詞) 또는 해동비록(海東秘錄) 등의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번역
그러나 나로소 보건대 단군은 곧 수두 임금이며, 신지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수두 임금의 수좌인 벼슬 이름 신치이니 (수두와 신치에 대한 자세한 것은 사상사에 보임), 역대의 신치들이 해마다 10월 수두 대제에 우주의 창조와 조선의 건설과 산천지리의 명승과 후세 사람의 거울 삼을 일을 들어 노래하였는데, 후세의 문사들이 그 노래를 혹은 이두문으로 편집하고 혹은 한자의 오언시로 번역하여 왕궁에 비장하였으므로 신지비사 또는 해동비록 등의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제1편문단 94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고려에 와서는 저작자의 성명을 알 수 없는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삼국사(三國史) 등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가 있었으나, 지금에 전하는 것은 삼국사기와 일연유사뿐인데 그 전하고 전하지 아니하는 원인을 생각하건대 김부식, 일연 두사람만의 저작이 우수하여 전해진 것이 아니라, 대개 고려 초엽부터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나아가 북쪽의 옛땅을 회복하자는 화랑의 무사가 한 파를 이루고, 사대(事大)로 국시(國是)를 삼아서 압록강 안에 구차히 편안하게 있을 것을 주장하는 유교도(儒敎道)가 한 파가 되었다.
번역
고려에 와서는 저작자의 성명을 알 수 없는 삼한고기, 해동고기, 삼국사 등과 김부식의 삼국사기 및 일연의 삼국유사가 있었으나, 지금 전해지는 것은 삼국사기와 일연유사에 불과하다. 그 전하고 전하지 않는 원인을 생각해보건대, 김부식과 일연 두 사람만의 저작이 뛰어났어서 전해진 것이 아니라, 대개 고려 초엽부터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아가 북쪽의 옛 땅을 회복하자는 화랑 무사가 한 파를 이루고, 사대(事大)로 국시를 삼아 압록강 안에 구차하게 편안히 지내기를 주장하는 유교도가 한 파가 되었기 때문이다.
제1편문단 95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두파가 대치에서 논전을 벌이기 수백 년만에 불교도 묘청(妙淸)이 화랑의 사상에다가 음양가(陰陽家)의 미신을 보태어 평양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북벌을 실행하려다가 유교도 김부식에게 패망하고, 김부식은 이에 그 사대주의를 근본으로 하여 삼국사기를 지은 것이다.
번역
두파가 대치에서 논전을 벌인 지 수백 년 만에 불교도 묘청이 화랑의 사상에 음양가의 미신을 더하여 평양에서 군사를 일으켜 북벌을 실행하려 했으나 유교도 김부식에게 패망했고, 김부식은 이에 그 사대주의를 근본으로 삼아 삼국사기를 지었다.
제1편문단 96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므로 동.북 두 부여를 떼어버려 조선문화가 유래한 곳을 진토(塵土) 속에 묻고 발해를 버려 삼국 이래 결정된 문명을 초개(草芥)속에 던지고 이두문(吏讀文)과 한역(漢譯)의 구별에 어두워서 한 사람이 몇 사람이 되고 한 곳이 몇 군데가 된 것이 많으며, 내사(內史)나 외적(外籍)의 취사(取捨)에 홀려서 앞뒤가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것이 많아 거의 사적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번역
그러므로 동북 두 부여를 떼어내어 조선 문화가 유래한 곳을 흙먼지 속에 묻고 발해를 버렸으며, 삼국 이래 결정된 문명을 풀잎만 한 것에 던지고, 이두문과 한역의 구별에 어두워 한 사람이 몇 사람이 되고 한 곳이 몇 군데가 된 것이 많으며, 내사나 외적의 취사에 홀려서 앞뒤가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것이 많아 거의 사적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제1편문단 97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불행히 그 뒤 얼마 안 가서 고려가 몽고에 패햐여 흘필렬(忽必烈:쿠빌라이)의 위풍이 전국을 놀라게 하여 황궁(皇宮)이니 제궁(帝宮)이니 하는 명사(名詞)들이 철폐되고, 해동천자(海東天子)의 팔관악부(八關樂府)가 금지되고, 이로부터 만일 문헌에 독립자존(獨立自存)에 관한 것이 있으면 일체 꺼려 피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때라 허다한 역사 저서 중에서 유일한 사대사상의 고취자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그에 딸려 있는 삼국유사만이 전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번역
불행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가 몽고에 패하여 쿠빌라이의 위세가 전국을 놀라게 하여 황궁이나 제궁과 같은 명칭들이 폐지되고, 해동천자의 팔관악부가 금지되었으며, 이로 인해 문헌에 독립적인 존재에 관한 것이 있다면 일체 꺼리거나 피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때라 수많은 역사 저서 중에서 유일하게 사대사상의 고취자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그에 딸린 삼국유사만이 전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1편문단 98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고려 당대의 사승(史乘)을 말한다면, 고려 말엽에 임금과 신하들이 고종(高宗)이전의 나라 형세가 강성하던 때의 기록은 더욱 몽고의 꺼리고 싫어함에 걸릴까보아 두려워서 깍아버리거나 고치고, 오직 말을 낮추고 후한 예폐(禮幣)로 북쪽 강대국들에게 복종하여 섬기던 사실만을, 혹은 부연하고 혹은 지어내서 민간에 퍼뜨렸다. 이러한 기록들이 곧 이조의 정인지(鄭麟趾)가 찬술한 고려사(高麗史)의 원전이 되었고, 이조 세종(世宗)이 비상하게 사책(史冊)에 유의하였으나, 다만 그의 할아버지인 태조(太祖)와 아버지인 태종(太宗)이 호두재상(虎頭宰相) 최영(崔塋)의 북벌군 중에서 모반하여 사대(事大)의 기치를 들고 혁명의 기초를 세웠으므로 권근(權近).
번역
고려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사람들을 말하자면, 고려 말기에 임금과 신하들이 고종 이전 나라 형세가 강성하던 때의 기록은 몽골의 꺼림칙함과 싫어함을 걸릴까 두려워하여 잘라내거나 고치고, 오직 말을 낮추며 후한 예물로 북방 강대국들에게 복종하여 섬기던 사실만을 혹은 부연하거나 지어내서 민간에 퍼뜨렸다. 이러한 기록들이 곧 이조의 정인지가 찬술한 고려사의 원전이 되었고, 이조 세종이 비상하게 사책에 유의하였으나, 다만 그의 할아버지인 태조와 아버지인 태종이 호두재상 최영의 북벌군 중에서 모반하여 사대의 기치를 들고 혁명의 기초를 세웠으므로 권근하였다.
제1편문단 99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조선사략(朝鮮史略),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을 편찬하게 함에 있어 몽고의 압박을 받던 고려 말엽 이전의 조선의 각종 실기에 의거하여 역사를 짓지 못하고 몽고의 압박을 받은 이후 외국에 아첨한 글과 위조한 고사에 의거하여 역사를 지어 구차스럽게 사업을 마치고, 정작 전대(前代:고려)의 실록은 민간에 전해짐을 허락하지 않고 규장각(奎章閣) 안에 비장해두었는데 임진왜란의 병화(兵火)에 죄다 타버렸다. 그 뒤에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의 자리를 빼앗고, 만주 침략의 꿈을 품고서 강계(江界)에 둔병(屯兵)을 경영하다가,
번역
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조선사략,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편찬하게 하였으나, 몽고의 압박을 받던 고려 말기 이전의 조선의 각종 실기에 의거하여 역사를 짓지 못하고 몽고의 압박을 받은 이후 외국에 아첨한 글과 위조한 고사에 의거하여 역사를 지어 구차하게 사업을 마치고, 정작 전대의 실록은 민간에 전해지도록 허락하지 않고 규장각 안에 비장해 두었는데 임진왜란의 병화에 죄다 타버렸다. 그 뒤에 세조가 단종의 자리를 빼앗고, 만주 침략의 꿈을 품고서 강계에 둔병을 경영하다가
제1편문단 100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자기네 태조의 존명건국(尊明建國)의 주의에 충돌되어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간하는 일이 분분하고,
번역
자신들의 태조가 존명으로 나라를 세운 것에 대해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간청하는 일이 분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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