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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제1편 총론 朝鮮上古史 第1篇

신채호 · 1931 · 저본 한국어 위키문헌
문단 272개 · 번역 확정 0개
제1편문단 14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높이 10길 가량이고, 아래층의 둘레는 80발인데, 다른왕릉은 위층이 파괴되어 높이는 알 수 없고 그 아래층의 둘레는 대개 광개토왕과 같음). 왕릉의 위층에 올라가 돌기둥이 섰던 자취와 덮은 기와의 남은 조각과 드문드문 서있는 소나무, 잣나무를 보고 후한서(後韓書)에,
번역
높이가 열 길가량이고 아래층의 둘레는 팔십 발인데, 다른 왕릉은 위층이 파괴되어 높이는 알 수 없고 그 아래층의 둘레는 대개 광개토왕과 같았다. 왕릉의 위층에 올라가 돌기둥이 서 있던 자취와 덮은 기와의 남은 조각, 드문드문 서 있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보고 후한서에,
제1편문단 142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고구려 사람들은 금은과 재백(財帛)을 다하여 깊이 장사지내고, 돌을 둘러 봉하고 또한 소나무, 잣나무를 심는다(高句麗人金銀財帛 盡於厚葬 環石爲封 亦種松柏).”고 한 아주 간단한 문구의 뜻을 비로소 충분히 해석하고, ‘수백 원만 있으면 묘 하나를 파볼 수 있을 것이요, 수천 원 혹은 수만 원이면 능 하나를 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수천 년 전 고구려 생활의 활사진을 볼 수 있을 것인데.’ 하는 꿈 같은 생각만 하였다. 아! 이와 같은 천장비사(天藏秘史)의 보고(寶庫)를 만나서 나의 소득이 무엇이었던가? 인재(人材)와 물력(物力)이 없으면 재료가 있어도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았다.
번역
고구려 사람들은 금은과 재물을 다하여 깊이 장사 지내고, 돌로 둘러 봉하며 또한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하였다. 이처럼 아주 간단한 문구의 뜻을 비로소 충분히 해석하고, '수백 원만 있으면 무덤 하나를 파볼 수 있을 것이요, 수천 원 혹은 수만 원이면 능 하나를 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수천 년 전 고구려 생활의 활기를 볼 수 있을 텐데.' 하는 꿈같은 생각만 하였다. 아! 이와 같은 천장비사의 보고를 만나서 나의 소득이 무엇이었던가? 인재와 물력이 없으면 재료가 있어도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았다.
제1편문단 143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나 하룻동안 그 외부에 대한 어설픈 관찰만 이었지마는 고구려의 종교. 예술. 경제력 등의 어떠함이 눈앞에 살아 나타나서 그 자리에서 “집안현을 한번 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번 읽는 것보다 낫다,” 하는 단안을 내렸다.
번역
그러나 하룻동안 외부를 어설프게 관찰했을 뿐이었으나, 고구려의 종교, 예술, 경제력 등이 눈앞에 살아 나타나자 그 자리에서 "집안현을 한번 보는 것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는 단언을 내렸다.
제1편문단 144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 뒤 항주(杭州) 도서관에서 우리 나라 금석학자 김정희(金正喜:秋史)가 발견한 유적을 가져다가 지나인이 간행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보니, 신라말 고려초의 사조(思潮)와 속상(俗尙)의 참고가 될 것이 많았고, 한성의 한 친구가 보내준 총독부 발행의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도 그 조사한 동기의 어떠함이나 주해의 억지로 끌어다 붙인 몇몇 부분만을 제외하면, 또한 우리 고사 연구에 도움될 것이 많았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우리 한미한 서생(書生)의 손으로는 도저히 성취하지 못할 사료임을 스스로 깨달았다.
번역
그 뒤 항주 도서관에서 우리 나라 금석학자 김정희(秋史)가 발견한 유적을 가져다가 지나인이 간행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보니, 신라 말 고려 초의 사조와 속상의 참고가 될 것이 많았고, 한성의 한 친구가 보내준 총독부 발행의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도 그 조사한 동기의 어떠함이나 주해의 억지로 끌어다 붙인 몇몇 부분만을 제외하면, 또한 우리 고사 연구에 도움될 것이 많았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우리 한미한 서생의 손으로는 도저히 성취하지 못할 사료임을 스스로 깨달았다.
제1편문단 145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2) 각 서적의 호증(互證)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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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서적들의 상호 증거에 대하여
제1편문단 146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① 일찍이 고려 최영전(崔塋傳)에 의거하건대, 최영이 말하기를, “당나라가 삼십만 군사로 고구려를 침범하여, 고구려는 승군(僧軍) 삼만을 내어 이를 대파하였다.” 고 했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 중에 이 사실이 보이지 아니한다.
번역
일찍이 고려 최영전에 의거하건대, 최영이 말하기를, “당나라가 삼십만 군사로 고구려를 침범하여, 고구려는 승군 삼만을 내어 이를 대파하였다.”고 했으나, 삼국사기 50권 중에 이 사실이 보이지 않는다.
제1편문단 147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면 승군이란 무엇인가 하면,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재가(在家)한 화상은 가사도 입지 아니하고 계율도 행하지 아니하며, 조백으로 허리를 동이고 맨발로 걷고, 아내를 가지고, 자식을 기르며, 물건의 운반, 도로의 소제, 도랑의 개척, 성실(城室)의 수축 등 공사(公事)에 복역하며, 국경에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단결하여 싸움에 나서는데, 중간에 거란(契丹)도 이들에게 패하니, 그 실은 죄를 지어 복역한 사람들로서, 수염과 머리를 깍았으므로 이인(夷人:오랑캐)이 그들을 화상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에서 승군의 면목을 대강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내력이 어디서 비롯하였느냐 하는 의문이 없지 않다.
번역
그러면 승군이란 무엇이냐 하면, 서긍의 고려도경에 "집에 있는 화상은 가사도 입지 않고 계율도 행하지 않으며, 조백으로 허리를 동이고 맨발로 걷고, 아내를 가지고, 자식을 기르며, 물건 운반, 도로 소제, 도랑 개척, 성실 수축 등 공사에 복역하며, 국경에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단결하여 싸움에 나서는데, 중간에 거란도 이들에게 패하니, 그 실은 죄를 지어 복역한 사람들로서, 수염과 머리를 깎았으므로 이민족이 그들을 화상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서 승군의 모습을 대략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내력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없지 않다.
제1편문단 148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통전(通典).신당서(新唐書)등 이름있는 책에 의하면, 조의선인이라는 관명(官名)이 있었고, 고구려사에는 명림답부(明臨答夫:고구려 재상)를 연나조의라 하였고, 후주서(後周書)에는 조의선인을 예속선인이라고 하였으니, 선인(先人) 선인(仙人)은 다 국어 ‘선인’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고, 조의 혹 백의(帛衣)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이른바 조백으로 허리를 동이므로 이름함이다.
번역
통전이나 신당서 같은 책들에 의하면, 관명이 조의선인이라는 것이 있었고, 고구려사에는 명림답부를 연나조의라 하였으며, 후주서에는 조의선인을 예속선인이라고 하였으니, 선인은 모두 국어 '선인'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며, 조의 혹 백의는 고려도경에 이른바 조백으로 허리를 동이므로 이름함이다.
제1편문단 149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선인(仙人)은 신라 고사(故事)의 국선(國仙)과 같은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의 단장이요, 승군(僧軍)은 국선 아래 딸린 단병(團兵)이요, 승군이 재가한 화상(和尙)이라 함은 후세 사람이 붙인 별명이다.
번역
신선은 신라 고사의 국가적 무사단장과 같은 종교적 무사단장이요, 승군은 국선 아래 딸린 단병이며, 승군이 재가한 화상은 후세 사람들이 붙인 별명이다.
제1편문단 150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서긍이 외국의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와서 이것을 보고 그 단체의 행동을 서술함에 있어서, 그 근원을 물으니 복역한 사람이라는 억측의(名詞)를 말해준 것이다.
번역
서긍이 외국의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이것을 보고 그 단체의 행동을 서술함에 있어서, 그 근원을 묻자 복역한 사람이라는 억측을 말해준 것이다.
제1편문단 151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이에 고려사로 인하여 삼국사에 빠진 승군을 알게 되고, 고려도경으로 인하여 고려사에 자세치 않은 승군의 성질을 알게 되고 통전. 신당서. 후주서와 신라의 고사 등으로 인하여 승군과 선인(先人)과 재가의 화상이 같은 단체의 무리임을 알게 되었으니, 다시 말하면 당나라의 30만 침입군이 고구려의 종교적 무사단인 선인군(先人軍)에게 크게 패하였다는 몇십 자의 약사(略史)를 6,7가지 서적 수천 권을 뒤진 결과로써 비로소 알아낸 것이다.
번역
이에 고려사로 인해 삼국사에 빠져 있던 승군의 기록을 알게 되었고, 고려도경으로 인해 고려사에 자세히 적지 않은 승군의 성품을 알게 되었으며, 통전, 신당서, 후주서와 신라의 고사 등에 의하여 승군과 선인(先人)과 재가의 화상이 같은 단체의 무리임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당나라의 30만 침입군이 고구려의 종교적 무사단인 선인군에게 크게 패했다는 몇십 자의 약사를 6, 7가지 서적 수천 권을 뒤진 결과로써 비로소 알아낸 것이다.
제1편문단 152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②당나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안시성(安市城)에서 화살에 맞아 눈이 상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후세 사람이 매양 이것을 역사에 올리는데,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정관은 당나라 태종의 연호)에도,“어찌 현화(玄花:눈)가 백우(白羽)에 떨어질 줄 알았으리(那知玄花落白羽).”라고 하여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였으나,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지나인의 신구당서(新舊唐書)에서는 보이지 않음은 무슨까닭인가?
번역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안시성에서 화살에 맞아 눈을 다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어 후세 사람들이 매번 이것을 역사에 올리는데, 이색의 정관음에도 "어찌 현화가 백우에 떨어질 줄 알았으리"라고 하여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였으나,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지나인의 신구당서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제1편문단 153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만일 사실의 진위를 묻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버렸다가는 역사상의 위증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당나라 태종의 눈 상한 사실을 지나의 사관(史官)이 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 해답을 구하였다.
번역
만약 사실의 진위를 묻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버린다면 역사상의 위증죄를 짓는 것이 되므로, 당나라 태종의 눈이 상한 사실을 지나의 사관이 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 해답을 구하였다.
제1편문단 154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송(宋)나라 태종(太宗)이 거란을 치다가 흐르는 화살에 상하여 달아나 돌아가서, 몇 해 후에 필경 그 상처가 덧나서 죽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송사(宋史)나 요사(遼史)에는 보이지 아니하고, 사건이 여러 백 년 지난 뒤에 진정이 고증(考證)하여 발견한 것이다.
번역
송나라 태종이 거란을 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달아나 돌아가서, 몇 해 후에 그 상처가 덧나 죽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송사나 요사에는 보이지 않고, 사건이 여러 백 년 지난 뒤에 진정으로 고증하여 발견한 것이다.
제1편문단 155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이에 나는 지나인은 그 임금이나 신하가 다른 민족에게 패하여 상하거나 죽거나 하면 그것을 나라의 수치라 하여 숨기고 역사에 기록하지 않은 실증을 얻어서 나의 앞의 가설을 성립시켰다.
번역
이에 나는 지나는 그 임금이나 신하가 다른 민족에게 패하여 상하거나 죽는 것을 나라의 수치로 여겨 감추고 역사에 기록하지 않았다는 실증을 얻어 나의 앞선 가설을 세웠다.
제1편문단 156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그러나 지나인에게 국치(國恥)를 숨기는 버릇이 있다 하여 당나라 태종이 안시성에서 화살에 맞아 눈을 상하였다는 실증은 되지 못하므로, 다시 신구당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태종본기(太宗本紀)에 태종이 정관(偵觀) 19년 9월에 안시성에서 군사를 철수하였다 하였고, 유박전(劉泊傳)에는 그 해 12월에 태종의 병세가 위급하므로 유박이 몹시 슬퍼하고 두려워하였다고 하였으며, 본기(本紀)에는 정관 20년에 임금의 병이 낫지 아니하여 태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정관23년 5월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그 죽은 원인을 강복(綱目)에는 이질(痢疾)이 다시 악화한 것이라고 하였고, 자치통감(資治痛鑑)에는 요동에서부터 병이 있었다고 하였다.
번역
그러나 지나인에게 나라의 부끄러움을 숨기는 버릇이 있다고 하여 당나라 태종이 안시성에서 화살에 맞아 눈을 다치게 되었다는 사실은 증명되지 못하였으므로, 다시 신구당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태종본기에는 태종이 정관 19년 9월에 안시성에서 군사를 철수하였다고 하였고, 유박전에는 그 해 12월에 태종의 병세가 위급하여 유박이 몹시 슬퍼하고 두려워하였다고 하였으며, 본기에는 정관 20년에 임금의 병이 낫지 않아 태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정관 23년 5월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그 죽은 원인을 강복에는 이질이 다시 악화한 것이라고 하였고, 자치통감에는 요동에서부터 병이 있었다고 하였다.
제1편문단 157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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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높은 이와 친한 이의 욕봄을 꺼려 숨겨서, 주천자(周天子)가 종후(鄭侯)의 화살에 상했음과 노(魯)나라의 은공(隱公).송공(昭公) 등이 살해당하고 쫓겨났음을 춘추(春秋)에 쓰지 아니하였는데, 공구(孔丘)의 이러한 편견이 지나 역사가의 버릇이 되어, 당나라 태종이 이미 빠진 눈을 유리쪽으로 가리고, 그의 임상병록(臨床病錄)의 기록을 모두 딴 말로 바꾸어놓았다.
번역
대개 높은 이와 친한 이의 욕심을 꺼려 숨기었으며, 주천자가 정후의 화살에 상했음과 노나라 은공, 송공 등이 살해당하고 쫓겨났음을 춘추에 쓰지 않았는데, 공구의 이러한 편견이 지나 역사가의 버릇이 되어, 당나라 태종이 이미 빠진 눈을 유리 쪽으로 가리고, 그의 임상병록의 기록을 모두 다른 말로 바꾸어 놓았다.
제1편문단 158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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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의 상처가 내종(內腫:몸 속으로 곪음)이 되고 눈병이 항문병(肛門病)으로 되어 전쟁의 부상으로 인하여 죽은 자를 이질이나 늑막염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해놓은 것이다. 그러면 삼국사기에는 어찌하여 실제대로 적지 않았는가? 이는 신라가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미워하여 그 명예로운 역사를 소탕하여 위병(魏兵)을 격파한 사법명(沙法名)과 수군(隨軍)을 물리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도리어 지나의 역사로 인하여 그 이름이 전해졌으니(을지문덕의 이름이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은 곧 김부식이 지나사에서 끌어다 쓴 것이므로 그 논평에, ”을지문덕은 중국사가 아니면 알 도리가 없다“고했음), 당태종이 눈을 잃고 달아났음이 고구려의 전쟁사에 특기할 만한 명예로운 일이라 신라인이 이것을 빼버렸음이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번역
화살 상처가 몸속으로 <0xEA><0xB3><0xAA>는 것이 되고 눈병이 항문병으로 되어 전쟁 부상으로 죽은 자를 이질이나 늑막염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에는 어찌하여 실제대로 적지 않았을까? 이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미워하여 그 명예로운 역사를 소탕하고 위병을 격파한 사법명과 수군을 물리친 을지문덕의 이름이 오히려 지나의 역사로 인해 전해졌기 때문이다(을지문덕의 이름이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은 곧 김부식이 지나사에서 가져다 쓴 것이므로 그 논평에, "을지문덕은 중국사가 아니면 알 도리가 없다"고 했음). 당태종이 눈을 잃고 달아났다는 것이 고구려 전쟁사에 특기할 만한 명예로운 일이라 신라인이 이것을 빼버렸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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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리가 당태종의 눈 잃은 일을 처음에 전설과 목은집(牧隱集)에서 어렴풋이 찾아내어 신구당서나 삼국사기에 이것을 기재하지 않은 의문을 깨침에 있어서ㅡ 진정의 야산묵담(兩山墨談)에서 같은 종류의 사항을 발견하고, 공구의 춘추(春秋)에서 그 전통의 악습을 적발하고, 신구당서, 통감강목(痛鑑綱目) 등을 가져다 그 모호하고 은미(隱微)한 문구 속에서 첫째로 당태종 병록(이질 등)보고가 사실이 아님을 갈파하고, 둘째로 목은의 정관음(貞觀吟:당태종의 눈 잃은 사실을 읊은 시)의 신용할 만함을 실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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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가 당태종이 눈을 잃은 일을 처음에 전설과 목은집에서 어렴풋이 찾아내어 신구당서나 삼국사기에 이것을 기록하지 않은 의문을 깨닫는 데 있어서, 진정의 야산묵담에서 같은 종류의 사항을 발견하고, 공구의 춘추에서 그 전통의 악습을 적발하며, 신구당서, 통감강목 등을 가져와 그 모호하고 은미한 문구 속에서 첫째로 당태종의 병록(이질 등) 보고가 사실이 아님을 밝히고, 둘째로 목은의 정관음(당태종의 눈을 잃은 사실을 읊은 시)의 신용할 만함을 입증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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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로 신라 사람이 고구려 승리의 역사를 말살함으로써 당태종의 패전과 부상한 사실이 삼국사기에 빠지게 되었음을 단정하고 이에 간단한 결론을 얻으니 이른바, ‘당태종이 보장왕(寶藏王)3년(서기644)에 안시성에서 눈을 상하고 도망하여, 돌아가서 당시 외과 의사의 불완전으로 거의 30달을 앓다가, 보장왕 5년에 죽었다. ’라는 것이었다. 이 수십자를 얻기에도 5,6종 서적 수천 권을 반복하여 읽어보고 들며 나며 혹은 무의식중에서 얻고 혹은 무의식중에서 찾아내어 얻은 결과이니 그 수고로움이 또한 적지 아니하였다.
번역
셋째로 신라 사람이 고구려 승리의 역사를 지워버림으로써 당태종이 패전하고 부상한 사실이 삼국사기에 빠지게 되었음을 단정하고 이에 간단한 결론을 얻으니, 이른바 '당태종이 보장왕 3년(서기 644년)에 안시성에서 눈을 다치고 도망하여 돌아가서 당시 외과 의사의 미흡함으로 거의 30달을 앓다가, 보장왕 5년에 죽었다.'라는 것이었다. 이 수십 자를 얻기 위해서도 오육종 서적 수천 권을 반복해서 읽어보고 들으며 나아가거나 혹은 무의식중에 얻거나 혹은 무의식중에 찾아내어 얻은 결과이니 그 수고로움이 또한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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