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高麗AD 918 – AD 1392문헌 원문 ·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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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卷一
卷一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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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丑二十四年後晉天福六年,契丹會同四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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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 24년 후진 천복 6년, 거란이 함께 4년이었다.
卷一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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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四月。大匡庾黔弼卒。黔弼平州人,以將略事太祖。凡出征,受命卽行,不宿於家,每凱還,王必迎勞。終始寵遇,諸將莫及。諡忠節,後配享太祖廟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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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라 4월. 대광의 유검필이 죽었다. 검필은 평주 사람으로, 장략을 받아 태조를 섬겼다. 출정할 때마다 명을 받으면 즉시 나섰고, 집에 머무는 법이 없었으며, 매번 돌아올 때마다 왕께서 반드시 노고를 치하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총애를 받았으니, 여러 장수들이 미치지 못했다. 사후 충절로 추서받았고, 후에 태조묘에 모셔졌다.
卷一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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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歲,遣大相王申一如晉,獻方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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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에 대상왕 신일(申一)을 진나라로 보내서 여러 가지 물건을 바치게 하였다.
卷一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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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寅二十五年後晉天福七年,契丹會同五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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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 25년 후진 천복 7년, 거란이 합치된 지 5년이었다.
卷一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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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十月。契丹遣使來,歸橐駞五十匹。王以契丹嘗與渤海連和,忽生疑貳,不顧舊盟,一朝殄滅,此爲無道之甚,不足遠結爲隣,絶其交聘,流其使三十人于海島,繫橐駞萬夫橋下,皆餓死。李齊賢曰:「忠宣王嘗問於臣齊賢曰:『我太祖之世,契丹遺橐駞,繫之橋下,不與芻豆,以餓而死,故以名其橋焉。橐駞雖不產於中國,中國亦未嘗不畜之。國君而有數十頭橐駞,其弊不至於傷民,且却之則已矣,何至餓而殺之乎。』對曰:『創業垂統之主,其見遠而其慮深,非後世之所及也。且如宋太祖養猪禁中,仁宗令放之,後得妖人,顧無所取血者,則知太祖慮亦及此,此亦未爲定論。安知太祖養猪之意,不有大於取血耶。我太祖之所以爲此者,將以折戎人之譎計耶,抑亦防後世之侈心耶,蓋必有微旨矣。此在殿下恭默而思之,力行而體之爾,非愚臣所敢輕議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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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열째 달에 괴등(契丹) 사신이 와서 낙타 오십 필을 바쳤다. 왕은 괴등이 예전에 발해와 화친을 맺었으나, 갑자기 의심을 품어 옛 맹약을 무시하고 하루아침에 멸망시켰으니, 이는 도리가 없는 극치이며, 멀리 두어 이웃으로 삼을 수 없고, 그 교류를 끊고 사신 삼십 명을 해섬에 보내 낙타 만부교 아래에 묶어 모두 굶어 죽게 하였다. 이제현이 말하였다. "충선왕께서 예전에 신 제현에게 물으시기를, '우리 태조 시대에 괴등이 낙타를 남겨 교 아래에 묶어 땔감조차 주지 않아 굶어 죽게 하니, 그리하여 그 다리를 이름으로 삼았다. 낙타가 비록 중국에서 나지 않았으나, 중국에서도 사육한 적이 없다. 나라의 임금이 낙타가 수십 필 있어도 백성에게 해를 끼칠 정도는 아니니, 그저 막아두면 될 것을, 어찌 굶겨 죽게 하는가?'라고 하셨다. 이에 대답하기를, '나라를 세우고 대를 잇는 주인은 그 생각이 멀고 그 염려가 깊어 후세가 미치지 못하는 바입니다. 게다가 송 태조가 돼지 기르는 것을 금지하고 인종이 풀어주었더니, 나중에 요사스러운 사람이 생겨 피를 취할 곳이 없었으니, 태조의 염려 역시 이와 같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 또한 확정된 논리가 아닙니다. 태조가 돼지 기르는 뜻이 피를 취하는 것보다 크지 않다고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 태조가 이같이 한 것은 혹여 오랑캐의 속임수를 꺾으려는 계책이거나, 아니면 후세의 사치스러운 마음을 막으려는 것일 것입니다. 반드시 미묘한 뜻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전하께서 공손히 침묵하며 생각하시고 힘써 실천하시어 몸소 보여주셔야 할 것이지, 어찌 신 같은 어리석은 신하가 감히 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셨다."
卷一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癸卯二十六年後晉出帝仍稱天福八年,契丹會同六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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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 26년 후진 출제는 여전히 천복 8년이었고, 거란은 회동 6년이었다.
卷一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夏四月。王御內殿,召大匡朴述煕,親授訓要曰:「我聞,大舜耕歷山,終受堯禪,高帝起沛澤,遂興漢業。予亦起自單平,謬膺推戴,夏不畏熱,冬不避寒,焦身勞思,十有九載,統一三韓,叨居大寶,二十五年,身今老矣。第恐後嗣縱情肆欲,敗亂綱紀,大可憂也。爰述訓要,以傳諸後,庶幾朝披夕覽,永爲龜鑑。其一曰,我國家大業必資諸佛護衛之力。是故創立禪敎寺院,差遣住持焚修,使之各治其業。後世,姦臣執政,徇僧請謁,各業寺社,爭相換奪,切宜禁之。其二曰,諸寺院皆是道詵推占山水順逆而開創者也。道詵云:『吾所占定外,妄有創造,則損薄地德,祚業不永。』朕念後世國王公侯后妃朝臣各稱願堂,或增創造,則大可憂也。新羅之末,競造浮屠,衰損地德,以厎於亡,可不戒哉。其三曰,嫡子嫡孫傳國傳家,雖曰常禮,然丹朱不肖,堯禪於舜,實爲公心。凡元子不肖者,與其次子,次子皆不肖者,與其兄弟之中群下推戴者,俾承大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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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라 4월. 왕이 내전에서 대광 박술희를 불러 친히 가르침을 전하며 말하였다. "내가 듣기로, 대순은 산에 농사지으며 마침내 요에게 선양을 받았고, 고제는 패택에서 일어나 한업을 일으켰다. 나 또한 단평에서 일어났으나 우연히 추대되어 여름에는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지 않으며, 몸을 혹사하고 깊이 생각하여 열아홉 해 동안 삼한을 통일하고 큰 보물을 차지하였다. 스물다섯 해가 지나 몸이 이제 늙었다. 다만 후사가 방종하게 되어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릴까 두려우니 크게 걱정된다. 이에 가르침을 전하여 후대에 남기어, 아침저녁으로 살펴보아 영원한 거울로 삼게 하려 한다. 첫째로 말하건대, 우리 국가의 큰 업적은 반드시 부처님의 보호하는 힘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 사찰을 세우고 주지들을 파견하여 학문을 닦게 하고 각자 그 일을 다스리게 하였다. 후세에는 간신들이 정사를 맡아 승려들에게 아뢰어 여러 사찰과 사회가 서로 차지하려 하니, 반드시 금해야 한다. 둘째로 말하건대, 모든 사찰은 도술이나 점괘를 통해 산과 물의 순리와 역리를 따져 열었던 것들이다. 도술에 이르기를 '내가 점친 곳 밖에서 허망하게 창조한다면, 엷은 땅의 덕을 손상하여 업적이 영원하지 않다'고 하였다. 짐은 후세의 국왕과 공후와 후비와 조정 신하들이 각자 원당(願堂)이라 칭하며 혹 더 창조하는 것을 보면 크게 걱정된다. 신라 말기에 무분별하게 탑을 세워 땅의 덕을 쇠퇴시키고 결국 망하게 된 것은 경계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셋째로 말하건대, 적자나 적손이 나라를 이어가고 가문을 잇는 것이 비록 상례라고 하나, 단주가 어미 같지 못하고 요가 순에게 선양한 것은 실로 공의 마음이었다. 만약 원자가 어미 같지 못하고, 그 다음 아들마저도 어미 같지 못하며, 그의 형제들 가운데 무리들이 추대하는 자를 큰 통치권을 잇게 해야 한다."
卷一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其四曰,惟我東方舊慕唐風,文物禮樂悉遵其制,殊方異土,人性各異,不必苟同。契丹是禽獸之國,風俗不同,言語亦異,衣冠制度愼勿效焉。其五曰,朕賴三韓山川陰佑,以成大業。西京水德調順,爲我國地脈之根本,宜當四仲巡駐,留過百日,以致安寧。其六曰,燃燈所以事佛,八關所以事天靈及五嶽名山大川龍神也。後世姦臣建白加減者,切宜禁止。吾亦當初誓心,會日不犯國忌,君臣同樂,宜當敬依行之。其七曰,人君得臣民之心爲甚難。欲得其心,要在從諫遠讒而已,從諫則聖,讒言如蜜,不信則讒自止。又使民以時,輕徭薄賦,知稼穡之艱難,則自得民心,國富民安。古人云:『芳餌之下,必有懸魚,重賞之下,必有良將,張弓之外,必有避鳥,垂仁之下,必有良民。』賞罰中,則陰陽順矣。其八曰,車峴以南公州江外山形地勢竝趨背逆,人心亦然。彼下州郡人參與朝廷,與王侯國戚婚姻,得秉國政,則或變亂國家,或銜統合之怨,犯蹕生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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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말에 이르기를, 오직 우리 동방은 예로부터 당나라의 풍속을 그리워하여 문물과 예악을 모두 그 제도를 따르나, 다른 방위와 다른 땅이기에 사람의 마음도 각기 다르니 억지로 같을 필요가 없다. 괴원(契丹)은 짐승의 나라라 풍속이 다르고 말 또한 다르니 옷차림이나 제도는 결코 본받아서는 안 된다. 다섯 번째 말에 이르기를, 짐은 삼한의 산천의 음덕으로 큰일을 이루었다. 서경의 물과 덕은 조화롭고 순하여 우리 나라 지맥의 근본이니 마땅히 사중(四仲)이 돌아다니며 백여 일 동안 머물러 안녕하게 해야 한다. 여섯 번째 말에 이르기를, 등불을 밝히는 것은 부처님께 예를 갖추기 위함이며, 팔관은 하늘 영신과 오악의 명산 큰 강 속의 용신에게 예를 갖추하는 것이다. 후세 간신들이 백(白)을 더하고 덜어낸 것은 마땅히 금지해야 한다. 나 또한 처음에 맹세한 마음으로 날마다 나라의 금기 사항을 범하지 않고, 군신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을 마땅히 공경하며 따라야 한다. 일곱 번째 말에 이르기를, 임금이 신민의 마음을 얻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 마음을 얻으려면 다만 간언을 따르고 험담을 멀리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간언을 따르면 성스러우며, 험담은 꿀과 같아 믿지 않으면 스스로 그치게 된다. 또한 백성들에게 때에 맞추어 가혹한 부역을 덜어주고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면 저절로 백성의 마음을 얻고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편안하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좋은 먹이 아래에는 반드시 매달린 물고기가 있고, 큰 상 아래에는 반드시 좋은 장수가 있으며, 활시위 밖에는 반드시 피하는 새가 있고, 인자함을 베풀면 반드시 좋은 백성이 있다.' 상벌을 적절히 하면 음양의 순리가 이룬다. 여덟 번째 말에 이르기를,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 밖의 산세와 지세는 모두 등지고 역행하는 형국이며, 사람의 마음도 그러하다. 저 아래 주(州)의 백성들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나 국신과 혼인하고 나라의 정사를 맡게 되면, 때로는 국가를 어지럽히거나 혹은 통합된 원한을 품어 난리를 일으키기 쉽다.
卷一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且其曾屬官寺奴婢津驛雜尺,或投勢移免,或附王侯宮院,姦巧言語,弄權亂政,以致災變者,必有之矣,雖其良民,不宜使在位用事。其九曰,百辟群僚之祿,視國大小,已爲定制,不可增減。且古典云:『以庸制祿,官不以私。』若以無功人及親戚私昵,虛受天祿,則不止下民怨謗,其人亦不得長享福祿,切宜戒之。又以强惡之國爲隣,安不可忘危。兵卒宜加護恤,量除徭役,每年秋,閱勇銳出衆者,隨宜加授。其十曰,有國有家,儆戒無虞,博觀經史,鑑古戒今。周公大聖無逸一篇進戒成王,宜當圖揭,出入觀省。」十訓之終,皆結以中心藏之四字。自是,嗣王相傳爲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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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가 한때 관사(官寺)의 노비나 역참(驛站)의 잡역꾼이었거나, 혹은 세력에 기대어 면제받았거나, 혹은 왕후(王侯)의 궁궐에 붙어 간사한 말로 권력을 휘두르며 정사를 어지럽혀 재앙을 일으킨 자는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그가 선량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자리에 두어 일을 하게 하지는 않아야 한다. 아홉 번째는 백관(百辟) 무리 관료들의 녹봉은 나라의 크고 작음에 따라 이미 정해진 것이니, 더하거나 줄일 수 없다. 또한 고전에서 말하기를, '용(庸)으로 녹봉을 정하고, 관직은 사사(私事)로 삼지 말라'고 하였다. 만약 공적 없는 사람이나 친척들이 사사적으로 가까워져서 하늘의 녹봉을 헛되이 받게 한다면, 이는 아래 백성들의 원망과 비방을 낳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도 오래도록 복록을 누릴 수 없으니,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또한 강하고 나쁜 나라를 이웃으로 삼으니, 위태로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병졸들에게는 보살핌을 더하고, 부역을 덜어주어야 하며, 매년 가을에 용맹한 자들을 뽑아 나갈 때는 마땅히 상을 주어야 한다. 열 번째는 나라와 집안에 있어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역사를 두루 살피며 옛것을 본받아 오늘날을 경계해야 한다. 주공대성(周公大聖)의 무일(無逸) 편은 성왕에게 경계하는 것이니, 마땅히 살펴보고 출입하며 관찰해야 한다. 열 가지 가르침의 끝은 모두 '마음에 간직함'이라는 네 글자로 맺는다. 이로써 후계 왕이 이를 전하여 보배로 삼는다.
卷一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五月。王不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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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이었다. 왕이 편안하지 않았다.
卷一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丁酉。宰臣廉相王規朴守文等侍,王曰:「漢文遺詔曰:『蓋天下萬物之萌生,靡有不死。死者,天地之理,物之自然,奚可甚哀。』前古哲王秉心如此。予遘疾,已歷二旬,視死如歸,有何憂也。漢文之言卽予意也。內外機務久不決者,卿等竝與太子武裁決而後聞。」丙午。疾大漸,御神德殿,命學士金岳,草遺詔。文成,王不復語。左右失聲大哭,王問:「此何聲也。」對曰:「聖上作民父母,今日,欲棄群臣,臣等痛不自勝耳。」王笑曰:「浮生自古然矣。」言訖,有頃而薨。太子諸王宗室近臣皆擗地哀號,百官列位於內議省門外。王規出,宣遺命曰:「內外庶僚竝聽東宮處分。」於是,太子卽位,率群臣擧哀。六月戊申。發喪於詳政殿,金岳宣遺詔。己酉。殯于詳政殿之西階。庚午。上諡曰神聖大王,廟號太祖。壬申。葬顯陵,以遺命,喪葬園陵制度依漢魏二文故事,悉從儉約,以神惠王后柳氏祔葬。后貞州人,三重大匡天弓之女也。天弓家大富,邑人稱爲長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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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일. 재신인 염상왕규, 박수문 등이 시중들 때 왕이 말하였다. "한문의 유조는 이르기를, '하늘 세상 만물이 생겨날 때에 멸하는 것이 없고 죽음은 천지의 이치요 사물의 자연이니 어찌 그리 슬퍼할 일이겠는가.' 옛날 현명한 임금들도 마음속으로 이와 같았다. 내가 병이 들어 이미 스무 날을 지났으니, 죽음을 돌아감처럼 여기니 무엇을 근심하랴. 한문의 말은 곧 나의 뜻이다. 안팎의 중요한 일들이 오랫동안 결정되지 않은 것은 경들과 태자 무가 함께 결정한 후에 듣도록 하라." 병오일. 병이 크게 깊어져 어신덕전에서 학사 김악을 불러 유조를 작성하게 하였다. 문서를 마치자 왕은 다시 말을 하지 않았다. 좌우들은 소리 내어 슬피 울었고, 왕이 물었다. "이 무슨 소리인가?" 대답하기를, "성상께서 백성의 부모가 되셨는데 오늘 무리한 신하들을 버리려 하시니, 저희들이 통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왕이 웃으며 말하였다. "덧없는 인생은 예로부터 그러했느니라." 말을 마치고 잠시 후 돌아가셨다. 태자와 여러 왕족 및 근신들은 모두 땅에 엎드려 슬피 울부짖었고, 백관들은 내의정사문 밖에 줄지어 서 있었다. 왕규가 나와 유언을 전하며 말하였다. "안팎의 모든 신료들은 모두 동궁에서 처분하도록 하라." 이에 태자가 즉위하여 무리한 신하들을 이끌고 슬픔에 잠겼다. 6월 무신일. 상복을 입고 상세정전에서 발상하였고, 김악이 유조를 전하였다. 기유일. 상세정전의 서쪽 계단에 관을 모셨다. 경오일. 사후에 신성대왕이라 칭하고 태조로 추존하였다. 임신일. 현릉에 장사 지내었으며, 유언에 따라 상장원릉 제도는 한나라와 위나라 두 문헌의 예를 따르고 모든 것을 검소하게 하였으며, 신혜왕후인 유씨를 함께 묻었다. 후는 정주 출신으로, 삼대 대광천궁의 딸이었다. 천궁 가문은 매우 부유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를 장자라 불렀다.
卷一자동번역 · 검수 대기
원문
太祖爲將軍,引兵過貞州,息馬古柳下,后立路旁川上,見其有德容,問誰氏。女對曰:「此邑長者家女也。請暫憩弊廬。」太祖因至宿焉。其家饗一軍甚豐,以后侍寢。厥後,絶不相聞,后守節,剃髮爲尼。太祖聞之,召以爲夫人。擧義提甲,贊成大業。李齊賢贊曰:「臣及事忠宣王,王嘗言:『我太祖規模德量生於中國,當不減宋太祖。宋太祖事周世宗,世宗賢主也,待宋太祖甚厚,宋太祖亦爲之盡力。及恭帝幼沖,政出太后,迫于群情,而受周禪,蓋出於不得已也。我太祖仕弓裔猜暴之君,三韓之地,裔有其二,太祖之功也。以不世之功,處必疑之地,可謂危矣,而國人歸心,將士推戴,然猶固讓,欲徇延陵之節。弔伐之事,亦豈得已哉。其好生惡殺,而信賞必罰,推誠功臣,而不假以權,創業垂統,固宜一揆矣。至若宋祖以江南李氏比之鼾睡臥榻,則石晉所賂契丹山後之十六州,蓋視以爲橐中物,旣收北漢,將長驅以定秦漢之疆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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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장군이 되어 병거를 이끌고 정주를 지나, 마차를 쉬는 고류하에 이르렀다. 뒤에 길가 시냇물 위에 자리 잡은 곳을 보고 그곳에 덕 있는 기운이 있다고 여겨 누구의 집인지 물었다. 여자가 대답하기를 "이 마을의 장자 가문의 딸입니다. 잠시 저희 초막에서 쉬게 해 주십시오."라 하였다. 태조는 그리하여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안에서는 군대 한 부대를 먹이는 것이 매우 풍성했고, 나중에 시중을 들었다. 그 후로는 다시 듣지 못하였고, 절개를 지키며 머리를 깎아 비구니가 되었다. 태조가 이를 듣고 불러들여 부인으로 삼았다. 의로운 일을 들어 갑옷을 갖추게 하고 큰일을 이루는 데 힘썼다. 이제현이 말하기를 "신이 충선왕을 모실 때,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태조의 규모와 덕망은 중국에서 난 것이니, 송나라 태조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송태조가 주나라 세종을 섬겼으니, 세종은 현명한 군주였고 송태조를 매우 후하게 대했기에, 송태조 또한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공제께서 어릴 때 병이 들어 정치는 태후의 손에 맡겨졌는데, 여론에 휩쓸려 주나라의 자리를 받아들인 것은 부득이한 것이었다. 나의 태조는 궁예와 계모 같은 폭군을 섬겼으니, 삼한의 땅 중에서 예가 차지하는 부분은 적지만, 태조의 공적이 있다. 세상을 뒤흔드는 공적을 의심받기 쉬운 곳에 두었으니, 위태하다고 할 수 있으나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돌리고 장사들이 받들어 따랐다. 그러나 여전히 자리를 양보하려 하고 연릉의 절개를 지키려 했다. 치욕을 씻는 일 또한 어찌 피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생명을 사랑하고 살육을 싫어하며, 믿음과 상은 반드시 벌하고 공신에게 덕을 베풀면서도 권력에 의지하지 않았다. 창업하여 대를 이어나가는 것은 마땅히 한 가지로 모아야 한다. 심지어 송나라 태조가 강남의 이씨와 비교하여 잠자리에 누워 있는 모습을, 마치 석진이 뇌물로 개단을 얻은 뒤의 열여섯 주(州)를 마치 주머니 속 물건처럼 여기는 것과 같다. 이미 북한을 차지했으니, 이제 장차 거느리고 진한의 강토를 확정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卷一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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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太祖卽位之後,金傅未賓,甄萱未虜,而屢幸西都,親巡北鄙。其意亦以東明舊壤爲吾家靑氈,必席卷而有之,豈止操雞摶鴨而已哉。由是觀之,雖大小之勢不同,二祖規模德量所謂易地皆然者也。』忠宣聰明好古,中原博雅之士如王構閻復姚燧蕭𨟉趙孟頫虞集皆遊其門,蓋嘗與之尙論也。」史臣曰:「太祖御下以寬,而賢智效力,待人以誠,而遠近響應,好生之仁出於天性,恤民之心發乎至情。甄萱父子相夷,則伐而取之,金傅君臣來附,則禮以待之。以契丹之强而侵滅與國,則絶之,以渤海之弱而失地無歸,則撫之。屢幸西京,以爲根本之地也,親巡北鄙,以連獷悍之俗也。草創更始,雖未遑於禮樂,而其規模遠略,深仁厚澤,固已培養五百年之國脈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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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조가 즉위한 후, 김부와 전선은 아직 신하가 아니었고, 전선은 아직 포로가 아니었으나, 여러 번 서도에 행차하여 직접 북방의 변방을 순행하였다. 그 뜻은 또한 동명의 옛 땅을 우리 집의 푸른 털가죽으로 삼아 반드시 차지하리라는 것이니, 어찌 닭을 잡고 오리를 쫓는 것에 그칠 수 있겠는가. 이로 보건대, 비록 크고 작은 세력의 규모는 다르나, 두 조의 기상과 덕망은 이 땅이 변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충선은 총명하고 옛것을 좋아하여, 중원의 우아한 선비들인 왕구, 염복, 요수, 소장, 조맹부, 우집 등이 모두 그의 문하에 머물렀으며, 그와 자주 학문을 논하였다고 한다. 사신이 말하길, "태조께서는 너그럽게 대하시고, 현명함과 지혜와 힘을 갖추었으며, 사람을 대할 때 성의로 대하고, 멀고 가까운 곳에 응답하며, 생명을 사랑하는 인애는 타고난 본성에서 나오고,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은 지극한 정서에서 비롯된다. 전선 부자는 서로 이지(夷)를 하니, 군사로 치고 빼앗고, 김부 군신이 와서 따르니, 예로써 대접하였다. 거란의 강함으로 침략하여 나라를 멸하려 하니, 끊어버리고, 발해의 약함으로 땅을 잃어 돌아갈 곳이 없으니, 달래었다. 여러 번 서경에 행차하여 근본이 되는 땅으로 삼았고, 직접 북방 변방을 순행하여 거친 풍속과 연결하였다. 나라를 처음 세우고 시작할 때, 비록 예악(禮樂)에 겨를이 없었으나, 그 기상과 계획은 멀고 넓으며 깊은 인애와 두터운 은혜로 이미 오백 년의 국가의 맥을 기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