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高麗AD 918 – AD 1392문헌 원문 ·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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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卷七
卷七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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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金景庸爲左僕射參知政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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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경용을 좌복사 삼지정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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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侍中魏繼廷入省視事。御史奏:「繼廷寢疾彌年,不能視事,數請告,上待之益厚,賜假二百日。假日已盡,乃復遷延,不出累旬,然後扶起入省,非大臣意。請罷之。」不許。史臣金富佾曰:「繼廷以文章名世,淸白謇直,輔佐累朝。宣宗燈夕置酒,繼廷爲樞密院承宣。王酒酣,命繼廷舞。繼廷辭曰:『有伶人,何用臣舞。』王不强之。及爲御史中丞,宣宗寵姬萬春起第壯麗。繼廷奏曰:『萬春誑惑上意,勞役百姓,大起私第。請毀之。』書上,不報。宣宗遣李資義使宋,繼廷爲副。資義多市珍貨,繼廷一無所求。至登兩府,不改素節。擧世皆好佛,位高者以營寺寫經爲事,繼廷獨不然。是故國人想望大用見其施設。及爲相,循默無所建明,蓋知其勢之不可爲,又以老病耳。至是,乞退,上惜其去,再降手詔,以宿留之,又遣中使而敦諭之。故入朝數日,復告而歸焉。御史不原情而劾之,豈不謬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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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侍中) 위계정(魏繼廷)이 들어와 일을 살폈다. 어사(御史)가 아뢰기를, "계정이 병을 앓은 지 오래되어 일을 볼 수 없는데, 몇 번이나 고하여도 임금께서 너무 후하게 대우하시어 휴가를 이백 일이나 주셨습니다. 휴가가 다했음에도 다시 연기되어 열흘 넘게 나오지 않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들어와 나아진 것이 대신(大臣)의 뜻이 아닙니다. 그를 물러나게 하소서."라고 아뢰었다. 허락하지 않았다. 사신 금부일(金富佾)이 말하기를, "계정은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맑고 곧으며, 여러 왕조에 보좌했습니다. 선종 때 저녁에 술자리가 열렸을 때, 계정이 수밀원 승선(承宣)을 맡았습니다. 왕께서 술이 취하여 계정에게 춤추라고 명하니, 계정이 사양하며 '재주꾼이 있는데 어찌 신이 춤출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왕께서는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을 때, 선종의 총애를 받은 만춘(萬春)이 집을 크게 꾸미고 화려하게 지었습니다. 계정이 아뢰기를 '만춘이 임금의 뜻을 속이고 백성들에게 고된 노동을 시키며 큰 사적인 저택을 지으니, 이를 허물어 버리소서'라고 했습니다. 상소문에는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선종께서 이자의(李資義)를 보내 송나라에 가게 하셨고, 계정이 부관이 되었습니다. 자의는 여러 진귀한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나, 계정은 아무것도 사구하지 않았습니다. 두 관청에 이르러서도 본래의 절개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불교를 좋아하여 지위가 높은 이들은 절을 짓고 경전을 베끼는 일로 바빴는데, 계정만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에게 큰 쓰임이 있기를 기대하며 그의 처신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침내 재상이 되었으나, 조용히 아무것도 세우지 못했는데, 이는 그 세력의 형편상 어려움을 알고 있었고 또 늙고 병든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지경에 이르러 물러나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그의 떠남을 아쉬워하여 다시 명을 내려 머물게 하셨고, 중사(中使)를 보내 간곡히 권유했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 며칠 나아갔다가, 또 고하고 돌아왔습니다. 어사가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를 고발하니, 어찌 틀린 것이 없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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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亥二年宋大觀元年,遼乾統七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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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 2년 송대관 원년이자 요건통 7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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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正月。遼遣高存壽來,賀生辰,仍賜大藏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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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정월. 요나라가 고존수(高存壽)를 보내 생일을 축하하며, 대장경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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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侍中魏繼廷復三上表乞退。王重違其志,許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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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 위계정이 다시 상부에 글을 올려 물러나기를 청하니, 왕중이 그 뜻에 어긋나지 않아 허락하였다.
卷七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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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制曰:「置學養賢,三代以降,致治之本也,而有司議論有所未定。宜令疾速施行。」王方嚮文學,遂下此制,大臣無一人奉承,時議惜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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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에 이르기를, 학문을 세우고 어진 이를 기르는 것은 삼대 이후로 치세의 근본이 되나, 사사들의 논의에 미정된 바가 있다. 신속히 시행할 만하다. 왕방은 문학에 능하여 마침내 이 제도를 내렸으나, 대신 중 누구도 받들어 따르지 않아 이때 의논하기에 아까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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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門下侍郞平章事致仕林槩卒。槩淸直,有大臣風。嘗,管句大倉署,有韓順者,居倉側,盜竊倉穀,誣弄官吏,家資鉅萬,至有縉紳與之交通者。槩發其奸,置於法。朝議多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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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시랑 평장사지(平章事)로 물러난 임재졸(林<0xE6><0xA7><0xA9>卒)이 있다. 재청직(淸直)으로 대신 같은 풍모를 지녔다. 일찍이 관구대창서에 한순이라는 자가 창고 곁에 거주하며 곡식을 훔치고 관리들을 속였는데, 집안 재산이 막대하여 심지어 사대부와도 연줄을 두었다. 임재가 그의 간악함을 밝혀 법으로 다스리게 하니, 조정에서 이를 많이 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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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僧曇眞爲王師。初,王欲封眞爲王師,以右諫議金緣爲封崇使。緣辭曰:「臣職在諫院,已言封王師之不可,未蒙兪允。又從而行之,則是欺殿下也。」王强之再三。固辭不就。改命內侍柳台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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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담진을 왕사로 삼았다. 처음에는 왕이 진을 왕사로 봉하려 하자, 우측의 간의금연이 봉숭사로 삼아 만류하였다. 연이 말하기를, "신은 간원(諫院)의 직책을 맡고 있어, 왕사를 봉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이미 말했으나, 아직 폐하의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또 그렇게 행한다면, 이는 폐하를 속이는 것이 됩니다." 왕이 강하게 재차 권했으나, 굳이 사양하였다. 명을 바꾸어 내시 유대수에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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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賜魏繼廷茶藥二銀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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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에 계정에게 차약 두 은 합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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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月。分遣諸道安撫使,問民疾苦,察守令殿最以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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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각 도의 안무사들을 파견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수령들의 사정을 가장 자세히 들었다.
卷七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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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月。詔曰:「當萬物發生之時,不麛不卵者,實禮典之成規而先王之仁政也。今,諸道守令雖曰分憂,鮮克循令,或托供膳以要上賞,又厚饗使客以悅其意,田獵無時。或農夫火耕,延燒物命,有乖對時育物之義,足傷天地之和,一切禁斷。違者,罪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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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에 조서가 내려지기를, "만물이 생겨날 때, 자연스럽고 인위적이지 않은 것이야말로 진실로 예법의 규범이며 옛 임금들의 어진 정치이다. 지금 여러 도의 수령들이 비록 근심을 나누어 맡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법도를 따르는 자가 드물고, 혹은 곡식과 음식을 바치며 높은 상을 바라거나, 또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손님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느라 사냥할 시간이 없다. 또는 농부들이 불로 밭을 갈아 생명을 태우는 것은 때맞춰 만물을 기르는 도리에 어긋나 하늘과 땅의 조화를 해치니, 모든 금지된 행위이다. 위반하는 자는 죄를 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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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祭天地及境內山川神祗於闕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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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마당에서 하늘과 땅, 그리고 경내의 산천 신들을 친히 제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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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四月。王始視朝於乾德殿。百官初以國恤不帶紅鞓,至是,復令帶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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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라 4월. 왕시가 건덕전에서 조회하였다. 백관들은 처음에는 나라의 근심을 품고 홍색 띠를 두르지 않았으나, 이에 다시 두르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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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繼廷再上表辭祿。詔曰:「公博學攻文,詞林宗匠,匪躬直節爲世名臣。因疾解官,甚惜其去,又從而辭祿,非朕所以優賢敬老之意。宜令三司給二分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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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계정이 다시 상소를 올리며 녹봉을 청하였다. 조서에 이르기를, "공이 학문을 넓히고 문예를 익혀 말솜씨가 뛰어나 사림의 스승이며, 몸소 지키는 절개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신하이다. 병으로 인해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니, 매우 아쉬우며, 또 이로 인해 녹봉까지 사양하는 것은 짐이 현명한 사람을 높이고 노인을 공경하려는 뜻이 아니다. 삼사(三司)에 명하여 녹봉의 둘째를 내려주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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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思肅王后李氏配宣宗廟。初,宣宗爲國原公,納李預女爲妃,未幾而卒,是爲貞信賢妃。又納祭酒李碩女,生獻宗,封王后。及獻宗卽位,尊爲太后。薨,諡思肅。至是,議宣廟之配,王欲以貞信配。諫官奏云:「貞信爲國原公妃,年月甚淺。思肅自嬪公府以至踐位,內助居多。及太子繼統,臨朝稱制者三年,獻宗遜位于肅宗,退居舊宮,永無失德。以思肅配。」便制曰:「嫡庶之分,不可不別。更詳禮典以聞。」諫官復奏曰:「春秋之義,國君卽位未逾年者,不合列序昭穆。國君如此,況后妃乎。請以思肅升配。」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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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숙왕의 후궁인 이씨를 선종묘에 배향하고자 하였다. 처음에는 선종이 국원공(國原公)이었을 때, 이예녀를 비로 맞아들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 정신현비가 되었다. 또 제주(祭酒)의 딸 이석녀를 맞아들어 현종을 낳고 왕후로 봉하였다. 현종이 즉위하자 존하여 태후로 삼았다. 돌아가시자 사숙이라 칭했다. 이에 선묘의 배향할 사람에 대해 의논하였는데, 왕은 정신을 배향하고자 하였다. 간관이 아뢰기를, "정신은 국원공의 비였으나 세월이 매우 짧습니다. 사숙은 빈공부(嬪公府) 때부터 지내다가 즉위하여 내조한 것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태자가 계승할 때 임금처럼 행동한 것이 삼 년이나 되었습니다. 현종이 자리를 양보하고 숙종의 뒤를 이어 옛 궁에 물러난 이후로 덕을 잃은 적이 없습니다. 사숙으로 배향해야 합니다." 하니, 이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적서(嫡庶)의 구분은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예전(禮典)을 더 자세히 마련하여 알리라." 간관이 다시 아뢰기를, "춘추의 도리에 비추어 볼 때, 국군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에게는 계보상 적절하지 않습니다. 국군께서 그러하시다면 후비는 오죽하겠습니까. 사숙으로 승격하여 배향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이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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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月。遣考功郞中朴景伯如遼,賀天興節,刑部員外郞李韶永謝賀生辰,起居舍人朴昇中賀正,侍御史河彥碩進方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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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공을 세운 사람 중 박경백을 요로 보내고, 천흥절을 축하하며, 형부원외랑 이소영에게 생신을 축하하고, 거거사랑 박승중에게 정을 축하하며, 시어사 하언석에게 방물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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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九月。平章事崔弘嗣等奏:「太史言:『自御松岳都城今二百餘年。欲延基業,宜卜西京龍堰舊墟,別創新闕,移御受朝。』」知樞密院事吳延寵復奏曰:「弘嗣等所奏龍堰作宮,有三不可。以文宗明睿,猶惑術數,作西京左右宮,旣而悔悟,以爲無應,終不巡御,虛費財力,其不可一也。近者,開創南京,迨七八年,而無吉應,其不可二也。西京舊宮與今所求龍堰相去不遠,地勢吉凶未必有異。況無明訣可徵,而棄祖宗舊宮,別構新關,毀撤屋廬,騷動人民,其不可三也。伏望英斷,勿疑一依老臣所奏,巡御舊宮,無從臆說妄興工役以致人怨。」王卒從弘嗣等所言,時議惜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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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아홉째 달. 평장사 최홍사 등이 상주하였다. 사서가 말하기를, "임송악의 도읍이 지금 200여 년이 되었다. 기업을 이어가려면 서경 용연 옛터에 점을 치고, 별도로 새로운 궁궐을 세워 임금이 거처하며 조회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지추밀원사 오연총이 다시 상주하여 말하기를, "홍사 등이 올린 대로 용연에 궁궐을 짓는 것은 세 가지 이유로 안 된다. 첫째, 문종 명예가 아직도 술수와 점괘에 현혹되어 서경 좌우궁을 지었는데, 이미 후회하고 마땅하지 않다고 여겨져 끝내 임금이 거처하지 않아 재력만 헛되이 쓰고, 이것이 첫 번째로 안 되는 이유이다. 둘째, 근래에 남경을 열었으나 7~8년 동안 상서로운 기운이 없어, 이것이 두 번째로 안 되는 이유이다. 서경의 옛 궁궐과 지금 구하려는 용연은 거리가 멀지 않아 지세가 길흉에 있어 반드시 다르다고 할 수 없다. 하물며 밝은 계책으로 증명할 것이 없고, 조상들의 옛 궁궐을 버리고 별도로 새 문을 짓고 집들을 허물어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세 번째로 안 되는 이유이다. 삼가 영의정께서 판단하시어, 노신들이 올린 대로 옛 궁궐에서 임금이 거처하는 것이 좋으니, 아무렇게나 공사 현장을 일으켜 사람들의 원망을 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왕졸은 홍사 등이 말한 바를 따라 당시 논의하며 아까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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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十月。設百座道場於會慶殿。齋僧一萬於闕庭,二萬於州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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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열 번째 달에 회경전(會慶殿)에 백 개의 도장(道場)을 마련하였다. 승려들은 궐정(闕庭)에 만 명, 주부(州府)에 이만 명을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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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寅。以將伐女眞,御順天館南門,閱兵,分賜銀布酒食。女眞本靺鞨遺種,散居山澤,未有統一。其在定州朔州近境者,雖或內附,乍臣乍叛。及盈歌烏雅束相繼爲酋長,頗得衆心,其勢漸橫。伊位界上有連山,自東海岸崛起,至我北鄙,嶮絶荒翳,人馬不能度。間有一徑,俗謂甁項,言其出入一穴而已。若塞其徑,則女眞路絶。故邀功者,往往獻議,請出師平之。肅宗七年,女眞來屯定州關外。八年,誘執酋長許貞與羅弗等,囚廣州栲問,果謀我也。遂留不遣。會,邊將李日肅等奏:「女眞虛弱,不足畏。失今不伐,後,必爲患。」明年,遣林幹,潛師往伐,敗績。女眞乘勝,闌入定州宣德關城,殺掠無算。又遣尹瓘,代幹伐之,又敗績,軍勢不振。遂卑辭請和,結盟而還。肅宗發憤,告天地神明,願借陰扶掃蕩賊境。遂鍊兵畜穀以圖再擧。及王卽位,以喪未遑出師。至是,邊將報:「女眞强梁,侵突邊城。其酋長以一胡蘆縣雉尾,轉示諸部落,以議事,其心叵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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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년. 여진을 치러 군사를 이끌고 순천관 남문에서 병력을 점검하며 은포와 술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여진은 본래 랑랑의 후예로 산지에 흩어져 살았으며, 통일된 곳이 없었다. 정주와 사주 근처에 있는 자들은 비록 내지하는 이도 있고 때때로 반란을 일으키는 이도 있었다. 영가우아 등이 차례로 두목이 되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세력이 점차 거세졌다. 그 위치는 경계에 산맥이 있어 동해안에서 일어나 우리 북쪽 변방까지 험준하고 황량하여 사람과 말이 건너기 어려웠다. 중간에 길이 하나 있는데, 속칭 항항이라 하며 출입구가 하나의 구멍일 뿐이라고 했다. 만약 이 길을 막으면 여진의 길이 끊긴다. 그리하여 공을 세운 자들은 종종 의견을 내어 군사를 보내 평정할 것을 청했다. 숙종 7년, 여진이 돈주 관 밖에 와 있었다. 8년에는 두목 허정이와 나부 등과 함께 광저우 고모에서 붙잡아 심문했고, 마침내 나를 모의하게 했다. 그리하여 머물게 하고 보내지 않았다. 회의에서 변방 장수 이일숙 등이 아뢰기를 "여진은 허약하니 두려워할 것이 없다. 지금 치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다음 해에 임간을 보내 비밀리에 군사를 일으켜 치다가 패전했다. 여진은 승세를 타고 돈주 선덕관성까지 깊숙이 들어와 살육을 거듭했다. 또 윤장에게 보내 간을 대신하여 치게 했으나, 이 역시 패전하여 군세가 쇠퇴했다. 결국 비굴하게 화친을 청하고 동맹을 맺고 돌아갔다. 숙종은 분개하여 하늘과 땅의 신명께 고하며 도적의 근거지를 쓸어버릴 힘을 빌리기를 원했다. 이에 병사와 가축, 곡식을 단련하여 다시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왕이 즉위하자 상(喪)으로 인해 군사를 일으키지 못했다. 이때 변방 장수가 보고하기를 "여진은 강한 덩치로 변방 성을 침범하고 있다. 그 두목은 한 호로현의 지미 꼬리를 가지고 여러 부족들에게 보여주며 일을 의논하는데,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卷七자동번역 · 검수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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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聞之,出重光殿佛龕所藏肅宗誓疏以示兩府大臣。大臣等奉讀,流涕曰:「聖考遺旨深切若此,其可忘諸。」乃上書,請繼先志伐之。王猶豫未決,命崔弘嗣筮于大廟,遇埳之旣濟,遂定議出師。以尹瓘爲元帥,吳延寵副之。瓘卽奏言:「臣嘗奉聖考密旨,今,又承嚴命,敢不統三軍破賊壘拓爲我疆以雪國恥。」延寵頗以爲疑,微語瓘。瓘慨然曰:「今,微公與我,誰能出萬死之計以雪國家之恥。策已決矣,又何疑焉。」延寵默然。惟金緣上疏,極言出師之不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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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이를 듣고 중광전 불감에 보관된 숙종의 맹서로 양부 대신들에게 보였다. 대신들이 받들어 읽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성왕께서 남기신 뜻이 이토록 깊으시니,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상소하여 먼저 세운 뜻을 따라 치러 나갈 것을 청하였다. 왕께서 여전히 망설여 결정하지 못하자, 최홍에게 대묘에서 점을 치게 하였고, 뫼의 기제(旣濟)를 만나 마침내 출사하기로 의논하였다. 윤숙을 원수(元帥)로 삼고 오연총을 부관으로 삼았다. 숙이 곧 아뢰기를, "신은 예전에 성왕의 비밀스러운 뜻을 받들었고, 이제 또 엄한 명을 받았으니, 감히 삼군을 이끌고 적의 진지를 깨뜨려 우리 강토를 넓혀 나라의 부끄러움을 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연총은 다소 의심스러워하며 숙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숙이 감개무량하게 말하였다. "지금, 미공과 나를 두고 누가 만 번 죽음을 각오한 계책으로 나라의 부끄러움을 씻을 수 있겠습니까. 계책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또 무엇이 의심하겠습니까." 연총은 말없이 있었다. 다만 김연이 상소하여 출사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극구 말하였다.